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어요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미사 강론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동병상련,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말이다. 같은 병이라고 하더라도, 죽을 병이나 몹쓸 병을 앓는 사람들은 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동료가 되기가 한결 수월하다.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잘 뭉친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 마음을 잘 헤아린다고, 병 때문에,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때문에, 불의와 억압, 불평등, 거짓, 위선, 중상모략 때문에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동류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안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연대’라는 것을 말보다는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불가촉천민에 가까웠다. 만질 수 조차도 없을 만큼 천하디 천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불가촉천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도 그 사마리아인을 두고,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성경에서 외국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 우상숭배하는 것들이라는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을 한데 뭉치게 한 것이 그 저주스러운 문둥병이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맹랑한 생각 하나를 해본다. ‘만약에 예수께서 그 나병환자 열명을 고쳐 주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병은 치유되지 못했을 지라도, 적어도 서로 각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예수께서 그 나병환자 열명을 고쳐 주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연대하지 않았다. 아홉은 제 갈 길을 가버렸고, 나머지 하나만 예수께로 되돌아 왔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불행할까? 나병에 걸렸지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 삶이 불행할까? 아니면, 나병은 나았지만, 결국 뿔뿔이 흩어져 버린 삶, 각자 제 알아서 살아 가는 삶이 불행할까? 정답은 둘 다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 나병환자 열명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연대했듯, 고통에서 해방되고 나서도 연대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는 법인데,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불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보자 마자,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그런데 열명 중 아홉은 예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복음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께로 돌아왔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이 대목에 대한 강론을 하는 많은 신부님들은 아홉은 주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 우리 신자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아서 주님께 감사 드리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자는 식으로, 윤리 수업을 한차례 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다시 한번 곰곰이 읽다 보면, 그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은 것처럼, 복음사가는 그들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 나병환자 열명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하고 이르셨다. 열명 가운데 아홉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제도 있었고, 성전도 있었고, 회당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실천했다. 사제들에게로 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사제가 없었다. 그에게는 회당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로 되돌아 왔다. 그의 눈에 예수는 사제로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 사마리아인은 지인지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나머지 아홉은 예수를 사제로 알아 보지 못했으나,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사제로 알아 본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으면, 감사드려야 한다, 혹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는 윤리지침을 알려 주기보다는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그리스도론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곧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천명한다. 생명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생명을 살리는 편에 서서 살겠다는 각오를 하게 한다.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생명을 죽이는 일에 손을 담근다거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는 이들을 두둔하거나, 지지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과 다름 없는 짓거리다. 이러한 의미에서 때때로 신앙은 우리에게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흐름을 그슬러 살기를 종용한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해 왔을 때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귀를 멍하게 만든다: «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거든, 여러분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시오(요한 15,18) ».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밥으로 내어 놓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 저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라는 말로 불평, 불만을 쏟아내었다. 그들이 그렇게 투덜거리며 떠났을 때, 예수께서는 떠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물으셨다. «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 여러분도 저들처럼 나를 떠나겠습니까 ? » 분명한 것은 어중이 떠중이들은 모두 다 예수를 떠났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떠날 것인가 ? 남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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