양재현의 신앙과 순교
한건 신부 / 순교성지사목 handom@naver.com
양재현은 1827년에 태어났으며, 경상도 동래 북문 밖 신내동(현 금사동)에 살았고, 이정식이 그의 대부이다. 그는 좌수 신분이기에 그 지역사회에서 학식과 명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체포 당시 양재현이 동래에서 상급관청인 통영으로 이송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사회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병인박해 때 이정식 가족들은 피신했지만, 그는 동래에 머물면서 좌수일을 했다. 1868년 박해가 심해지고 천주교 신자 수색이 강화될 때, 이정식 가족보다 먼저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동래와 통영을 오가며 심문을 받았는데, 지역사회의 유지인 그를 배교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배교의 회유에도 그는 한결같이“저는 죽어도 배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영화를 다 준다 하여도 끝내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통영에서 동래로 다시 이송되었을 때, 이정식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이 천주의 은혜라고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의지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선고를 내렸고, 1868년 8월 경상 좌수영에서 그는 이정식 가족과 함께“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라는 노래를 부르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참수형을 당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의 시신이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고 했지만, 후에 어떻게 이장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오륜대순교자성지에는 가묘만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를 기록한 『치명일기』에 823번으로 기록되었지만, 아쉽게도 1899년 시복 청원 대상인 26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시복의 영광은 뒤로 미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