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가벼움

서품식에서 주교님은 사제 후보자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참 신앙임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 내 형제고, 어머니인가 반문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형제고, 어머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라야 하느님의 뜻을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겁고 진지하기 보다는 가벼운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전에 어떤 어린아이가 물었습니다. “우리 신부님은 강론 때 맨날 사랑해라, 용서해라 하시면서 정작 왜 맨날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소리를 치시나요?” 그 물음에 저는 답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사람은 웃어넘기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들이 신앙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가볍다는 말이 신앙을 소홀히 여기고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위하는 삶을 진지하고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 꾸짖음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들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들을 무겁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이나 말씀은 가볍게 넘기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경우가 흔하고 더 많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자존심과 가치관을 완전히 버려야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넘쳐나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 생각하는 신심활동에 열심히 빠져살면서 자신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바리사이처럼 되려고 노력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전통과 관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도, 자기가 옳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전혀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너무나도 가볍게 대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겸손하지 못한지, 자기의 뜻이 더 중요한지, 용서할 마음이 없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신앙이 고상한 취미가 되고 자신의 고집을 견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지 않고,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겁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신앙이 되어야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248월에 새롭게 해양사목에 부임한 손지호 베드로 신부입니다. 제가 해양사목에 임지를 받게 되었을 때, 저는 해양사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만 있었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임하고 나서 업무를 파악하면서 부두에 나가보고, 추석을 맞이해서 외국 선원들에게 선물을 나누러 다녀왔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성경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8장에서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장면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세사람을 쉽게 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대접을 하고 쉴 자리와 먹을 빵과 고기를 내어줍니다. 아무 이유 없이 환대하였는데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외국 선원들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서 해양사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와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들이 천사나 주님일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생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는 선원들이라 느낄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이 선교에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은 자칫 해양사목의 역할을 움츠러들게 하고 불필요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을 위해서 해양사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양사목 자체가 우리의 사명이고 목적이며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낯선 이를 귀하게 맞이하였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귀하게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을 만난 것처럼 기쁘게 맞이합시다



+ 그리스도 우리의 빛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해양인들을 하느님의 천상 구원으로 초대하는 해양 사목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에 온 세상은 고독의 전염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일치를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가족을 통해 드러난다라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천상의 영원한 생명은 신앙을 지닌 가족 공동체를 통해 해양인들에게 도달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그를 믿는 이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부에게서 파견되어 오신 성자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항상 선교 중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바다에 오고 가는 수많은 해양인은 전 세계 어디로든지 파견되어 가는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구에 잠시 머무는 영혼들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으로 다시 치유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무장 될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늘 새롭게 파견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교인들은 하느님께 대해 무지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에페, 2,12). 왜 희망이 없을까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사랑이신 생명,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줍니다. 이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형태로 사랑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모른다면, 도둑이 하느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매일 마시고 놀고 즐기지만, 영원히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교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낭떠러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뭘 위해 투쟁하며 살까요? 왜 고생하며 짐을 질까요? 왜 불편을 참을까요? 영원한 생명이신 사랑,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 죽을 이긴 사랑, 원수를 사랑한 사랑, 더 이상 악이 두렵지 않은 사랑,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이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증거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교인들은 이런 사랑이 없기에 결혼도, 살아갈 이유도, 자기중심에서 찾습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판단하면서 처참한 지옥 속에 삽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세상의 영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만이 하느님을 소유하는 길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이 무지하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항상 믿음과 참된 지식 안에서 깨어 기도하면서 성령으로 무장하고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저희 해양인들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걸 잘 아시니 성령을 부어 주시어 천국으로 인도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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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올 한해도 바다의 별(Stella Maris)이신 성모님의 전구 아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 속에 머무르길 기원합니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인생이라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성인은 죽음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이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관문이다.”(죽음의 유익De bono mortis 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떠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돌아가야 할 본향(本鄕)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정 속의 인간’(Homo Viator)이기도 한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라고 지칭합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지난 2,000년간 두 가지 영성의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는 성인들의 모범을 쫓아 높은 수덕 생활을 하는 위로부터의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성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찰함으로써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아래로 부터의 영성입니다. 이 두 가지 영성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좁은 길'입니다.

그 중,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고유한 그림자, 하느님께서 만드신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45-399)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해서 알아라.”라고 조언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기 위해 겸손 안에서 먼저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는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습니다.(海不讓水) 산골짜기에서 흘러온 물, 시냇물, 강물뿐만 아니라, 공장과 생활하수로 인해 오염된 물까지도 그 물의 과거를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독이고 달래어 깨끗이 정화된 빗물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에게는 단비가 되어 세상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숨결을 부여받은 창조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아래로 부터의 영성입니다.

海不讓水마음으로, 올 한해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그리고 여기에서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23년 1월 1일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Stella Maris Busan) 담당신부 김현 안셀모.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브라가의 마르티누스, 겸손권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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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김현 안셀모 신부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도 바다의 별(Stella Maris)이신 성모님의 전구 아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 속에 머무르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로마 8,25 참조)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미그러나 아직오지 않은 하늘나라를 꿈꾸며, ‘지금그리고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자 영성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갈라 4, 6 참조)인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만나, 같은 곳을 향해 함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자라고 부릅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라고 당부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길잡이가 되어 주는 등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등대는 교회를 든든히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인 성경성전’(聖傳)입니다. 성경과 성전만 있다면 아무리 어둠이 짙은 망망대해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하늘나라라는 목적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1코린, 9,2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늘나라의 삶을 추구하고 바라는 우리의 열망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꿈과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올 한해 성경과 성전, 무엇보다 성체를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인들을 통해 덕행의 모범을 찾고, 그들의 전구와 통공으로 성화되어, 하늘나라의 삶을 착실히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고백록(8,12,29)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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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로마 12, 12)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김현 안셀모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새로운 역병의 발병과 각종 자연재해로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안부의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제도적 비대면이 되고나서야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는 누군가의 뉘우침처럼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 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웃과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알아차려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팬데믹(pandemic)은 어쩌면 위기이며 동시에 기회의 시간입니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한 한 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가 불러온 이 새로운 길 위에서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로마 5,3-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왜냐하면, 질병의 고통과 경제의 어려움에서 내일을 걱정하며 고민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이라는 생명의 길, 새로운 길을 제시해줄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의 시간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쩌면 절망과 탄식이 흐르는 이 때,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희망과 등불로써 거듭 태어나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만 온천지에 빨간 십자가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된 준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밖에 없다는 니체(Nietzsche, 1844-1900)의 핀잔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이 사회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 한해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 늘 말씀 안에 머물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의 전구 아래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해양 사목, 해양 가족
 

1-1.jpg부산교구 해양사목 스텔라회 부회장
김선옥 마리아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고요히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저는 모든 선원들이 평화롭고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거센 파도는 잠재워 주시고 모든 항해자가 순조롭게 바다를 누리게 하소서.

 선원이고 가톨릭 신자인 남편을 만나, 저는 결혼 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고 기도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짧은 만 남과 긴 이별의 연속이었고, 만남의 기쁨은 잠시, 이별의 아쉬움은 길고 길었습니다.

 그동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신앙생활로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랬기 때문에, 성당은 저에게 큰 비중을 차지했고 매일 가고 싶은 안식처였습니다. 기도할 줄 몰라도 마음 한켠에는 늘 바다에서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선원들의 안전을 기도하고, 어려움과 고통이 밀려와도 삼켜내며, 바다 에서의 안전을 기도하고, 모든 선원들의 가족과 한마음이라는 생각으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또 기도하게 됩니다.

 10년 전, 남편은 일본 후쿠시마 센다이항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입항하고 선적이 끝나면 출항하여 중국을 오가는 정기선을 타고 있었는데, 2011311, 즉 쓰나미가 밀려와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있던 날에는 정말 다행하게도 항해노선이 바뀌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가던 항구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이 없어지고 육지가 바다가 되어버린 모습을 TV 방송으로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고, 하느님께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도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립니다. 세세 영원히 받으소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은 헤아릴수도 없고 끝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기도합니다. 새날과 새마음을 주시고, 새마음으로 해양 사목 공동체 일원이 되어 생명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하소서.

 해양사목 월미사는 해양가족을 위한 거룩한 미사로 위로와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 곳이며 저의 생활에 활력소가 됩니다. 우리들의 양식인 신부님의 말씀과 사무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반가움에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주님, 저희 해양가족 모든 이를 기억해 주시고, 안전한 바다와 가족들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주소서, 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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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씨앗 : 밀알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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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김현 안셀모 신부

 1983109일 오전 1023, 버마의 수도 랑군(지금의 양곤) 중심지의 아웅산 묘지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웅산 테러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노리고 벌어진 암살 기도 사건이었기에, 초등학생인 저에게는 버마는 잊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버마, ‘미얀마로 국명을 바꾼 뒤에, 군사 쿠데타로 세계인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나라 이름을 바꾼 것도 다 민족 간의 일치라는 명분보다는,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서유럽국가들과 미국은 미얀마대신, ‘버마라고 표기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버마에서 군사 쿠데타와 군부 독재에 항거하여 봄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이 거셉니다. 마치, 1980년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너무 닮아 있어서 우리 국민들도 애태우며 도움의 손길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사태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987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 사건으로 온 국민은 분노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힘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말씀처럼,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우리는 민주사회를 이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어려움에 처한 버마 국민들은 한국의 역사와 전처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국제적 도움을 호소하고 있고 우리 역시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Everything will be O.K”(모든 게 잘 될 거야)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숨진 19세 소녀 치알 신은, 마치 한국의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처럼 버마 시위의 불씨와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T셔츠의 문구는 희망과 상징이 되었습니다.

불현듯,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한국 민주화의 불씨와 도화선이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였다면, 그 불씨를 살려, 세상을 밝히는 큰 빛으로 만든 것은 한국 천주교회였습니다. 갈 곳 없는 학생들과 시민들,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추도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집회를 강제해산하기 위해 쳐들어온 공권력에 맞서, “여기 공권력이 투입되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밟고,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의 어둠과 같은 역사와 고통과 억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양극화와 빈곤, 공정과 정의, 평등과 불평등, 기후 변화와 같은 어둠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어둠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밝힐 소명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씨앗이 되어,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할지 고민하고, 우리 해양가족들이 먼저 깨달은 바를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 모범과 지상명령에 따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루카 13,33) 우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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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로마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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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김현 안셀모 신부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2021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새로운 역병의 발병과 각종 자연재해로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안부의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제도적 비대면이 되고 나서야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는 누군가의 뉘우침처럼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웃과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알아차려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팬데믹(pandemic)은 어쩌면 위기이며 동시에 기회의 시간입니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한 한 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가 불러온 이 새로운 길 위에서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로마 5,3-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왜냐하면, 질병의 고통과 경제의 어려움에서 내일을 걱정하며 고민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이라는 생명의 길, 새로운 길을 제시해줄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의 시간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쩌면 절망과 탄식이 흐르는 이때,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희망과 등불로써 거듭 태어나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만 온천지에 빨간 십자가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된 준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밖에 없다라는 니체(Nietzsche, 1844-1900)의 핀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이 사회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 한해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 늘 말씀 안에 머물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의 전구 아래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코로나 19시대의 선원들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사목회장
정태완 암브로시오 


예상치 못한 Covid19 발생과 세계적 대유행(Pandemic)으로 각계 여러 분야에서의 어려움이 지속된 지 1년 가까운 시간
이 흘렀습니다. 언제 이 상황이 해소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계절은 여지없이 변했고 벌써 한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계 의료 관련 전문가들이 C-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희망찬 소식은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요원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선원들의 고충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해양 관련 종사자들은 현대화된 타 업종에 비해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환경 변화에 적응해 오면서 오늘날 세계 경제의 큰 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항에 입출입하는 선박의 현장에서 볼 때, ‘C-19 방역으로 인한 강화된 규제와 통제는 선원들에게 큰 어려움과 불편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부 관계자 외에는 선원들의 어려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각 선박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스크 착용 및 도선사를 포함한 모든 방선 외부인에 대한 체온측정, 손소독제 사용 등 방역에 기울이는 부단한 노력들이 어쩌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정부의 해외유입차단 방침에 따라 정박 중 상륙(외출)은 고사하고, 근무 계약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선 및 귀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장기승선으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축적된 선원들의 현실을 직접 접하면서,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이 다른 업종의 어떤 근로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혹한 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일 미사 후 바치는 C-19 조기 퇴치를 위한 기도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저리게 하며 절실하게 느껴지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는 각국의 C-19 확산 소식에 이 나라 저 나라를 방문해야만 하는 선원들의 불안감과 격리된 삶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이른 시일 내에 모든 선원과 그 가족들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이 소식지를 통해서나마 간절히 바라봅니다

202010가톨릭 해양소식지권두언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김현 안셀모

해양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820일 부산교구 정기인사를 통해 새롭게 부산교구 해양사목을 담당하게 된 김현 안셀모 신부입니다.
코로나-19라는 역병으로 비대면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에 언제쯤 마주 보며 인사드릴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으로나마 먼저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811() 사제 정기인사 공문을 받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말씀이 어부 네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었습니다(루카 5,1-11). 네 명의 어부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물 위였습니다. 하지만 물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루카 5,11)은 예수님께 대한 체험과 전적인 의탁이었습니다.
 

네 명의 제자들과는 반대로 저에겐 해양사목이 낯선 곳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삶의 터전인 바다 : 선원과 어부와 그 가족들을 포함하여 바다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라는 ‘8월의 교황님의 기도지향을 지표로 삼아, 저 역시 바다의 별”(Stella Maris)이신 성모님과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새롭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나가려고 합니다.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우선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 주신 바다로 펼쳐진 팔’(Maritime Arm)이신 해양가족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저와 함께 이 길에 동행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으신 예수님’(마태 14,31 참조)처럼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4,30)라고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바다의 나그네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온정의 손길을 뻗쳐 주시길 당부 드리겠습니다.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루카 13,33)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멘.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 (요한 17, 11).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2020217일 이후, 방선, 선원 센터 방문, 선상미사, 선상 전례 등은 모두 스톱이 되어버렸지만, 해양사목 사무실에서 선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해양사목의 미래인 해양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손수 묵주도 만들고, 그들 가운데 경제적 형편이 열악한 이들을 위해 비말마스크와 손소독제도 지원했습니다.

지난 622, 감천항 부두에서 러시아 어선의 선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부산교구에서는 감천부두를 이용하는 러시아 선박 50척의 선원들을 위해 400만원을 지원해주었습니다. 괴정성당 사목회에서도 100만원을 기부해주셨습니다. 이에 부산 크리스천 해양연합(Pucma, Pusan Christian Maritime Association)의 목사님들도 300만원, 부산 선원복지위원회와 부산 선원노동조합에서도 각각 300만원, 1400만원의 지원금이 모여, 비말마스크 15,000매와 500ml 손소독제 1500통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710일부터 러시아 어선 선원들과 연안 어선의 외국인 선원들에게, 도선사님들과 선박회사 대리점들의 직원들을 통해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습니다.

각종 언론매체들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를 나눠서, 삶의 이러저러한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살기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들을 공공연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판데믹 상황 속에서 생명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써대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코로나 블루라는 어마어마한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속담이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말로 와전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접촉이 힘들어지고, 직접대면의 기회가 줄어들게 되면서, 사람들간의 물리적 거리 두기가 사람들간의 심리적 거리 두기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자택근무가 늘고, 비대면 직장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정 내에 머물면서 가정의 분위기가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지면 참으로 다행스럽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러한 때에 참으로 절실한 것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화살기도와 가정기도입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만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속담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운 사람들을 위해 매일 화살기도를 바치고,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자주 전화나 sns를 통해 통교를 유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해양인들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도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알려주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상호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 (요한 17, 11).라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견뎌내며, 함께 희망합시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힘듦이 밀물 들어오듯 들이닥칠 ,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만나기 힘들 ,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고 « 살려달라 » 절규합니다. 대면 상황에서 살아온 삶의 양식, 내륙적인 삶의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망망대해 속의 일엽편주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 가야 하는 선원들에게는 대면보다는 비대면 상황에서, 내륙보다는 해상에서의 삶의 양식에 익숙할 밖에 없습니다. 출항하면, 금새 사방팔방이 모두 바다니까요. 기대고 싶고, 도움의 손길을 바릴 때에는 동료선원들과 VTS(Vessel Traffic Service, 해상교통관제 시스템), 선박 소속회사, 그리고 아직은 몇몇 상선에서만 가능한 위성 인터넷 Wifi 통한 통신을 통해서야 이뤄집니다. 동료선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대면 상황인 셈입니다.

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코로나 판데믹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사회적 거리두기, 혹은봉쇄령이라는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고통 속에서 살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만, 선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거의 코호트 격리 수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선박이 항만시설에 입항을 해도 하선할 수도 없고, 선적이 끝나면 곧바로 출항을 해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하선을 해야 하는 선원들도 격리조치 때문에, 하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교대근무를 위해 항만 시설 근처에 대기중인 선원들도 승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Stella Maris 방선팀은 지난 2 7 이후로 방선(선박방문) 전면 금지되었고, 선상미사나 선상전례조차 거행할 없는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항만에 정박중인 선박 내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선원들을 위해서 항만공사 측에서는 Wifi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고국 땅을 밟을 수도 없고, 기착지의 땅을 밟아 수도 없는 선원들, 그래서 가족들이나 친구, 친척에 대한 그리움을 켜켜이 쌓아둘 밖에 없는 그들의 고충을 겨우 진정시키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어려운 때에, 부산 해양사목에서는 매일 사무실에서 저와 사무장, 그리고 사무처장 이렇게 셋이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코호트 격리 수준 속에서 지내야만 하는 선원들 때문에 그들과 대면할 수는 없지만, 영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면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 묵주 150개를 손수 제작해서, 도선사님들을 통해 신자 선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고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아끼거나 서로를 두려워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코로나 판데믹 상황은 물리적으로는 서로서로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더욱더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 연대하는 ,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셨던 사랑을 이상 미뤄서는 된다고, 이제 사랑을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어려운 때에, 우리 교회가, 아니 우리 해양가족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하던 아들의 고통에 온전히 함께 하셨던 성모님을 따라 코로나 판데믹으로 말미암아 격리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선원들과 영적으로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해양사목은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無償性, Gratuitas)을 실천합니다.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한국 가요에서 겨울바다에 관한 노래들은 대부분 지난 여름의 추억을 되새기거나, 슬픔이나 아픔으로 찾는 겨울바다로부터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는 식의, 낭만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바다의 칼날과도 같은 바람과 바다를 온통 얼려버릴 듯한 추위를 온몸으로 두들겨 맞아야 하는 선원들에게 그런 노래들은 피씩 쓴웃음을 짓게 하는 듯 합니다. 경도를 따라 움직이는 선박들은 그나마 계절의 바뀜을 덜 실감하겠지만, 위도를 따라 움직이는 선박들은 항해하는 동안 내내 따뜻하거나 시원하거나, 아니면 덥거나 춥거나 둘 중의 한 계절 속에서 지내rl때문에, 선박 내의 선원들의 체력 소모가 한층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사방 팔방을 둘러보아도 망망대해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료 선원들과 함께 희노애락뿐만 아니라, 생사까지도 함께 해야 하는 선원들을 부두에서, 혹은 선내에서 만날 때면, 그들의 표정들이 대부분 밝다는 겁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밝은 표정들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겠노라고 그들을 찾아가는 스텔라 마리스 방선팀들에게 오히려 봉사의 기쁨을 맞보게 합니다. 봉사하려고 그들을 찾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봉사를 받고 오는 듯한 뿌듯함마저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피정을 하신 다음, 갈릴래아로 가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고기 낚는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던 일, 바로 다름 아닌 해양사목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셨던 일을 이어서 부산교구에서도 해양사목이 시작되었지요. 해양사목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이제 42년이 넘어 갑니다. 42년동안 때때로 교구로부터 이런 저런 칭찬들도 받았고, 해수부로부터 상장도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22일에는 천주교 부산교구 평신도협의회로부터 교구 내 단체 봉사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 하느님께서 하셨던 일을 했을 뿐인데, 세상으로부터, 또 교회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겸연쩍게 여겨집니다. 그런 상과 칭찬은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선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봉사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말이지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겨자씨 한 알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사목회장 정태완 암브로시오

만추의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도 없이 벌써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자주 머릿속에 맴도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20너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212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치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979년도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해기사로 해상근무를 시작한 이후로 주일 미사 빠지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짧은 휴가 중에도 애들 손잡고 주일 미사를 정말 즐겁게 다녔습니다. 해외에서도 입항하는 항구마다 가능한 한 성당을 찾았었고 한번은 성공회 성당을 구분 못하는 해프닝도 있었지요.

그러다 2006년 초 성령 세미나를 참여하며 신앙의 또 다른 면을 경험하게 되었고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끼며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국 항구에 기항 할 때마다 도움을 받아오던 Seamen Center, Flying Angels 기타 자선 단체의 봉사활동...

상륙할 때 차량봉사 뿐 아니라 연말이면 봉사단체들이 방선하여 나누어주던 선물 꾸러미, 내용물은 일상 속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모아 만든 선물 꾸러미들이었지요. 연필, 벙어리장갑, 모자, 손톱깍기 사탕 몇 알 등등..

성탄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감사했지만 그 분들이 왜 이런 봉사를 하고 있을까는 전혀 생각을 해보질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 해양사목, 해양 선교 활동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의 그 봉사자들처럼 우리 해양사목에도 방선팀이 부산에 기항하는 선박의 선원들을 위한 위로와 기도, 사랑의 봉사 활동과 더불어 나눔 행사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소중한 봉사 활동을 생활화하고 계신 분들께 왜? 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첫 마디는 믿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번 묵상해 봅니다.

나의 믿음은 얼마나 클까? 겨자씨의 반의 반쪽만 할까? 아니 아직은 그보다도 훨씬 작지 않을까..

깊은 고민 속에 오늘 하루도 성경 구절을 생각하며 나의 믿음에 대한 묵상을 해 봅니다.

올 한해도 해양사목 신부님과 더불어 열심히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후원으로 동참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못자리입니다.

천주교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세찬 바람이 불고, 장대비가 내리면, 배타고 먼바다 나간 자녀가 고생하고 있을 생각에 밤새 잠 한 숨 제대로 못 주무시는 어머니, 그리고 그의 곁에서 마른 침 삼키며, 속으로만 애 태우고,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괜찮을 거야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는 묵주알을 움켜쥐는 아버지, 태풍 소식이라도 들려올 때면, 태풍이 다 지나갈 때까지 한시도 일기예보 소리에서 귀를 떼지 못하며, 노심초사하는 아내, 해양가족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매월 셋째주 월요일 오후 2, 부산 가톨릭센터 3층에서는 해양인들과 해양가족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됩니다. 그리고 이 미사에 참석하시는 분들 중에는 성가대원들도 계시고, 해양가족이 아닌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해양 가족분들이십니다. 해상에서 자그마한 사고라도 나면, 멍하니 하늘부터 쳐다보며, ‘제발 다친 사람 없어야 할 텐데’, ‘제발 살아 돌아와야 할 텐데하면서, 늘 마음 졸이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지만, 이 미사에 참석할 때만큼은 하느님 덕분에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들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시오”(요한 6, 20)라는 말씀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절실한 사람들이기에, 주님의 몸을 영하고, 주님과 하나되는 이 미사에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주님으로부터 받기에 그런가 봅니다.

201910월을 맞이하면서 해양사목 담당신부로 이제 갓 3년을 살았습니다. 본당 신부로서 겪었던 신자들과의 인연과 그 인연 속에서 체험했던 삶의 희로애락과는 사뭇 다른 해양가족들과의 만남 속에서의 희로애락, 그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하느님의 은총들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은총은 두려워하지 않는용기의 은총과 내가 늘 함께 하리라는 생명의 은총입니다.

신학교를 라틴어로 세미나리움(seminarium)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못자리, 혹은 모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은 신학, 철학 같은 학문도 배우고 익히지만, 하느님을 향한 마음, 사람을 향한 마음도 배웁니다.

커다란 배를 삼켜버릴 듯한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선원들은 하느님은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마음을 다잡고, 또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굳세게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그런 고비들을 이겨낼 때마다, 그들은 은총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고마움도 키워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선원들은 동료들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되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도 더욱 더 깊이 키워나갑니다. 이러한 그들의 일상은 신앙을 키우고, 굳세게 하며, 마침내 하느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못자리와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월입니다. 十月이기도 하지만, 時月이기도 합니다. 때를 안다는 것, 날수 셀 줄을 안다는 것은 지혜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시편 90,12 참조). 날수를 헤아릴 줄 안다는 것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중요성을 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원들의 삶을 헤아려 보면서, 선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못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삶의 자리의 의미’-세상은 하느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못자리-를 배우는 저는 참 행복한 사람, 은총의 사람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 하느님께, 그리고 선원들과 해양가족분들께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평등은 기회의 균등에서 시작됩니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20199월이 되면, 저도 여기 해양사목 담당신부로 발령을 받은지 3년이 됩니다. 해양사목 사무실을 방문했던 첫날, 목발을 짚고 혼자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해양사목 평신도 사도직 사목회원 몇 분들과 해양대학교 가톨릭 학생회 학생들 몇 명이 저를 기다리고 계셨지요.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습니다. 지난 3년간 비 오는 날을 빼고 매주 화요일, 금요일마다 방선을 하고, 주일에는 부산신항에 있는 선원 센터에 가서 센터를 방문하는 선원들에게 봉사하다 보면, 선원들의 남녀 성비가 터무니없을 만큼 남성위주임을 쉽게 발견합니다.

예부터 배의 이름은 여성으로 지었지만, 배에는 진수식이나, 명명식, 혹은 축복식 때에나 여성이 올라 갈 수 있었지, 배 안에서 여성이 일하고 생활하는 것은 터부시되어 왔지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선원이라는 직업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지요.

요즈음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일부 선박에서는 여성들을 고용하고, 연안 여객선이나, 크루즈 같은 곳만 아니라, 상선이나 어선에서도 여성 선원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녀 성비를 따지면, 여성 선원들의 숫자는 남성 선원들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 현실이지요.

선원들 간의 남녀 성비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남녀 간의 불평등은 우리가 피부로 느낄 만큼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여권이 많이 신장되고,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회자되고, 여성 상위시대라고 말들을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접어야 하는 꿈들이 더 많고, 날개를 꺾어야 하는 횟수들이 더 잦습니다.

저는 이 글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맞으면서 쓰고 있습니다. 2016722일 이전에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는 날이 기념일이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66월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따라 축일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하느님 자비의 증인, 주님 부활의 증인, 복음 선포자의 모범, 사도들의 사도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서 여성의 존엄과 새로운 복음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를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요청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증인이자, 부활을 처음 알린 전달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요(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19723. 마리아 막달레나, 왜 아직도 울고 있는가 기사 부분 인용)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은 하느님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하게 존재하지요. 3년 전,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승격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존재하는 남녀 불평등의 요소들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도 남녀의 불평등은 존재하지요. 여성을 제한된 역할을 하는 존재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현실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실제 현실이 그러하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평등이라는 것은 첫째로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지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려면, 그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각의 변화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지요. 시스템이 변화되어야 하지요. 선박에 여성 선원들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선박 내에 여성 선원들을 위한 공간, 예컨대 여성용 샤워실, 여성용 화장실 같은 공간들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남녀평등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우리 해양가족들 안에서도 남녀평등을 위해서 노력하고, 우리 해양사목 안에서도 남녀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도록 했으면 해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미고사 하는 사람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루가 24,49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지요. 성령께서는 우리들이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은총도 주시지요. 이 은총은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지식), 의견, 지식, 굳셈(용기), 효경, 두려워함(경외심)의 은총이고, 이를 두고, 성령칠은이라고도 부르지요.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생명력의 원천이며,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이지요. 그 영은 세상의 논리에 고개 끄덕이면서 힘없는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하며, 자포자기하듯 살아가려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지. 불편한 거 보다는 편한 낫지 않나?’ 하며, 현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 ‘세상 떠들썩하게 하고, 골치 아픈 문제나 일으키고, 온갖 잡음 일으키게 하는 것보다는 그저 주어진 인생, 조용조용 살다가 갈 때가 되어서 가면 그만 아닌가.’ 하며, 무사안일, 안전 제일주의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들지요.

악령에 깃들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 하느님의 아들님, 왜 우리를 못 살게 구십니까?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까? » 악령에 깃들인 사람들이 단순히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간 사람들, 마녀 같은 사람들, 뱀파이어 같은 사람들이었을까요? 세상의 논리에철저하게복종하며생명을업수이여기고,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나 몰라라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예수에게 자기네들을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했지요. ? 예수의 영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일까라는 물음을 만나기 마련이지요. 성령을 따라서 살면 되지요.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려는 몸짓, 세상을 조금은 더 불편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발버둥, 세상의 잘못을 고발하고, 세상의 논리에 투쟁하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 성령을 펄펄 살아 꿈틀거리게 하느냐, 아니면, 그저 내 안의 위로자, 내 찌든 삶의 위안자, 내 슬픈 마음에 평안만을 가져다주는 자로만 머물게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을 받았지요. 꼭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이 사랑하는 것이래요. 그래요.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사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은총 속에 사는 삶이지요.

끝으로 또 하나,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지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달이네요. 특별히 성령께, 그리고 성령께서 성화하시는 이 세상을 향해 미··사 자주 말씀 드리며 살기를 바래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한국해양대학교 가톨릭학생회를 떠나면서
 

한국해양대학교 졸업생

이민석 스테파노

 

가톨릭학생회는 내 대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1학년 군대와도 비슷했던 대학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쳐 방황하던 시기에 종교생활로 나에게 의지와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동아리이다. 해양사목은 그런 가톨릭학생회가 올바르게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매주 학교 밖으로 나가기 무서운 교칙 때문에 제대로 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아리방에 신부님께서 직접 오셔서 미사를 집전 하셨다. 미사가 끝난 후에 먹는 맛있는 음식들 덕분에 학생들도 많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해양대에서 가톨릭학생회가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내가 1학년 때 4학년 선배들이 3학년 실습을 마치고 뒤늦게야 가톨릭학생회 동아리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들은 애초에 신자도 아니었다. 승선 중에 갑자기 종교심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승선생활을 마치고 다른 것도 아닌 종교를 찾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단지 생활이 힘들어서, 이대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일을 하다보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것 같아서가 그 이유일 것이다. 이런 선원들을 위해서, 또 미래에 이런 선원들이 될 해양대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해양대 가톨릭학생회, 해양사목의 필요성은 크다.

해양대 가톨릭학생회는 해양사목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해양사목은 선상생활 속에 종교활동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선원들의 의식 함양과 지치고 외로운 선상 생활중에 삐뚤어질 수도 있는 마음을 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당장 알 수 있는 예로 나 또한 해양대학교 승선생활교육이 힘들어서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니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해양대내에는 많은 개신교 동아리가 있지만 천주교 동아리는 가톨릭학생회 하나뿐이다. 그런 점에서 거기에 속해 있다는 것에 자부심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회장으로서 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아리로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도 아팠다. 대학생들에게 있어 천주교의 인식은 솔직히 개신교 교회에 비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이미지이다. 나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입장에서 신자, 비신자 구분 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탈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부산가톨릭대학생연합회(이하 부가대연)에서 하는 체육활동, 피정 등 다양한 활동에 참석하였고 타 대학 가톨릭학생회와 연합해서 엠티도 기획하였고 태종대성당에서 열리는 행사들에도 참석하였다. 방학 때는 신부님과 함께 테마를 정하여 엠티도 다녀왔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하루는 비신자인 학생이 천주교에 대한 좋지 않았던 인식과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나한테 말했다. 그 순간이 아마 가톨릭학생회 회장으로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의미 있고 추억 많은 동아리의 대표를 한 학기 지내고 졸업을 하여 해군소위로 복무중이다. 학교생활의 전부였던 가톨릭학생회. 내 대학생활의 출발점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내 대학생활의 마침표는 이미 찍혔지만 동아리의 마침표는 찍히지 않았다. 나로 인해서 또 우리 동아리로 인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을 후배들이 다시 주인공이 되어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면서 동아리를 예쁘게 가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봄이 차디찬 겨울에 대한 저항이듯, 부활은 죽음에 대한 저항입니다.

      

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사방천지가 완연한 봄입니다. 봄이 왔다는 것을 TV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 몸이 느끼고 있지요. 대지가 푸른 생명의 물을 올리고 가지들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나리는 이미 만발하였고, 벚꽃도 활짝 폈습니다. 봄에는 사람의 몸에도 생명의 물이 흐릅니다. 자연히 봄나물을 찾게 되고 흙냄새 밴 생명의 맛을 찾지요. 이 좋은 봄에 우리는 함께 묵상하기 참으로 좋은 주제를 만납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죽었던 대지에도 새 봄이 시작되듯이, 살아도 죽은 듯 살고 있던 우리 생명에도 부활이라는 새 기운이 살랑살랑 불기를 바래봅니다.

 

부활, 도대체 부활이 무엇일까요 ?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 생애 전체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는 그 말씀을 십자가 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키셨던 예수님, 그러나 그렇게 죽은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부활시키셨지요.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선포와 행동들, 예수님의 삶 전체가 궁극적으로 옳다고 인정하셨답니다.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라는 피맺힌 절규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지요.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도, 바로 고통 속에서 숨겨진 채 현존하시는 분, 극도의 위협, 무의미, 허무함, 버림받음,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서도 인간을 지탱하고 붙잡아 주시는 분, 인간의 곁에서 항상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분,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되시는 하느님, 바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완전히 계시하셨지요.

 

사랑하는 해양가족 여러분,

부활은 그저 2천년 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벌떡 살아 나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저항, 거짓에 대한 하느님의 진리의 저항, 죽임에 대한 하느님의 살림의 저항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을 체험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점철되는 문화 속에서도 생명을 부르짖고, 잊어버리고 가슴에 묻어 버리자는 달콤한 유혹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말 잘 듣고, 입 다물고 살라고 하는 세상에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서민들이 입으로라도 « 이 썩을 놈의 세상 »이라고 외치는 것, 그렇게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을 토해 내며 저항하는 것이 바로 부활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저항, 부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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