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어요
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미사 강론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지난 여름방학동안 잘 지내셨는가?
그리스도교 신자들, 천주교인이건, 개신교인이건, 그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라서 다른 종교의 사람들보다도 십자가라는 말에 더 많은 친근감을 느낀다. 그러나 십자가는 아무데나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의 관리 부족으로 병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한다. 또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남에 의해서 겪게 되는 아픔이나, 고통, 힘듦을 십자가라고도 말한다. 말 안 듣는 자식,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는 남편, 철없는 아내 등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그 자식을, 그 남편을, 그 아내를 십자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나 고통, 힘듦을 나 아닌 너를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짊어질 때에만, 사랑을 할 때에만 겪게 되는 그 아픔과 그 고통, 그 힘듦을 십자가라고 말해야 한다. 병든 가족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 병이 들었지만, 가족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드러내 보이려고, 눈물겨울 정도로 애를 쓰는 사람, 내가 가진 것들이 내 스스로의 힘으로만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기꺼이 자신의 피 같은 재산의 일부 혹은 전부를 과감히 내어놓는 사람,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을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마음에서, 핏대를 세우고,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항거하는 사람, 이런 이들이야말로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다.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역사에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사랑으로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드러난다.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나라에서는 박해를 당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죽임의 위협을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박해 받는 사람들과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운명을 일치시켜야 하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나병환자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인간 이하의 빈민굴에서 살기도 하고, 창녀들 사이에서 거처하기도 하고, 그런 선택으로 굶주리고 병들기도 하고, 생명을 단축시키고,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가기 까지도 한다. 고통과 수난은 어느 누구에게도 달가울 리가 없다.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지겨운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연대행위 안에는 위대함이 있다. 십자가는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하여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부모가 십자가가 되기도 하고, 남편이 십자가가 되고, 아내가 십자가가 되며, 자식이, 형제가, 친척이, 친지가 서로가 서로에게 십자가가 되고, 이웃과 조국이 십자가가 되고, 가난과 병고가 심지어는 하느님도 신앙도 십자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예수의 십자가를 아무런 생각 없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삶 속에서 사랑 때문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분명 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존한다는 것, 사랑의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아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겸손과 용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사랑으로 말미암는 고통을 정말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고 하는 느낌 없이는,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고난에 무관심해질 뿐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을 증거할 수도 없다. 지금 여기 이 나라, 이 땅에서, 비뚤어진 현실을 자신의 현실로 삼고, 저주받은 사람들과 함께 저주를 받고, 단죄 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단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예수를 따라서 제대로 살아 보겠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나라 이 땅에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요, 사랑의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십자가 그 자체는 예수에게 실패이고 하느님의 부재이며, 하느님의 철저한 감추임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조차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 그저 실패와 침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하느님 자신과 인간을 위하여 어둠 속에서 밝히 드러내 보인 것이 부활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두 사건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이 이룩한 양면적 사건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신 예수의 하느님을 만날 수는 없다.
예수의 “나를 따르라”고 권고하는 말씀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단서가 붙는다. 2 천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지고 있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실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현 시점에 있어서 모험이고, 그를 닮는다는 것은 이 시대를 거슬리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예수의 길을 따른다면서, 어느 한가지도 내놓지도 않고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손해를 볼 생각 없는 길은 예수를 온전히 따르는 길일 수 없다. 예수의 길, 어려운 길, 가시밭길이다. 그 길을 걸으면, 필경 세상은 우리를 보고,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조롱할 것이다. 골고타로 오르는 길에서 예수가 당했던 그 치욕을 우리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부활을 알지 못한다. 부활의 영광을 알지 못한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그 길은 가슴 뿌듯함과 당당함을 가져다 주는 길이라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그 길은 정의와 사랑과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길이라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그 길은 하느님의 은총을 만끽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이 길 위에 서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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