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상상

이인경 안젤라 / 좌동성당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친척 할머니와 함께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다. 좀 더 놀다가라고 댁으로 손을 잡아끄신다.

작은 아파트에 꾸며진 소박한 공간이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바지런한 손길이 오고간 담백하고 알뜰한 살림살이다. 일상이 된 기도 자리와 당신께서 키워낸 네 자녀의 사진은 차고 넘치도록 풍성했다.

요것조것 재밌게 바라보고 있으니, 할머니께서 종이에 쌓인 두툼한 뭉치를 두어 개 내오셨다.

니 이게 뭔지 알겠나?”

글쎄요. 이게 뭐에요?”

함 봐볼래? 니가 보면 좀 우스울끼다.”

선물처럼 포장된 테이프를 뜯어내니, 주보뭉치였다. 4~5년 된 주보들이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촌스러웠다. 불과 몇 년 밖에 안 되었는데. 사는 모습이 정말 빠르게 바뀌어가는구나 싶었다. 할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위해 모아둔 주보라고 하셨다. 반가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손가락을 잡아채는 제목이 있었다.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

그때 그 강론이다. 틀림없다!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5년 전으로 머릿속 태엽이 되감겼다.

 

점심때 식사기도를 하시는 직장 선배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사실 저도 성당 다녔는데, 이제 안 다닌 지 20년이 넘었어요.”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주보 갖다줄께!”

더 이상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다. 이내 평소처럼 재밌는 농담과 소탈한 웃음으로 식사 분위기를 돋우셨다.

그때부터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 내 책상 위에는 전날의 주보가 올려져있었다. 헤드셋으로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주보를 읽는 일로 월요일 일과는 시작되었다. 종이 울리면 식사시간인 줄 알고 침을 흘렸다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매주 월요일 책상 위 주보를 보면 , 월요일이구나, 한 주 시작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 주의 시작을 좋은 말씀과 직장 선배님의 배려로 시작한다는 것. 그때 내겐 아름다운 호사였다. 인쇄기에서 막 빠져나온 듯 주보는 빳빳했다. 시험지(?) 크기 종이 두 장을 반으로 접은, 작다면 작은 여덟 쪽 주보에는, 가져다주시는 분의 관심과 사랑, 거룩한 향기가 나는 표지 그림과 사진, 어릴 때는 몰랐던 복음 말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소리, 그동안 알 리 없던 교회 소식이 담겨있었다. 이십 여 년 만에 마주한 주보는 어색하고 새로웠다.

20131021일 월요일, 그날도 출근해서 어김없이 주보를 펼쳤다. 강론 제목이 바로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였다.

모든 민족들을 복음화시킨다고? 그게 가능할까? 어떻게 모든 민족들을 가톨릭 신자가 되게 한다는 거야?

궁금한 마음으로 주욱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눈길이 멈추었다.

 

타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이 복음화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화는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진리를 더 제대로 믿도록 도와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런! 이렇게 답답할 수가! 나의 길이 옳으니 나의 길로 오라! 성당으로 오라고 해야지. 타 종교인이 믿고 있는 진리를 제대로 믿도록 도와주라니.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었다.

냉담 시작 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하느님을 불렀다.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었다.

아니, 하느님! 이게 무슨 말이에요?”

따지려고 불러 본 하느님!’ 세 글자. 가슴에 아련한 것이 스쳤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그 다음 말은 저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귀 기울이신다.

그 날, 퇴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느님, 거기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주보는 그 다음 월요일에도 어김없이 내 책상 위에 도착했다.

또 물어보았다.

하느님, 이 주보 속에 계세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느님, 저도 제가 올바르게 제대로 따를 수 있는 진리를 갖고 싶어요. 제대로 믿도록 도와주신다고 그랬잖아요.”

그럼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진리는 무엇인가. 크게 걱정스럽고 딱히 불행할 것 없는 밋밋한 일상에서 지금보다 조금 더 가지는 것,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주보의 강론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나를 따르지 않아도 좋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 네가 가는 그 길이 옳은 길이라면 제대로 밟아가거라. 네가 올바르게만 그 길을 간다면 내가 너를 도와 줄 것이다.’

네가 딴 길을 가더라도 도와주겠다, 사랑하겠다는 하느님의 고백, 모든 차이와 모든 옳은 길을 긍정하는 큰 마음. 이 매력에 끌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사랑과 그 큼이 바로 진리, ‘제대로 믿어야 할 진리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내 곁에 계셨지만 그분께 눈감고 그분을 밀쳐냈던 시간을 떠나보냈다. 더 이상의 정답은 없었다.

 

성전 문을 밀었다. 둥그렇게 둘러쳐진 제단. 그곳을 마주하고 앉았다. 낯선 곳에 던져진 이방인의 불안한 눈길은 여기저기를 더듬을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걱정 반, 설레임 반으로 성전을 나서는데 주보가 보였다. 직장 선배님 덕분에 이미 본 주보였지만 그래도 또 펼쳤다. 이 낯선 곳에서 내게 익숙한 건 주보 하나뿐이었으니까. 마지막 쪽 본당 소식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내가 이 공동체에 잘 스며들 수 있을까.

걱정은 몇 주 후 해결되었다. 주보 본당소식을 꼼꼼히 살펴본 덕분에 레지오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단원 언니들의 도움으로 내 신앙생활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분을 외면하고 세상 속에 있을 때 주보는 그분께 다가가는 사다리였고, 다시 돌아와서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다.

난 이제 성전에 있다.

주보를 몇 부 더 챙긴다. 내가 받았던 주보처럼 빳빳하게 배달하려고 구김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품에 안는다.

5년 전 그때 그 직장 선배님처럼 나도 역시 점심시간 식사기도를 잊지 않는다. 그럼 그때 나처럼 냉담 중인 동료가 말을 건네 온다. 나도 흔쾌히 대답한다.

! 알았어요. 제가 주보 갖다드릴게요.”

매주 월요일 아침 그 동료 책상에 주보를 올려둔다.

그러고는 상상한다. 그가 주보를 읽다가 미련한 그분의 사랑이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그래서 하느님께 싸움을 걸어보는, 그러고는 결국 그분의 매력에 휘말려버리는, 그런 상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