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3호 2026년 8월 30일
가톨릭부산
우리는 하느님을 죽여야만 합니다.


김수진 사도요한 신부

울산대리구 청소년사목 담당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는 보통 우리의 기도에 맞갖은 응답이 주어지면 그 순간에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역시 하느님은 계시구나.’하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체코의 사제이자 신학자인 토마시 할리크는 ‘응답이 있는 기도’보다 ‘응답이 없는 기도’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체험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러한 시간이 ‘신앙의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명명백백하게 주어지는 응답 앞에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기대했던 어떤 응답도 주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 그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순간이야말로 신앙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느 여인이 한 랍비에게 오랜 세월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이 거기에 전혀 응답하시지 않으신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고 계십니다. ‘안 돼!’라고요.” 우리 또한 이미 우리가 먼저 답을 정해놓고서는 하느님께서 그 답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침묵하고 계신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응답에서 오는 확신은 겉보기엔 굳건한 믿음처럼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직역하면 내 뒤에 서라).” 베드로는 강한 주님, 죽지 않는 주님을 원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이겨야 하고,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셨습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앞서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은 내가 정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에 맞갖게 주님께서 응답하시면 ‘역시 주님은 계시구나.’ 하고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죽으셔야만 합니다. 아니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어 그 안에 끼워 맞추던 하느님,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하느님께서 다시금 부활하실 것입니다.


   “내 뒤에 서라.” 신앙은 내가 하느님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침묵은 그 주도권을 되찾으시는 주님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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