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2호 2026년 10월 25일
가톨릭부산
하느님의 언어


박선정 헬레나

남천성당 · 인문학당 달리 소장


   우리는 또다시 참 잔인한 시대에 산다. 내 몫의 결핍은 견디지 못하면서 타인의 허물에는 눈을 번뜩인다. 보이지 않는 스크린 너머로 무심한 돌멩이를 던지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통장의 잔고로 자존감을 찾는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자동차의 끝없는 경적 소리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듯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나는 종종 도망치듯 뒷산으로 향한다.

   폭우와 거친 바람, 찌는 듯한 땡볕을 고스란히 얻어맞으며 생겨난 나무의 튼살, 찢기고 부러진 가지의 흔적들이 그것이다. 특히 비 갠 뒤의 대나무 숲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대나무 줄기에 귀를 대어 본 적이 있는가. 운이 좋다면 ‘쏴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게는 대나무가 물을 마시는 소리처럼 들린다. 깊은 땅속에서 물을 빨아올려 맨 꼭대기 잎사귀 끝까지 밀어 올리는 살아 있음의 힘.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지닌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오직 뿌리박힌 그 자리에서 온몸으로 지구의 중력을 이겨 내며 살아가는 대나무의 경이로운 삶의 현장이다.

   우리는 의식 없는 이를 향해 쉽게 ‘식물인간’이라는 말을 쓴다. 마치 식물이 무기력하게 방치된 존재인 것처럼. 하지만 식물만큼 치열하게 자기 생을 떠받치는 존재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돈도 없고, 자신을 보호해 줄 부모도 곁에 없다. 심지어 비바람을 피할 집도 없다.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잔인한 햇볕과 바람과 흙이라는 날것의 조건 속에서 묵묵히 살아 낸다.

   오랫동안 나는 하느님을 오해했다. 그분은 과묵한 분이시거나, 인간의 말은 너무 원망이 많고 바라는 바가 많아서 애써 외면하는 분이라 여겼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간절한 기도에도 늘 침묵하시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기대하는 언어로만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방에 그분의 언어가 보인다.

   돌틈의 꽃과 담벼락의 적은 흙에서 올라온 새싹은 응원의 편지였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의 목소리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그분의 절실한 언어였다. “제발 좀 읽어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런데도 꽃향기와 나뭇잎 사이 찬란한 햇빛에 담긴 하느님의 응원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어려운 이들의 목소리에 담긴 그분의 편지는 ‘주소불명’으로 되돌려보내졌다.

   하느님의 언어를 듣는다는 것은 신비로운 기적을 바라는 종교적 환상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난도질하지 않고, 이름 없는 작은 생명의 숨소리 앞에서도 나를 낮추는 일이다.

   이제야 알겠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세상의 요란한 소음에 지친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일은 다시 산에 올라 나무의 튼살과 악수를 나누고, 대나무의 열정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편지를 읽어봐야겠다.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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