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5호 2026년 9월 13일
가톨릭부산
사라진 집, 남겨진 사랑-부산교구 자선아파트를 기억하며


손숙경 프란치스카 로마나

온천성당 · 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산교구사에는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60년대 부산에는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판잣집과 천막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다. 부산교구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빈민주택사업을 시작했다. 교구의 재정만으로는 어려움이 컸지만,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가 사순절에 모은 헌금으로 부산의 피란민들을 위한 주택 건립을 지원했다.


   1960년 첫 지원금이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66년까지 부산 곳곳에 여덟 차례에 걸쳐 모두 198가구의 주택과 아파트가 마련되었다. 그 가운데 1964년에 지어진 해운대 자선아파트에는 35가구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 집들은 주거 공간을 넘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희망의 보금자리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집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해운대 자선아파트가 재개발을 위해 매각되면서 2016년 부산교구는 30억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교구는 세금을 제외한 금액을 다시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과 자선사업에 사용하기로 했다. 반세기 전 오스트리아 신자들이 사순절에 내어놓은 작은 정성이 부산의 가난한 이들에게 집이 되었고, 그 집의 터전에서 나온 보상금은 다시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사랑이 사랑을 낳은 셈이다.

   박해 시대의 교우촌을 떠올려본다. 신분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서로 의지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신앙을 지켜 갔던 교우촌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신앙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삶을 보듬었던 공동체였다. 자선아파트의 역사에서도 이와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은 결국 공동체의 힘이었다.


   오늘날 가난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누군가에게 삶의 자리가 되어 주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자선아파트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내 곁의 누군가에게 어떤 보금자리가 되어 주고 있는가?”


   건물은 사라졌지만 사랑은 남았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웃의 삶을 지탱하는 작은 주춧돌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60여 년 전 시작된 나눔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주춧돌을 놓고,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작은 집을 하나씩 지어 간다면, 자선아파트가 남긴 사랑은 오늘에도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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