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도 바다의 별(Stella Maris)이신 성모님의 전구 아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 속에 머무르길 기원합니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인생이라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성인은 “죽음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이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관문이다.”(『죽음의 유익』De bono mortis 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떠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정 속의 인간’(Homo Viator)이기도 한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라고 지칭합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지난 2,000년간 두 가지 영성의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는 성인들의 모범을 쫓아 높은 수덕 생활을 하는 ‘위로부터의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성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찰함으로써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아래로 부터의 영성’입니다. 이 두 가지 영성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좁은 길'입니다.
그 중,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고유한 그림자, 하느님께서 만드신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45-399)는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해서 알아라.”라고 조언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기 위해 겸손 안에서 먼저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는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습니다.(海不讓水) 산골짜기에서 흘러온 물, 시냇물, 강물뿐만 아니라, 공장과 생활하수로 인해 오염된 물까지도 그 물의 과거를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독이고 달래어 깨끗이 정화된 빗물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에게는 단비가 되어 세상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숨결을 부여받은 창조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아래로 부터의 영성입니다.
‘海不讓水’의 마음으로, 올 한해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23년 1월 1일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Stella Maris Busan) 담당신부 김현 안셀모.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브라가의 마르티누스, 『겸손권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