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도합시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바다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 신부, 해양사목 가서도 열심히 살아라.” 지난 927일 교구청에서 있었던 20169월 부산 교구 사제 인사 발령 후 인수인계식 때에 손삼석 보좌주교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930, 공식적으로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로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 당일, 1당 천을 넘나드는 해양사목 사목회원님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았지만,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저는 메리놀 병원에 입원을 했고, 1022일이 되어서야 퇴원을 했습니다. 복숭아뼈에 생긴 종기를 제거하느라, 수술을 받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염려와 기도 덕분에 현장에도 나갈 만큼 이제 건강을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23일 동안 제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남항대교와 북항대교, 그리고 국제 여객 터미널과 여러 부두의 시설들과 여러 종류의 배들은 해양사목을 맡게 된 저에게 많은 말들을 건네 오는 것 같았습니다. 인수인계 때에 보좌 주교님께서 하셨던 말씀-“바다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 제 가슴 속에 들어와 박힌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해양사목 일을 시작하는 새내기로서, 업무를 파악하고, 현장에 익숙해지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기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제가 사목해야 할 곳들을 하나하나 돌아 보면서, 관할구역의 광활함에 놀라고, 함께 삶을 나누고, 함께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 때로는 하느님께 볼멘소리, 한숨 소리도 들려드려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음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구나. 너희는 먼저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신임 해양사목 담당 신부로서 저는 여러분을 맨 먼저 기도의 생활화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매일 저녁 9, 해양인을 위한 기도를 함께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제 핸드폰에 저녁 9시 알람을 맞추어 놓고, 해양인을 위한 기도를 지난 930일부터 바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함께 공간은 공유하지 못할지라도,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면, 저녁 9시마다 함께 기도하는 우리 부산 교구 해양가족을 하느님께서 보시며 빙긋이 웃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실 겁니다. “내 아들 닮으려고 너희들이 이렇게 모였구나. 아유~~ 이뻐라.”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함께 해양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17년은 4복음서 1독 이상 하는 해가 되기를......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출항준비를 끝낸 선박의 선원들의 마음은 여유롭고, 또 준비한 만큼 희망도 크지요. 2016년 지난 한해는 다사다난하다는 말 그대로 참으로 많은 일들과 사건들이 있었지요. 실망도 컸고, 분노와 울분, 원망 때로는 배신감마저 농후했던 한 해였지요.

 

흔히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간이란 창조와 종말이라는 시작과 마침의 과정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현재로 들어왔다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과거로 흘러가는 것으로 여겨지지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서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기억이라는 행위라고 했답니다(고백록 제11권 참조).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단순히 과거의 일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랍니다. 마산교구 전 교구장이셨던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님께서는 당신의 사목 표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소서로 정하시면서, 이렇게 설명하셨답니다. « 기억은 과거를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현재화시키는,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한 능력이다. 아울러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를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미리 앞당겨 선취시키는 행위이다. 기억의 행위를 통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만나 삶을 엮어내고 역사를 창조한다 ».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강생-죽음-부활)을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현재화시키는 동시에 종말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2017년 올해에는 아픈 기억들 그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억할 것은 기억하며 살았으면 싶어요.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 해양가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네요. 무슨 말이냐구요? 어렵게 말씀드린다면,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현재화화고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얘기예요. 어떻게 하느냐구요? 나를 통하여, 나와 함께, 내 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시도록 사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판단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럴려면 맨 처음 무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야지요. 그래서 2017년에는 우리 부산교구 해양가족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4복음서를 최소한 1번 이상은 읽었으면 싶어요. 20171월부터 해양가족 월미사 후에는 1시간 정도 복음서를 읽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휴 사순? 아니, 앗싸 사순!!!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살면서 중요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준비와 여러 사람의 땀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교회에서도 « 부활 »이라는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서 40일이라는 준비 기간, 바로 사순 시기를 마련해 놓고 있지요. 그런데,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많은 신자들이 사순이야?”라는 말과 함께 한숨부터 내쉬는 같아요. 회개하고, 보속하며, 조신하게 보내는 시기,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고통스럽지만, 인내하는 시기,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때라고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사순시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기쁨의 기간이랍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활을 기다리는 기쁨과 희망의 때랍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뭘까요? 부활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진리의 정점(climax)이랍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순간조차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죽음으로 당신의 우리와 함께 하심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그리스도교는 부활이라는 말로 대신한 것이랍니다.

 

하느님 믿는다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이런 말을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고, 우리 삶을 기쁨의 삶이 되게 하지요.

 

이러한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서 돌아 서서, 다시 믿음의 길로 복귀하는 일체의 행위가 바로 회개랍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고, 그래서 다시 소위 « 착한 사람 »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온갖 어리광을 부리고, 칭찬받기 위해 애를 쓰는 « 어린 아이 »-프랑스에서는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의 칭찬과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그런 아이들을 두고 슈슈(chouchou)라고 부른답니다- 살아가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랍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힘든 2017 3 때에, 과연 회개란 무엇일까요? 진실과 정의와 사랑과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일을 스스로 찾아 해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노력들을 기쁘게 해보자고 마음 먹고, “어휴~ 사순이야?” 아니라, “앗싸 사순이다라고 마음 먹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4년간의 해양대학교 생활을 마치며 

      

한국해양대학교 졸업생

정종현 안토니오

 

해양대학교, 그 중 해사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타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는 조금은 다른 대학생활을 합니다. 국립학교 설치령에 의거하여 우수한 상선사관을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기숙사비, 피복비 및 학비의 일부를 국가로부터 지원받고, 이에 따라 제복을 입고 생활하며, 정해진 학칙 및 세칙에 따라 생활합니다. 저 역시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 학생으로서 지난 4년간 이러한 대학 생활을 하였으며, 1월을 끝으로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 고향에서 성당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수차례 자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 때 근황과 함께 항상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던 것이 바로 "너 아직 성당에 다니고 있어?"였습니다. 빠르면 유치원, 늦으면 초등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같이 다녔던 친구들의 대다수는 고향을 떠나 타지로 대학을 진학함에 따라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바쁜 대학생활을 이유로 냉담을 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누며 저의 신앙생활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돌아보곤 했습니다.

 

학교의 특성상 해사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에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부산에서도 영도, 그 안의 조도라는 섬에 학교가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 주말 상륙 복장인 정복의 착용 및 엄격한 생활 수칙의 준수 등이 신앙생활을 대다수 학생들의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게 합니다. 이는 저에게도 걱정거리였습니다. 입학 전 학교 부근에 있는 성당을 알아보았으며, 주말 미사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학내 가톨릭학생회라는 동아리가 있으며, 해양사목 신부님께서 학교에 방문하시어 미사를 집전해 주신다는 소식을 접하여 동아리에 가입하고 주일미사 및 관련된 각종 행사에 참석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매년 5월경 진행되는 해양·수산인의 날 행사에 참석함으로써 바쁘고 힘든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해운업 및 수산업에 종사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며, 해양사목이 그분들의 든든한 신앙 버팀목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지난 4년의 대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움을 주신 해양사목 관계자분들과 후원자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해기사의 꿈을 꾸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지속적인 격려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제 막 바다 생활을 시작하는 저 역시 해양사목의 울타리 안에서 신앙을 이어가게 될 것이며 해양 가족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이 저를 포함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생활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뭐예요?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지요. 하지만 부활은 그저 2천년 전, 유다의 한 젊은이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왔다는 식의,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내기 위한 종교적인 장치 혹은 해답 같은 것도 아닙니다. 부활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 믿다가 죽은 사람은 이다음에 부활해서 천당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떤 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부활신앙은 허무를 달래기 위한 진정제나, 신경 안정제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부활이 무엇일까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승(聖傳)에 따르면, 첫째로 부활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물음에 대한 성부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그 말씀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천하셨던 예수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사랑 때문에 겪는 고통, 어쩌면 처절하다 싶을 만큼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그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입니다.

 

둘째, 부활은 성령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 현존의 확장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위주로 살아 왔던 죽고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죽고 후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 일어나야 하는 일을 믿는 것이지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시는 »(갈라 2, 20) 바로 다름 아닌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의 장소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소유주였던 무덤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예수 부활의 장소이고, 내가 살고 있는 « 지금 여기 » 부활의 장소인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감히 우리들의 부활 신앙에 힘입어 이렇게 선포할 있습니다: « 예수 하나 죽였더니, 예수 열이 나타났고, 예수 열을 죽였더니 예수 백이 나타났고, 예수 백을 죽였더니 예수 천이 나타났다. 바로 이것이 부활이며, 예수께서는 나를 통하여, 나와 함께, 안에서도 부활하셨다 ».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나를 통하여, 나와 함께, 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나에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 삶은 바로, 스승의 사형 선고와 십자가 상의 죽음을 겪고는 도망치듯 일상으로 되돌아 가버린 제자들에게 아침밥을 차려주시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밥을 챙겨주는 것, 생명이 죽어가는 곳에 생명을 살리게 하는 것이요, 절망이 가득한 곳에 희망을 가져다 주는 일이지요.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벌써 주째 비소식이 가물가물하고, 나라가 바짝바짝 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선박들에는 그나마 에어컨 바람이라도 나오니 그곳의 선원들은 그나마 만하겠지만, 그러지 못한 선원들은 정말 힘겨운 여름을 보낼 듯합니다.

7월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사람들은 나에게로 오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예수님께 간다고 해서, 멍에가 없어지고, 짐이 없어질까요?

수님께서도 멍에가 편해지고,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멍에와 짐이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요. 그분께 간다 하더라도 변한 것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고, 삶이 가져다 주는 고생과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성당 다니고 영성체 한다고 내가 마셔야 고난의 잔이 치워지는 것도 아니지요. 도리어 나에게 많은 짐을 씌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 있지요.

하지만 가지가 달라집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삶을 깨닫고, 사랑의 길을 걸어보고, 예수님의 삶을 안에서 실천하다 보면,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면, 삶의 멍에는 그대로이나 멍에가 편해지고, 짐은 그대로이나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이지요. 정말로 편해서 편한 멍에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가벼워서 가벼운 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그분과 함께 하기 때문에, 편할 있고 가벼워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산다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이 힘겹고, 어렵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 살아가는 아닐까요? 우리들 신앙인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 그것이 우리들을 살게끔 하는 힘이 됩니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무더운 7, 누군가에게 복음이 되기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몸소 찾아가 그들을 도와주는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가마솥에서 푹푹 쪄지는 뜨거운 감자처럼, 뜨겁게 살아가는 여름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참된 의미가 이것이 아닐까요?


지상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순교할 수 없습니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해마다 9월이 되면, 순교자 성월이라고 한국교회에서는 순교자 찬가를 열심히 부르거나 순교 성지를 찾아가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자고 열성입니다. 순교자들은 쉬운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스스로 택해서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목숨을 걸고 걸어간 사람들이지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분들의 신앙이 지금의 우리가 가진 신앙보다 훨씬 더 고차원의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분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누렸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초대 한국 교회에서 영세 받은 사람들끼리는 왕후장상과 양반 상놈이 없었지요. 저 지체 높으신 양반님네들도 최하층 사람들에게 하대가 아닌 존대를 했었고, 이름조차 없던 개똥이, 소똥이도 요셉 형제, 마리아 자매라고 불렸지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양반님네들과 밥상을 같이 했었고, 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었지요. 양반님네들도 불가촉천민들이 천주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 그들도 자신들과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사농공상과 신분제도를 국법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에 영세 받고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었지요. 거기에다 천주님을 믿다가 죽으면 하느님 나라로 가서 영복을 누린다는 교리까지 받았지요.

초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양반 쌍놈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 바로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이미 살고 있었답니다. 그들은 천주교인이라고 붙잡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을 때에도, 천주님을 믿고 죽으면 영복을 받으니까, 지금 겪는 힘듦을 조금만 참아내면,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지요. 바로 그 믿음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한 순교자가 되게 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해양 가족 여러분,

과거의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으로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 그분들의 삶을 우리도 살아내 보겠다고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하면서 그 다짐을 실제 우리 삶에로 옮기려 애쓰는 것, « 환난과 핍박 중에서 순교로 믿음 지켰네. 이 믿음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는 이 노래를 온몸으로 노래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이를 기억하라=제대로 올바르게 살아라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11, 위령 성월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는 달이기도 하답니다. 잘 죽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달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잘 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살아야지요. 잘 살아야만 잘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잘 산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가 참으로 많은 질문입니다.

잘 사는 길 가운데 하나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7년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사회적인 문제는 양극화 현상인 것 같습니다. 특히 1997IMF 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경제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파탄시키고 중산층을 붕괴시켜버렸지요. 울산의 모 지역에는 그런 단어 자체를 몰랐다고 하는 곳들도 있지만, 1997년 이후의 이 땅은 경제위기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네요. 1997년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가 부채를 안게 되었지요. 그 부채는 이 땅의 백성을 하나로 모아서, 금 모아서 팔기 운동까지도 벌이게 했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지요. 그런데 그 해 이후, 정부는 지나치게 친 재벌정책을 벌였고, 골목 상권까지 장악해버린 소수 재벌로의 지나친 부의 집중은 갈수록 양극화를 심화시켰지요. 양극화로 인해 나타난 가장 부정적인 현상은 생활고로 인한 높은 자살률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살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 빈곤층이 사는 곳이랍니다. 자살의 이유 중 가장 높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제적인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우리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정치 · 경제 · 사법 · 언론 권력의 유착과 그로 인한 질서의 공정성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지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롭고 부드러운 솜방망이 같은 사법권의 오용, 그리고 지금까지 세제 및 금융 지원과 국산품 애용운동 등의 온갖 특혜와 국민들의 희생에 크게 의존해 성장해왔으면서도, 비자금 조성, 불공정 거래 등을 만성적으로 저지르는 불의한 대기업의 행태와 이를 묵인하거나 봐주기 식으로 하는 권력기관의 감사와 언론의 불공정한 보도 등의 현상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이러한 현상들은 지금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으로 강조되고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자비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요?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아모 5,24) 오늘날 한국 사회가 요청하고 있는 시대정신 아닐까요? 이 시대정신이 갖추는 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삶, 바로 잘 죽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삶을 제대로 산다는 것이 아닐까요?


2017년에서 2018년으로,

시간의 흐름 그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새로운 해를 시작할 때에는 꿈도 많고, 계획도 많았는데, 끝에 서서 지나간 해를 돌아보면 가슴 속에 든든함과 뿌듯함보다는 때에, 자리에 제대로 있지 못했던 시간들이 많았던 같아서 가슴 속에 아쉬움이 가득 차는 같기도 합니다.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벅찬 마음으로 2017 새해를 맞이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7년을 다시는 되돌아 않을 과거로 보내고, 우리는 2018 새해를 맞았습니다. 영겁의 시간에 하나, 하나를 찍어서 해라고 하고, 점들 사이사이를 월이라 하고, 사이사이를 또다시 나누어 날이라 정한 것은 날수 알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도리겠지요. 미래의 시간이 현재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로 흘러가버리는 흐름의 강물에 마치 돌멩이 하나 던지듯, 의미들 툭툭 던지며, 그래도 헛되이 흘려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알찬 사람의 몸짓이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들이 연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해양 가족 여러분,

2017년을 보내고, 2018년을 맞이하는 1, 마음 다잡고, 한해의 의미를 던져 보는 이달에는 참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그들의 안녕을 빌며 곱게 모아보는 시간들을 자주 마련하기를 바래봅니다. 그리고 하나, 오늘의 일몰 안에서 내일의 일출을 아는 눈을 갖는다는 . 그것은 희망할 안다는 것이겠지요. 현실에 대한 탄탄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룰 있는 꿈을 갖는다는 것이겠지요.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며 이루지 못한 것과 이룬 것을 분류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또다시 꿈꿔보는 알뜰한 연말 연시되시바랍니다.


해양사목 소식지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 »에서 발췌.

 

4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너는 이름 하나 없이

묵묵히 우리 사는 얘기들, 우리 사는 장면들을 담아내고 있었구나.

성이 소씨에, 이름은 식지였니? 이름에 식상하지는 않았니?

무심했구나, 미안하다. 얘야.

1년에 6번이나 새롭게 몸의 빈공간들을 채우고,

너에게 옷을 입혀 왔음에도

변변한 이름 하나 달아 주지도 않고,

오랜 세월을 흘러 보냈던 우리들이 부끄럽구나.

그래도 너는 볼멘소리 하나 없이

우리들에게 흐뭇함과 잔잔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지.

우리들이 걸어왔던 기억들도 고스란히 간직한 말이야.

이제라도 너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올해는 우리 부산교구에서 해양사목을 시작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40주년을 맞이하면서 거창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기보다는 지난 40 동안 주님께서 우리 해양사목에 베풀어 주셨던 은총들을 기억하고, 시간 속에서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어떠했는지를 반추하는 시간들을 많이 가져보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맨 먼저, 해양사목 소식지의 이름을 공모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해양사목 소식지 1호부터 이번 20183월 소식지까지, 모든 소식지들을 모아서 제본을 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과월호는 사무실에 있지만, 몇몇 유실되거나 소실된 소식지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동이 기뻐 즐거워하며 작은 잔치를 벌이듯, 유실 혹은 소실된 소식지들을 모두 한데 모으고 나면, 조촐하지만, 해양사목 사무실에서 작은 전시회도 열어볼까 합니다. 비록 작은 몸짓이지만, 우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이 여정에 함께 해 주십시오.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마치며

한국해양대학교 졸업생

오문수 야고보

      

본당 사목회에서 활동을 하시는 아버지와 주일학교 교리교사와 말씀봉사자로 활동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는 신앙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당연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어릴 적 복사단장과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했던 제게 예수님은 항상 첫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무감으로 성당을 가게 되었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점점 더 예수님과 멀어져 갔습니다. 가끔 집에 갔을 때도 수험생활에 지친 저는 주말이라도 쉬고 싶었고 같이 성당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씀이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그 때 저는 대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게 되면 성당을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집과는 다른 지역에 있는 해양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앞으로 성당을 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사라지고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저 스스로 가톨릭학생회에 이끌리듯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때론 엄하면서도 잘 챙겨주시는 선배님들이 좋았고, 학교에 찾아와 주일미사를 해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는 해양사목 신부님이 좋았습니다. 바쁘고 힘든 학교생활 속에 가톨릭학생회 동아리는 따뜻한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항상 사랑을 베푸시는 신부님과 선배님들을 보며 나도 지금 받은 것들을 다시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4학년이 되어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게 되었고 내가 느꼈던 사랑을 우리 후배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가톨릭학생회 회장이 되어보니 보이는 것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동기들, 후배들과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고 더욱 뜻 깊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동아리방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대학교 축제, 적도제 때는 함께 모여 즐기고 기뻐했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위로해주었습니다. 또한 봉사활동을 하며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도보성지순례를 하며 불타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신앙심이 부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계명 중 으뜸은 사랑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가톨릭학생회에서 지낸 4년 동안 열심히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제 종교를 사랑하면 할수록 제 자신이 작아짐을 느꼈고 제 것이 아깝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느꼈습니다. 우리 해양대학교 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바다로 나갑니다. 바다로 나가게 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했고 사랑한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같이 저 바다 끝에서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추억할 것입니다.


그저 다섯 번째 달이 아닌 성모님의 마음(母心)을 깨닫는 오월(悟月)이 되기를……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매주일 오전 1130분이면 가톨릭센터에 부산 신항 선원회관 봉사자들이 모입니다. 적게는 저와 최윤정 엘리사벳 사무차장 단 둘일 때도 있고, 많게는 네다섯 분이 한꺼번에 오실 때도 있습니다. 1130분에 해양사목 차량을 타고 가톨릭센터에서 차량으로 40-50분 거리에 있는 부산 신항 선원회관으로 가서, 20171월부터 시작된 오후 2시 선원들을 위한 주일 외국어 미사(주로 영어) 봉사와 선원 회관을 찾는 선원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나눠 드리면서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는 봉사를 합니다.

지난 1월과 2월에는 부산 신항 선원회관으로 들어서는 도로에 큼직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경축 2017년 한해 컨테이너 물량 2000만 돌파선박에 선적, 하적하는 물류 이동이 증가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물동량이 증가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반가운 소식이겠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는 그 소식이 불편함으로, 업무의 과중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배를 타는 선원들의 로망 중의 하나가 어느 항구에 정박하든지, 배에서 내려 하루나 이틀 정도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 해양가족들은 선원들의 이러한 마음을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겠지요. 그런데, 물류량이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배가 정박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고, 선적, 하적하는데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는 사실도, 우리 해양가족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물류량 증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선원들에게는 그리 큰 기쁜 소식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선원들에 대한 복지는 좀더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 안에서 육지도 밟아보지 못하고 있는 선원들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방선(防船)의 문도 좀 더 개방되어야 하겠지요.

자녀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 장하다, 자랑스럽다 »라고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 조금 덜 힘들게 지냈으면 »하겠지요. 이런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이고, 성모님의 마음이겠지요. 바다의 별(Stella Maris)이신 성모님을 닮아 해양가족들에게 그 마음을 전해주는 해양사목이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마음이겠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성모님의 그 마음(母心)을 깨닫고, 그 마음을 세상에 펼쳐내는 오월(悟月) 되시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28회 해양수산인의 날 장학생 감사편지
 

해양가족

황예리 루치아

안녕하세요. 황예리 루치아입니다. 이번에 주님이 주신 기회로 해양사목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해양사목 축제인 해양수산인의 날 행사와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김현남 수녀님의 웃음치료 강연도 보고 해양가족들과 미사도 봉헌하고 정말 즐겁고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를 추천해주신 분과 주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희 가족도 해양인 가족이었는데 저는 해양사목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번 해양사목 축제에 참석하여 저희 아버지가 바다라는 위험 속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덕분에 제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한 번 더 해양인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저를 해양사목에 보내신 이유는 제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시 같다고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바다에서 목숨 바쳐 일하시는 모든 분들을 당신께서 축복해주시고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값진 것들을 많이 얻은 정말 좋은 자리였습니다. 저희 가정에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주님께 감사드리고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28회 해양수산인의 날 장학생 감사편지

 

해양대학교

정준호 암브로시오

 

안녕하십니까 이번 제28회 해양수산인의 날에 장학금을 받은 한국해양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N1B 정준호 암브로시오 학생입니다. 우선 이번 제28회 해양수산인의 날에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를 대표하여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장학금을 받게 된 것에 대해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처음에 제가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1학년인 제가 선배들을 제치고 장학금을 받아도 되는가하는 의문이 들고 가톨릭학생회를 대표해서 장학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러운 마음에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장학금은 제가 잘해서 주는 것이 아닌 앞으로 저희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에서 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를 대표하여 장학금을 받은 만큼 앞으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해양수산인의 날 행사를 준비하여 주신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7)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저는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넉 달 모자란 10년을 프랑스 빠리에서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매년 9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 되면, 빠리 외방 전교회의 초청으로 빠리에서 유학중이었던 모든 한국 신부들이 모였고, 빠리 외방 전교회 후원회원들과 프랑스 교회의 주교님들 그리고 빠리 가톨릭 대학 교수님들도 함께 오셔서 한국 교회에 대한 세미나도 하고, 미사도 드렸습니다. 그날만큼은 마음껏 한국교회에 대해서, 한국의 순교성인들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의 조상들이 열심해서 성인이 많으면 무엇 하나?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열심히 살아서 성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프랑스를 비롯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는 우리나라의 성인들보다 더 많은 성인들이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교회 신자들보다 더 열심한 신자들이 지금의 유럽교회에 한국보다 더 많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유럽 교회에는 과거의 영광을 오늘날에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을 한낱 관광거리로 전락시켜 버린 곳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이런 저런 이유들이 많겠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고, 그 하느님을 삶으로 증거하고, 증언해야 할 교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그 삶을 살아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세상의 권력과 욕망을 추구하고, 세상의 성공을 좇아서 살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교회가 교회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해마다 9월이 되면, 한국교회는 순교자성월을 의미 있게 지내보려고, 신앙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좀 더 열심한 신자로 거듭나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목숨을 걸기까지 신앙에 열심이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걸까요? 신앙선조들이 가졌던 신앙이 지금의 우리가 가진 신앙보다 훨씬 더 고차원의 것이어서? 그들이 배운 교리가 우리들이 배운 교리보다 훨씬 더 엄격한 것이어서? 그들이 믿었던 천주님과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다른 분이어서? 아니지요.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누렸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러고 있지 못하다는 것 아닐까요?

초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양반 쌍놈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 바로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이미 살고 있었지요. 그들은 천주교인이라고 붙잡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을 때에도, 천주님을 믿고 죽으면 영복을 받으니까, 지금 겪는 힘듦을 조금만 참아내면,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2018년 올해 9월 순교자 성월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침에 이르기까지 지상에서 천국을 누려보는 한 달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1-39)


오늘은 나, 내일은 너(Aujourd’hui moi, demain toi)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지난 1022일부터 24일까지 23일 동안 해양사목 40주년 기념행사로 부산교구 해양가족들 36분이 함께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도 담당신부로 동참을 했지요. 성지순례를 위한 준비로 9일기도를 드렸고, 미리 구입했던 나가사키 성지순례 안내책(저자 김길수)도 모두 다 읽었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우리가 순례할 곳들을 미리 공부해온 덕분에, 23일이라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배울 꺼리, 묵상 꺼리가 풍성한 성지순례였지요.

월동 준비, 김장 준비, 등등, « 미리 준비! » 11월이 되면 우리들의 삶의 자리 곳곳에서 듣는 말들 가운데 하나지요. 선원들도 겨울을 대비해서 많은 준비들을 하지요. 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죽음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저는 18년 전에 신부가 되고, 지금까지 장례미사를 수십 번도 넘게 주례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참 많이도 장례미사를 주례했지요.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중, 2003년 프랑스에서 폭염으로 만 8천여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는, 한 달 동안 18번의 장례를 치룬 적도 있었답니다.

수십 번의 장례를 치루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죽음에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리부터 죽음을 준비해온 사람의 죽음과 갑작스럽게 채 죽음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죽음.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나, 미리부터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나, 모두 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들이 파노라마처럼 한 순간 펼쳐지는 것을 본다고 해요. 그 때에 펼쳐지는 영상들 덕에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영상들 때문에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다고 해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경우, 자신의 죄를 뉘우칠 시간이나,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허락되지 않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지요. 한 인간의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로 하여금 어떤 교훈을 줍니다. 바로 « 오늘은 나, 내일은 너(Aujourd’hui moi, demain toi)»라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그리고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주지요.

잘 죽기 위한 준비를 하는 11, 아니, 잘 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11, 잘 사는 길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겠지요? 월동준비에 바쁜 이번 달엔 이웃의 월동준비에 손을 보태고, 마음을 보태고, 힘을 보태면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잘 살기 위한 준비, 그럭저럭 잘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분명 하느님께서 빙긋이 웃으실 거예요.


2018년을 돌아보고 2019년을 맞이하며...

      

부산교구 해양사목 회장

신해진 베네딕토
     

찬미예수님,

주님께서 허락하신 올해, 2018년도 저물어 갑니다. 그 해 마지막쯤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한 해 동안 정말로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해서 죄송하고, 나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가정과 내가 함께하는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채워주지 못했음에 미안함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사실은 주님의 큰사랑이 항상 반석이 되어 주었고,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언제나 응답해 주셨고, 들어주셨음에 엎드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산교구 해양사목은 지난 한 해 참 많은 일들을 했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일주일에 2번 북항, 감천항 방선활동을 했고, 매 주일 신항 입항선원들 환영과 미사를 위시한 봉사활동, 영도에 있는 해양대 학교 재학생, 교수님 및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연구원님들과 함께 개강, 종강 미사 및 교리 등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의 유대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올해는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40주년"으로 예년과 같은 해양수산인의 날 행사와 더불어 지도신부님의 성경강의 "하느님의 나라""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다녀옴으로써 더욱 뜻 깊은 한 해를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균태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부임하신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참 많은 사목활동과 시간으로 우리 해양가족들을 영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셨고 해양 가족들 간의 유대관계도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부산교구 해양사목을 새 시대에 맞게 이끌어 주시도록 신부님의 영, 육간의 건강을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특별한 간구가 주님께 이르도록 기도해봅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우리가 선택하고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모든 해양 관련 산업들, 그 삶의 터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은 항상 기쁘고 감사하며 충실히 살아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새해를 맞이합시다. 비록 현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들은 분명히 우리가 충분히 짊어질 만큼의 십자가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지금 온 세상의 구원과 평화와 사랑을 위해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며, 동방 박사가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였듯이, 우리도 아름다운 저 밤하늘,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인도로 우리들 인생 항로를 주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해양가족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해양가족 여러분, 새해에도 우리 해양가족 모두가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행복한 한 해가 되도록 기도드립니다


봄이 차디찬 겨울에 대한 저항이듯, 부활은 죽음에 대한 저항입니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사방천지가 완연한 봄입니다. 봄이 왔다는 것을 TV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 몸이 느끼고 있지요. 대지가 푸른 생명의 물을 올리고 가지들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나리는 이미 만발하였고, 벚꽃도 활짝 폈습니다. 봄에는 사람의 몸에도 생명의 물이 흐릅니다. 자연히 봄나물을 찾게 되고 흙냄새 밴 생명의 맛을 찾지요. 이 좋은 봄에 우리는 함께 묵상하기 참으로 좋은 주제를 만납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죽었던 대지에도 새 봄이 시작되듯이, 살아도 죽은 듯 살고 있던 우리 생명에도 부활이라는 새 기운이 살랑살랑 불기를 바래봅니다.

 

부활, 도대체 부활이 무엇일까요 ?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 생애 전체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는 그 말씀을 십자가 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키셨던 예수님, 그러나 그렇게 죽은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부활시키셨지요.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선포와 행동들, 예수님의 삶 전체가 궁극적으로 옳다고 인정하셨답니다.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라는 피맺힌 절규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지요.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도, 바로 고통 속에서 숨겨진 채 현존하시는 분, 극도의 위협, 무의미, 허무함, 버림받음,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서도 인간을 지탱하고 붙잡아 주시는 분, 인간의 곁에서 항상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분,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되시는 하느님, 바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완전히 계시하셨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부활은 그저 2천년 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벌떡 살아 나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저항, 거짓에 대한 하느님의 진리의 저항, 죽임에 대한 하느님의 살림의 저항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점철되는 문화 속에서도 생명을 부르짖고, 잊어버리고 가슴에 묻어 버리자는 달콤한 유혹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말 잘 듣고, 입 다물고 살라고 하는 세상에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서민들이 입으로라도 « 이 썩을 놈의 세상 »이라고 외치는 것, 그렇게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을 토해 내며 저항하는 것이 바로 부활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저항, 부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를 떠나면서
 

한국해양대학교 졸업생

이민석 스테파노

 

가톨릭학생회는 내 대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1학년 군대와도 비슷했던 대학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쳐 방황하던 시기에 종교생활로 나에게 의지와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동아리이다. 해양사목은 그런 가톨릭학생회가 올바르게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매주 학교 밖으로 나가기 무서운 교칙 때문에 제대로 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아리방에 신부님께서 직접 오셔서 미사를 집전 하셨다. 미사가 끝난 후에 먹는 맛있는 음식들 덕분에 학생들도 많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해양대에서 가톨릭학생회가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내가 1학년 때 4학년 선배들이 3학년 실습을 마치고 뒤늦게야 가톨릭학생회 동아리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들은 애초에 신자도 아니었다. 승선 중에 갑자기 종교심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승선생활을 마치고 다른 것도 아닌 종교를 찾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단지 생활이 힘들어서, 이대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일을 하다보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것 같아서가 그 이유일 것이다. 이런 선원들을 위해서, 또 미래에 이런 선원들이 될 해양대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해양대 가톨릭학생회, 해양사목의 필요성은 크다.

해양대 가톨릭학생회는 해양사목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해양사목은 선상생활 속에 종교활동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선원들의 의식 함양과 지치고 외로운 선상 생활중에 삐뚤어질 수도 있는 마음을 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당장 알 수 있는 예로 나 또한 해양대학교 승선생활교육이 힘들어서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니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해양대내에는 많은 개신교 동아리가 있지만 천주교 동아리는 가톨릭학생회 하나뿐이다. 그런 점에서 거기에 속해 있다는 것에 자부심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회장으로서 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아리로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도 아팠다. 대학생들에게 있어 천주교의 인식은 솔직히 개신교 교회에 비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이미지이다. 나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입장에서 신자, 비신자 구분 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탈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부산가톨릭대학생연합회(이하 부가대연)에서 하는 체육활동, 피정 등 다양한 활동에 참석하였고 타 대학 가톨릭학생회와 연합해서 엠티도 기획하였고 태종대성당에서 열리는 행사들에도 참석하였다. 방학 때는 신부님과 함께 테마를 정하여 엠티도 다녀왔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하루는 비신자인 학생이 천주교에 대한 좋지 않았던 인식과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나한테 말했다. 그 순간이 아마 가톨릭학생회 회장으로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의미 있고 추억 많은 동아리의 대표를 한 학기 지내고 졸업을 하여 해군소위로 복무중이다. 학교생활의 전부였던 가톨릭학생회. 내 대학생활의 출발점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내 대학생활의 마침표는 이미 찍혔지만 동아리의 마침표는 찍히지 않았다. 나로 인해서 또 우리 동아리로 인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을 후배들이 다시 주인공이 되어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면서 동아리를 예쁘게 가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미고사 하는 사람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루가 24,49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지요. 성령께서는 우리들이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은총도 주시지요. 이 은총은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지식), 의견, 지식, 굳셈(용기), 효경, 두려워함(경외심)의 은총이고, 이를 두고, 성령칠은이라고도 부르지요.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생명력의 원천이며,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이지요. 그 영은 세상의 논리에 고개 끄덕이면서 힘없는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하며, 자포자기하듯 살아가려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지. 불편한 거 보다는 편한 낫지 않나?’ 하며, 현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 ‘세상 떠들썩하게 하고, 골치 아픈 문제나 일으키고, 온갖 잡음 일으키게 하는 것보다는 그저 주어진 인생, 조용조용 살다가 갈 때가 되어서 가면 그만 아닌가.’ 하며, 무사안일, 안전 제일주의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들지요.

악령에 깃들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 하느님의 아들님, 왜 우리를 못 살게 구십니까?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까? » 악령에 깃들인 사람들이 단순히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간 사람들, 마녀 같은 사람들, 뱀파이어 같은 사람들이었을까요? 세상의 논리에철저하게복종하며생명을업수이여기고,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나 몰라라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예수에게 자기네들을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했지요. ? 예수의 영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일까라는 물음을 만나기 마련이지요. 성령을 따라서 살면 되지요.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려는 몸짓, 세상을 조금은 더 불편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발버둥, 세상의 잘못을 고발하고, 세상의 논리에 투쟁하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 성령을 펄펄 살아 꿈틀거리게 하느냐, 아니면, 그저 내 안의 위로자, 내 찌든 삶의 위안자, 내 슬픈 마음에 평안만을 가져다주는 자로만 머물게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을 받았지요. 꼭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이 사랑하는 것이래요. 그래요.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사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은총 속에 사는 삶이지요.

끝으로 또 하나,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지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달이네요. 특별히 성령께, 그리고 성령께서 성화하시는 이 세상을 향해 미··사 자주 말씀 드리며 살기를 바래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평등은 기회의 균등에서 시작됩니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20199월이 되면, 저도 여기 해양사목 담당신부로 발령을 받은지 3년이 됩니다. 해양사목 사무실을 방문했던 첫날, 목발을 짚고 혼자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해양사목 평신도 사도직 사목회원 몇 분들과 해양대학교 가톨릭 학생회 학생들 몇 명이 저를 기다리고 계셨지요.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습니다. 지난 3년간 비 오는 날을 빼고 매주 화요일, 금요일마다 방선을 하고, 주일에는 부산신항에 있는 선원 센터에 가서 센터를 방문하는 선원들에게 봉사하다 보면, 선원들의 남녀 성비가 터무니없을 만큼 남성위주임을 쉽게 발견합니다.

예부터 배의 이름은 여성으로 지었지만, 배에는 진수식이나, 명명식, 혹은 축복식 때에나 여성이 올라 갈 수 있었지, 배 안에서 여성이 일하고 생활하는 것은 터부시되어 왔지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선원이라는 직업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지요.

요즈음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일부 선박에서는 여성들을 고용하고, 연안 여객선이나, 크루즈 같은 곳만 아니라, 상선이나 어선에서도 여성 선원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녀 성비를 따지면, 여성 선원들의 숫자는 남성 선원들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 현실이지요.

선원들 간의 남녀 성비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남녀 간의 불평등은 우리가 피부로 느낄 만큼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여권이 많이 신장되고,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회자되고, 여성 상위시대라고 말들을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접어야 하는 꿈들이 더 많고, 날개를 꺾어야 하는 횟수들이 더 잦습니다.

저는 이 글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맞으면서 쓰고 있습니다. 2016722일 이전에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는 날이 기념일이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66월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따라 축일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하느님 자비의 증인, 주님 부활의 증인, 복음 선포자의 모범, 사도들의 사도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서 여성의 존엄과 새로운 복음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를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요청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증인이자, 부활을 처음 알린 전달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요(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19723. 마리아 막달레나, 왜 아직도 울고 있는가 기사 부분 인용)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은 하느님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하게 존재하지요. 3년 전,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승격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존재하는 남녀 불평등의 요소들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도 남녀의 불평등은 존재하지요. 여성을 제한된 역할을 하는 존재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현실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실제 현실이 그러하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평등이라는 것은 첫째로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지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려면, 그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각의 변화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지요. 시스템이 변화되어야 하지요. 선박에 여성 선원들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선박 내에 여성 선원들을 위한 공간, 예컨대 여성용 샤워실, 여성용 화장실 같은 공간들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남녀평등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우리 해양가족들 안에서도 남녀평등을 위해서 노력하고, 우리 해양사목 안에서도 남녀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도록 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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