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약사

【수정본당 水晶本堂】

▣ 본당 개요

* 부산교구 소속 본당.
* 부산시 동구 좌천동 1010 소재.
* 1962년 7월 17일 범일동(凡一洞) 본당과 초량동(草梁洞) 본당에서 분리·설립
* 주보성인은 사도 성 베드로와 바오로
* 관한 구역은 수정2∼5동, 좌천2동 전 지역과 수정1동, 좌천1동 일부 지역.



▣ 본당 설립 배경

부산시 중심부에 위치한 수정동과 좌천동은 일제시대 때 부시진 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한국 전쟁 직후부터는 빈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증가하자 교구에서는 1962년 7월 17일 수정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제찬규 신부를 임명하였다.


▣ 본당 설립과 역사(1)

수정동 지역에 본당이 설립이 결정된 것은 부산교구가 정식 교계제도를 설립하던 1962년 7월 17일이었다. 부산교구에서는 이 날짜의 공문에서 수정 본당을 정식 설립함과 동시에 교구 경리 겸 비시 신부인 제찬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제 신부가 본당에 부임할 당시 이곳에는 거처할 곳조차 없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본당이었다. 이에 제 신부는 우선 폐허로 남아 있는 부근의 절터를 매임, ‘천주교 수정 교회’라는 현판부터 달고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당 신자들과 함께 몸소 본당 건립에 나섰다. 그 결과 부임 이듬해 8월 25일에는 공사 중인 2층 강당에 거적을 깔고 첫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이 신축 성당은 이듬해 6월 21일에 준공되어 8월 30일에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본당 신자들은 레지오 활동 등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을 구성해 나갔고, 성당이 완공된 후에는 수녀원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65년 2월 25일에 완공하였으며, 이해 3월 11일에는 ‘수정 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본당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부산교구 30년사 . 발행자 : 부산 교회사 편찬 위원회, 한국교회사 연구소. 발행처 : 천주교 부산교구 발행연도 : 1990년 6월 30일 (pp 34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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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 설립과 역사(2)

본당 설립 당시 마땅한 집회 장소마저 마련하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던 제찬규 신부는 박덕현 회장의 사택을 빌려 예비 신자 교리반을 운영하는 한편, 현 성당 소재지에 폐사(廢寺)로 있던 대각사(大覺寺) 부지 330평을 매입하 뒤 성당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64년 6월 21일 4층 규모의 성당(410평)을 완공하고 그해 8월 30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렇듯 본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각종 활동 단체들의 조직도 활발해진 가운데 본당 주보 <조각배>가 창간되었고, 1965년 2월 25일에는 수녀원을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수정유치원’(1983년 12월 폐원)을 개원하였다.

또 1960년대 말부터 빈민 구제 사업을 폭 넓게 전개한 수정 본당에서는 1966년 6월에 연립 주택 15동을 지어 이 지역 빈민들을 입주시키고, 정착금과 생활비를 보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평신도 단체들의 활성화에 주력하고 반상회를 운영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제도를 마련하여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교리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부산시 수정동 산북 일대의 도로 공사로 1980년 10월에 수녀원이 헐리자, 성당에 이웃한 주택을 매입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건물(90평)을 짓고 이곳에 사무실과 수녀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히로시마(廣島) 교구 야마구치(山口)본당과 1983년 7월 31일에 한·일 합동 산간 학교를 개최한 이래 현재까지 격년제로 개최해오고 있으며, 1987년에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기념하여 각종 행사를 마련하였고, 1991년 한 해 동안에는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많이 창단되면서 전교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신자들의 전출이 잦은 편이어서 사목과 선교 대책의 지속성이 떨어지고 본당 공동체간의 유대 관계가 깊지 못했던 측면이 많았다. 이에 따라 수정 본당에서는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유대감을 돈독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신앙 강좌·피정·성지 순례·성서 공부 등을 통하여 신자들의 신심 강화에 힘쓰고 있다.

<재단법인 한국 교회사 연구소 발행, 톨릭 대사전 제8권 (pp.5140∼5141)에서 2001년 4월 20일 1판 1쇄 발행>


▣ 본당 약사

1) 지역의 특성 및 유래

부산의 중앙에 위치한 수정동과 좌천동은 부산의 중심부를 형성하면서 동남으로 뻗어 있다. 이 수정동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 수정산(水晶山)인데, 이 이름은 이 산에서 수정이 많이 나온 것에서 유래하였다.

1926년 경남여고가 설립되기 전에는 현재의 부산일보 뒷길로 전차가 운행되었고, 수정 본동에서 수정초등학교와 경남여고까지는 인가가 없는 논밭이었다. 현재 수정동 앞 간선 도로는 1913년부터 4년간 매립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이후 이곳에 부산진역이 생기고 일본인이 거주함으로써 수정동은 갑자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수정동의 중심 지역은 수정 2동으로 동구청이 자리하고 있으나, 언제부터인지 부산진역 일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촛불동네라는 슬럼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수정 3동은 도심 속에서도 전원의 정취를 간직한 동네이며, 수정 1·2동은 대부분이 거주 지역 및 상가 지역으로서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또 3·4·5동은 아파트 단지이나 고지대에는 영세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좌천동의 좌천(佐川)이라는 이름은 좌자천(佐自川)이란 말의 약칭이다. 이 좌자천은 가야산 및 감재에서 시작하여 현재 수정동 중앙을 흘러 부산진 동쪽을 거친 후 바다로 이어지는 작은 개천이다. 옛날 부산포 시절부터 한국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좌천동은 충의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때 정발 장군이 부산진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한 것을 비롯하여 3·1운동이 제일 먼저 발생하였고 호주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하여 일찍부터 개화 문물에 접한 곳이기도 하다.

좌천 2동에는 일본인의 별장이었다는 능풍장이란 곳이 있는데 오늘날 동구에서 제일 좋은 주택지이며 비교적 생활 수준도 높다. 좌천 3동은 1913년 경에 바다를 매립하여 형성한 지역으로 동구 관내에서 범일 5동과 함께 슬럼가를 형성, 재개발 지역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는 대형 공정들과 부산항 콘테이너 부두 등이 소재하고 있다.

2) 본당 설립 경위와 성장 과정

수정 본당의 현재 자리는 원래 불교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 그 절은 언제부터인가 인적이 끊어져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2년 7월 17일 수정 본당 설립이 확정되고 초대 주임으로 제찬규(시메온) 신부가 임명되었으나 성당 부지는커녕 사제관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 신부는 박덕현(수정 본당 초대 회장)씨의 집 빈 방에 거처하면서 성당 부지 매입에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때 마침 앞의 절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제 신부는 그곳을 부지로 결정하고 주인과 협상한 끝에 시세보다 싼 가격에 대지를 인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수정 본당은 집회 장소조차 없는 상태였으므로 초량 본당과 범일 본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신자들은 계속 소속되었던 본당을 다녀야만 했다. 한편 본당에서는 신축 예정지에 ‘천주교 수정 교회’라는 현판을 내걸어 아내 구실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현판을 달자 곧 예비자들이 찾기 시작했고, 이에 박덕현 회장 자택에서 예비자 교리반이 운영되었으며 그 곳에서 첫 세례식도 거행되었다.

당시는 6·25 사변을 겪은 지 10년 쯤 된 때이므로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까닭에 신자들의 생활도 몹시 어려웠다. 그러나 신자들은 적은 비용이나마 건축비로 충당하고자 봉헌하였으며 박덕현 회장은 많은 희사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우들의 열성에 감동한 제 신부는 성전을 빠른 시일 내에 완성시키고자 다짐하고 공사장 벽돌을 나르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1963년 8월 25일 공사 중인 2층 강당에 거적을 깔고 수정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비록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이나마 새 성전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전체 교우의 ⅔를 차지하는 초량과 범일 지역의 교우들도 비록 지역은 달랐지만 모두 합심하여 성당 건축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 결과 1964년 6월 21일에는 성당 준공식을 갖고 8월 30일 최재선 주교의 주례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렇듯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후 각종 활동 단체의 조직이 활발해진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가 초량 본당 꾸리아에서 분리되어 수정 본당 단독 꾸리아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각배》라는 이름으로 본당 주보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때 본당 주보 성인으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를 결정하였다.

초대 제찬규(다니엘) 신부의 재임기간(1962.7.17∼1968.10.24)중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본당 신축과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활성화였다. 당시 본당에서는 1963년 4월 21일 첫 영세자를, 이듬해 11월 8일에 첫 견진 성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수녀원을 준공하여 분도회에서 처음으로 수녀 2명이 본당에 부임했다. 이에 3월 11일에는 수정유치원을 개원했으며, 마돈나회, 사도회, 본당 사목회,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제2대 김태호(알로이시오) 신부는 재임 동안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많은 외교인을 입교시켰다. 또 반상회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반모임을 실시하고, 주일학교 교사회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어려운 신자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연령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본당의 기틀을 다졌다.

제6대 이시찬(다니엘) 신부는 성당에 14처를 설치하고 오르간을 구입했으며, 구역을 재조정하고 구역장을 새로 임명했다. 그리고 성당 내에 어린이 성당을 새로 지었으며, 각종 행사를 개최했다.

본당 발전의 새로운 도약기라 할 수 있는 제8대 신상도(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재임 기간인 1979년 2월 15일부터 1983년 3월 15일 사에에는 해양 가족회, 철도 가족회, 아가페회. 대학생회, 등이 설립되었다. 한편 도로 공사 관계로 철거된 본당 종각, 수녀원, 본당 정문 등을 새로 세우고 성모상도 이때 건립하였다. 그리고 1981년 7월 21일부터 5일간 부사 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3개본당(수정·온천·양정) 합동 산간학교를 수정 본당 주관으로 금곡에서 실시하였다. 또 그 무렵 일본 야마구치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당과 자매 결연을 맺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한·일 합동 산간학교의 길을 열어 놓았다. 반면 1983년 1월 22일에는 수정 유치원이 폐원되었다.

다음 제9대 이영묵(안드레아) 신부는 재임 기간 중 우선 한·일 산간학교를 성주 가천 만남의 집에서 개최하였다. 한편 이 신부는 성당 천정과 제대 및 내부 수리를 하였으며 다목적 회관도 건립하였다. 또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요셉회를 1985년 10월 22일에 발족하였다.

다음으로 1986년 9월 16일 본당에 부임한 제10대 박용조(프란치스코) 신부는 우선 성당 내에 온풍기를 설치하는 등 본당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부산교구 30년사 . 발행자 : 부산 교회사 편찬 위원회, 한국교회사 연구소. 발행처 : 천주교 부산교구 발행연도 : 1990년 6월 30일 (pp 648∼65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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