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2266호 2014년 3월 30일
가톨릭부산
79위 순교자 시복 과정

79위 순교자 시복 과정

 

한건 신부 / 순교성지사목 handom@naver.com

 

  1831년 9월 9일로 조선교구가 설정된 뒤, 초대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땅을 밟지 못했지만,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들어왔다. 1839년 박해로 선교사들과 많은 신자들이 순교할 때, 앵베르 주교는 현석문 가롤로에게 순교 상황을 기록하게 했고, 그는 신자들의 기록을 토대로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인『기해일기』를 만들었다. 1847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한 이들을 포함한『증보판 기해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1847년 10월 최양업 부제는『증보판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교황청에서는 이 보고서를 접수하고,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을 위한‘주교에 의한 조사 수속’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1857년 9월 21일 교황 비오 9세는 시복 추진을 허락하였고, 82명의 순교자는‘가경자’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 중이었기에, 1882년에‘주교가 추진하는 교황청 수속’을 시작하여 1906년에 조사 결과를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1910년 7월 교황청에서는‘시성성에서 추진하는 교황청 수속’에 착수하였다. 교황청 회의에서 3위(정아가타, 한안나, 김바르바라)는 순교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에 미흡하여 시복에서 누락되었고, 그 외 순교자는 기적 관면이 이루어졌다. 1925년 5월 12일에 교황청 시성성 최종 회의를 통해 79위의 순교자 시복이 결정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79위를 복자품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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