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0호 2026년 1월 25일
가톨릭부산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누구의 것인가?

 
이재현 루도비코 신부
사직대건성당 주임
 
   해외 원조 주일을 맞이하여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우리는 흔히 원조 혹은 자선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힘들게 번 ‘나의 것’을 좋은 마음으로 베풀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의 절대적 지배권을 강조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모든 재화의 주권이 하느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사용권을 위탁받은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재화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재화의 소유주인 양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때 죄가 발생합니다. 교회는 소유의 양이 아니라 소유의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한 번도 부자를 단죄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이 재물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때 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란, 모든 이(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 내려주신 재화를 모두를 위해 사랑으로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수억 명의 이웃이 절대 빈곤 속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기아의 원인은 식량 부족이 아닙니다. 지구는 이미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우리가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굶주림은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정의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세상의 부조리를 개인의 힘만으로는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에는 당장 굶고 아파하며 죽어가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아파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많다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멀리 있는 이웃을 돕지 않는 사람이 가까운 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멀리 있는 이웃을 도와본 사람은 그 경험과 기쁨으로 자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더 잘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그마한 행복마저도, 어쩌면 우리보다 더 못한 처지에서 굶주림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우리 이웃이 희생한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해외 원조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복음적 정의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개의 삶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나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신비로운 힘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 신비로운 힘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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