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6호 2026년 9월 20일
가톨릭부산
순교자들의 얼을 되새기며, 삶 속에서 피어나는 순교 영성


민훈기 가브리엘

석포성당 · 시인


   우리 신앙 선조들은 학문적 갈망과 진리를 향한 순수한 이끌림으로 하느님을 먼저 찾아 나섰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며 등불처럼 밝혀 든 신앙은 마침내 목숨을 온전히 바치는 거룩한 사랑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청년다운 결기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굳센 평신도 지도력, 그리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가 흘린 피는 헛되이 땅에 묻히지 않고 오늘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든든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도 순교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발로 뛰며 찾아내 『기해일기』로 엮어냈던 성 현석문 가롤로의 숭고한 헌신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박해 속에서도 동료들의 신앙 증거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고자 했던 그분의 발걸음은, 훗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킨 찬란한 믿음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숭고한 피와 땀이 어린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 스스로 믿음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칼날과 형틀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박해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교묘하고 은밀합니다. 끝없는 물질적 욕망과 편리함, 타인을 밀어내고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려는 이기심, 차갑게 식어가는 사랑이 우리를 끊임없이 흔듭니다.

   선조들이 피를 흘려 하느님을 증거한 순교의 삶을 살았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의 숨결 속에서 자신을 내어놓고 이웃을 품는 삶, 일상의 순교를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순교는 거창한 희생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나를 앞세우고 싶은 마음을 한 걸음 물러서 비워내는 겸손, 나를 상처 입힌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용서 한 마디, 소외되고 지친 이들의 손을 묵묵히 잡아주는 연민, 교회공동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기꺼이 내어놓는 자기 비움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복음적 삶의 모습이며 순교 영성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뿌린 피와 눈물의 씨앗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손에 풍성한 열매로 맡겨졌습니다. 세상의 파도와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참된 가치를 증언하는 일, 침묵 속에서도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향해 온유한 빛이 되어 주는 일이야말로 순교자들의 숭고한 믿음에 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응답일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단순히 추모하는데 머물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증언할 때 순교자들의 거룩한 얼은 우리 안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 숨 쉴 것입니다.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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