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지역의 천주교 전파

동래 지역의 천주교 신자 집단의 형성시기는 대략 1861년경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동래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독진의 설치와 무인들이 거주하는 상황에서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동래지역이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천주교 수용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동래지역의 천주교 신자 집단은 읍치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에서 1868년의 무진박해 때 8인의 순교자가 발생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집단의 회장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이관복, 박조이, 이삼근, 이월주, 차장득, 옥조이 등이다. 이 8명 중 동래지역 출신이 이정식 요한과 그의 집안 그리고 양재현 마르티노이다. 한편 외지로 피신하였다가 통영에서 사형당한 유경서와 윤봉문도 역시 동래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 지역에서 천주교로 인하여 순교한 신자 가운데 특히 이 지역에서 천주교의 수용 및 확산을 주도했다고 믿어지는 분들이 바로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이다. 
동래지역의 천주교 신자 집단은 읍내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 존재하였다. 동래지역에서 천주교 수용을 주도한 주요 인물인 이정식과 양재현은 이 지역의 위세 있는 가문 출신도 또한 평민계급 출신도 아니었다. 이정식의 경우 무임 직역의 세습이 점차 고착되던 동래 지역사회에서 무임 가문의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임을 두루 거쳤다.
한편 양재현은 친족 배경이 사회적 지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당시에 이 같은 배경이 없었지만 좌수에 오를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정식과 양재현은 동래 지역에서 천주교 수용을 주도했고 비록 상층 신분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확보한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내세를 강렬하게 지향하며 이를 위해 죽음까지 선택한 것이다.
천주교의 확산에 따라 지역사회가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에 적극 가세한 사실도 이 시기 천주교 박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 중 각종 수호신을 중심으로 체제가 유지되는 촌락사회에서 천주교는 자신들의 제의 및 조직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천주교 배척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관에 의한 천주교 박해보다 촌락민들에 의한 고발과 배척이 더 두드려졌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지배조직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지역사회 운영질서에서 이탈한 천주교인들을 배척하였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배척형태는 후손들의 무임 진출에 대한 규제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외세의 위협과 불안에 상응하여 지역사회의 질서와 이해를 유지해 나가려는 움직임은 지역사회에서 천주교 박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조선시대 지방 군 •현의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鄕所)의 벼슬. 향소는 유향소(留鄕所)라고도 하며, 여기에 좌수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좌수는 향사(鄕士)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들이 선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2년이었으나 수령이 바뀌면 개선할 수도 있었다. 유향소는 원래 지방풍속의 단속과 향리의 규찰 등을 그 임무로 했는데, 성종 때 확정된 주(州) •부(府) 4,5명, 군(郡) 3명, 현(縣) 2명의 정원이 대체로 지켜지다가 후대에는 창감(倉監) •고감(庫監) 등의 직책이 생겨 때로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으며, 좌수라는 칭호도 향임(鄕任) 흑은 감관(監官) •향정(鄕正) 등의 호칭이 더 많이 쓰였다. 직임(職任)을 6방(房)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吏) •병(兵)방, 좌별감이 호 •예(禮)방, 우별감이 형(刑) •공(工)방을 맡는 것이 통상이었다.
 

† 복자 이정식 요한 (1794-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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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요한은 동부 생민리에서 살던 동래 장교였다. 그의 거주지는 바로 현재 명륜동과 복천동, 명장동에 이르는 읍치에 위치하였다.2  그의 나이 60세 때(1853년) 천주교로 입교한 뒤 천주교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요한은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이정식 요한 회장은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요한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리고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가 그의 생가 앞 고갯마루에 이장되었다. 이후 명장동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으로 옮겨졌다가,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수녀원이 철거되자, 1976년 부곡동 오륜대순교자성지로 옮겨 졌다. 병인박해 순교자를 기록한 치명일기 에 817번으로 기록되었지만 아쉽게도 1899년 시복 청원 대상인 26위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시복의 영광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미사를 통해 이루어졌다.3

2 동래읍성역사관, 경상도지도 중 동래부 고지도(1872년 제작) 참조.

3 한건 신부, 이정식의 신앙과 순교, 부산교구 주보 2014.8.3/2284호 참조

†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 (1827-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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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현 마르티노는 동래 북문 밖 실내에 살던 좌수이다. 실내동은 현재의 금사동4이다.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즉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1868년 8월 경상 좌수영에서 그는 이정식 가족과 함께 “가세, 가세, 천당으로 가세”라는 노래를 부르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후에 어떻게 이장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오륜대순교자성지에 가묘만 남아있다. 병인박해 순교자를 기록한 치명일기 에 823번으로 기록되었지만 아쉽게도 1899년 시복 청원 대상인 26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시복의 영광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미사를 통해 이루어졌다.5


금사동은 조선시대 동상면(東上面) 지역인데, 이때까지 금사(錦絲)라는 행정동명은 없었는데, 일제 초기 금천(錦川)마을과 사천(沙川)마을의 두 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두 마을의 첫글자를 합하여 동명이 되었다. 회동동(回東洞)은 회천(回川)마을과 동대(東臺)마을로 구성되어 역시 두 마을의 첫글자를 합하여 동명이 된 것이다.
1937년 편찬한 《동래군지》에 의하면 동래읍 금사리(錦絲里)와 회동리(回東里)를 합한 지역이다. 법정동(法定洞)으로 금사동과 회동동은 광복 후 줄곧 있어 왔으나 행정동으로는 서동(書洞)에 속하였다. 1985년 12월 1일 서3동이 분동되면서 이 지역은 옛 지명을 찾아 금사동으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동래부지(1740)》산천(山川)조에는 오늘날의 수영강 상류를 사천이라 한다. 사천은 기장군 원적산(圓寂山)과 경계의 사배야현(沙背也峴)의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해운포(海運浦)로 유입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래부지》고적(古跡)조에는 동대(東臺)는 사천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丈) 가량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數丈)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 좋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금천, 사천, 회천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는 주는 것이며 동대는 이 강가의 가장 좋은 경치 좋은 장소의 하나임을 엿볼 수 있다.
 

5 한건 신부, 양재현의 신앙과 순교, 부산교구 주보 2014.8.17/2287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