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3년)초에 시작하여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 까지 8년간 지속된
[병인박해(丙寅迫害)]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됐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대박해였다. 박해는 10여년간 계속됐고 크게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단계 |
1866년 봄 박해 |
2 단계 |
병인양요 이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 까지 계속된 박해 |
3 단계 |
덕산 굴총 사건으로 인한 1868년 박해 (무진박해(戊辰迫害)) |
4 단계 |
신미양요로 인한 1871년 이후 박해 |
병인박해의 직접 원인은 위정자들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 때문이었다.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조선 위정자들은 프랑스 함대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대원군은 남종삼(요한) 성인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내세워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러시아의 월경행위가 잠잠해지고, 반대파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화되며,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마음을 바꿔 '박해령'을 내렸다.
박해가 시작되자 전국 각처 교우촌은 유린됐고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 와중에 1866년 9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했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절두산)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토가 서양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처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 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로 매도해 처형함으로써 집권의 한 방편을 이용했고,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박해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1868년 5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묘를 도굴한 '덕산 굴총 사건'이 터지자 박해는 불더미에 기름을 붓듯 번져갔다.
오페르트 굴총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 조정에서는 '참수형'을 명했으나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데 있어 교수형, 장살, 생매장, 백지사형 등 극형들이 남발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인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이후 세번째 침체기를 겪었다.
전국의 교우촌은 철저히 유린됐고,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어 갈 사람이 없게 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그 후 병인박해 이전의 2만여명에 달하던 교세를 회복하는데 20여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 에서 10,000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며, 이들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24명만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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