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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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회 ◆

  ( 公議會 / Concilium / Councils )

 

  일반적으로 공의회라 부르는 종교회의는 교회를 사목할 책음을 받은 주교들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문제나 사목문제를 협의 결정하는 공식회인인 바 주교단 교도권의 단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교회사에서 최초의 공식회의라고 볼 수 있는 회의는 기원 후 49~50년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使徒會議)이다(사도 15:1-29). 초대 교회에서 유태인 신자들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은 구약율법을 그대로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큰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구약교리는 받아들이지만 율법의 규정은 부과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 뒤 2세기, 3세기의 박해시대에도 지역별로 주교들이 모여서 사목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 혹은 regionale)라 하였고, 이러한 회의는 인근지역 교회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교리상의 일치를 보존하며 같은 신앙을 선포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교회가 자유평화를 누리게 되고 차츰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가 확장되고 신학(神學)이 성립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설(異端設)이 생겨 교리논쟁이 심하게 되자 교회의 묹가 제국의 문제로 나타났고, 황제들은 국가의 평화와 교회의 안정을 바라면서 여러번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소집하였다. 제1차 공의회에서 제8차 공의회까지는 주로 황제가 소집하고, 황제의 보호 하에 제국의 동방지역인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칼체돈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고대교회의 신학논쟁은 주로 동방에서 일어났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동방지역 주교들이 많이 참석했고, 서방지역에서는 소수의 주교들과 로마 교황의 대리들이 참석하는 정도였다. 공의회가 거듭되면서 이단설이 단죄되고 정통교리가 선포되었으나, 차츰 동방교회서방교회는 언어(희랍어 대 라틴어), 관습의 차이가 정치적인 여건과 결부되어 신앙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이를 드러냈으며 대립이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덟 공의회는 다음과 같다. (각개 공의회에 대하여 해당 항목 참조). (1)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소집), (2) 제1차 콘스탄티노플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소집), (3) 에페소 공의회(431년, 테오도시우스 2세 소집), (4) 칼체돈 (451년, 마르치아누스 황제 소집), (5) 제2차 콘스탄티노플 (553년, 유스티누스 황제 소집), (6) 제3차 콘스탄티노플 (680~681년, 콘스탄티누스 4세 소집), (7)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년, 이레네 섭정 소집), (8) 제4차 콘스탄티노플 (869~870년, 바실리우스 황제 소집), 이 8차 공의회에서 포시우스 총주교는 파문당하고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된(1054년) 후부터 공의회는 로마교황이 소집하고 주로 서방교회 주교들이 참석하여 교회 내부의 개혁과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의 관계 등을 다루었다. (9) 제1차(1123년, 갈리스도 2세 소집), (10) 제2차(1139년, 인노첸시오 2세 소집), (11) 제3차(1179년, 알렉산데르 3세 소집), (12)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인노첸시오 3세 소집), (13) 제1차 리용 공의회(1245년, 인노첸시오 4세 소집), (14)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소집), (15) 비엔 (1311년, 글레멘스 5세 소집), (16)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 요한 23세 소집), (17) 피렌체 (1439~1445년, 에우제니오 4세 소집), (18)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년, 율리오 2세 소집). 그러나 중세의 10차에 걸친 공의회는 교회 개혁문제에 대하여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효과는 보았지만 근본적이고 항구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폐막된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문에 95개조의 선언문을 게시하여 프로테스탄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의회의 소집을 원하였지만 교황들은 공의회 우위설(優位說, Conciliarism)의 재현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다가 바오로 3세교황이 칼 5세 황제의 지지를 얻어서 트리엔트에 제19차 공의회를 소집하였다(1545~1563년). 공전의 대개혁 공의회인 트리엔트 공의회는 18년 동안에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3차의 회기(1545~1548, 1551~1552, 1562~1563년)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교리를 확정짓고 교회 생활 전반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결의하였다. 다행하게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역대 교황들은 강력한 개혁의지와 거룩한 모범으로써 공의회의 결의를 착착 실천하여 교회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16세기 이후로 근대사회가 산업화하고 정치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사상적 대립과 혼란이 극심하여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과 그 여파에 의한 교회의 위기에 즈음하여 교황 비오 9세는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신앙의 근본문제와 교회에 대한 교리를 천명하려 하였으나 프랑스와 프로시아의 전쟁으로 인하여 1870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의회는 신앙의 근본문제와 교황의 우위권(優位權)과 무류권(無謬權)에 대한 교리를 선포하였다.

   20세기 중반에 와서 현대사회가 점점 탈(脫) 그리스도교의 길을 치닫는 가운데, 교황 요한 23세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숙고하고 세상에 대하여 교회를 개방하는 자세로서 1958년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차 회기를 통하여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검토하고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방법을 토의하고 천명하였다. 21차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참석자 수로 보아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는데, 외부 세력의 간섭이 전혀 없었고 과거를 마무리짓는 데보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성겨이 두드러진 교리적이면서 사목적인 공의회였다. 공의회 이후로 일부의 혼란도 있었지만 교회 전체가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가톨릭 굿뉴스 /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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