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소개글
 천주교 대연성당 약사
 
1. 본당 설립 유래
 
범일동 본당 소속이었던 대연동 지역에 본당 설립의 기운이 일게 된 것은, 1950년대 말 당시 범일동 본당 주임인 범덕례(范德禮) 프란치스꼬(Francesco Faldani)신부가 이곳 신자들을 방문하면서 한편으로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자 노력한 때부터였다. 범 신부는 1960년에 이르러 마침내 이 지역에 성당 대지 2,000평을 매입하고, 그 해 10월 11일부터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1월 10일에는 임시 성당 건물이 완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범 신부의 노력을 지켜보던 교구청에서는 1961년 2월 23일, 범 신부를 범일동 본당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보냄으로써 대연 본당의 사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범일동 본당의 보좌였던 허철(許哲,안드레아)신부를 3월 19일자로 대연 본당 보좌로 임명함으로써 초창기 본당의 기틀을 잡도록 하였다.
초대 본당 신부인 범덕례 신부는 콘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소속으로 대연 본당을 설립하고 그 기초를 닦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본당에 부임하자마자 우선 임시 성당을 바탕으로 ‘콜베 유치원’을 운영하였고, 부임한 해 11월에는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1962년 12월 8일에 건평 240평의 새 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이 성당은 콘벤뚜알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에서 한국 땅에 건립한 첫 성당이었다. 이에 앞서 그 해4월에는 초대 주임 범 신부가 대연동 본당 안에 설립된 콘벤뚜알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 한국 지부장으로 전임되었으며, 허철 신부가 제2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허철 신부는 1년 만에「성모 성심과 성 요셉 가르멜 수도원」의 지도 신부로 전임되고, 대연동 본당은 범덕례 신부가 수도회의 지부장을 겸임하면서 사목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콘벤뚜알 수도회 소속의 노경삼(盧景三,다니엘)신부가 1965년 5월 30일자로 대연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을 받아 범 신부와 함께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부산교구 30년사> p.346.

 
2. 개 관
⦁ 명 칭 : 천주교 부산교구 대연성당
⦁ 주보성인 : 성 안또니오
⦁ 설립연도 : 1961년 2월 23일
⦁ 소 재 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90번지
⦁ 관할구역 : 대연3동
 

3. 약 사
1) 지역의 특성 및 유래
본당이 위치한 대연동은 황령산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장산봉, 동쪽으로 우룡산과 신룡산에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들 산에서 발원한 대연천, 남천, 용호천들이 용호만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하천의 침식으로 형성된 평지와, 황령산 계곡에서 용호만 해안까지 이어진 선상지가 이 지역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산에서도 수원(水源)이 풍부한 지역이고, 대연(大淵)이란 명칭과 함께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당(龍塘) 등의 명칭이 모두 물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대연의 본래 이름인 ‘못골’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데, 본당 설립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전답이 대부분 지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우룡산에 ‘유엔전몰장병묘지’가 위치하고, 용호만 해안변에 부산수산대학이 일제시대부터 있어 왔다.
1960년 전후만 하여도 이곳에는 미군용 비행장이 있었으며, 미군과 한국군 병영이 전답 사이로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인가는 못골 시장 주변, 부산수산대학 주변, 용호만 입구에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한편 일제시대 때는 나환자촌이 대연 2동, 우암동, 감만동에 흩어져 있었다. 그 후 소록도로 잠시 옮겨졌다가 해방과 함께 용호 2동으로 이전되었다. 오늘날 대연동을 비롯한 남구 일대가 주택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9월 문현동과 대연동을 잇는 대연 고개가 절하되고 범일동과 해운대 사이의 비포장도로가 4차선 포장도로로 바뀐 후부터이다.

 
2) 본당 설립 경위와 성장 과정
대연동 본당은 콘벤뚜알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에서 전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본당이다. 그러므로 본당 신부와 수사는 모두 이 수도회 소속이라 할 수 있다. 본당을 세운 사람은 범덕례(Francesco Faldani)신부인데, 범 신부는 1958년 10월 6일 본국인 이태리로부터 부산에 입항하였다. 범 신부는 본래 중국에서 처음 외방 전교를 시작하였으나,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함으로써 1952년 4월 강제 출국되어 이태리로 귀국하였다. 그러다가 콘벤뚜알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최초로 한국 진출 선교로서 1958년 범 신부를 파견시킴에 따라 입국하게 된 것이다. 이때 범 신부는 같은 수도회 소속의 허철(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입항하였는데, 그 해 10월 16일에 범 신부는 범일동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고 허 신부는 보좌가 되었다.
2년 6개월의 재임 기간 동안 두 신부는 범일동에서 사목 활동을 펴는 한편, 특히 범 신부는 독립된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고자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1959년 6월, 문현동과 수영 간에 부지를 선정하여 주민 생활, 토지 시세 등을 조사하였다. 이에 대연동이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봉사 현장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이곳 주민들은 끼니를 잇기 곤란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며, 특히 용호동에는 나환자촌이 있어 의약품 · 구제품 · 식료품 등이 절실했던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대연동은 대연고개를 사이에 두고 시내 방면과 해운대 방면으로 통하였는데, 현재 본당이 들어선 자리는 일부가 쓰레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1960년 6월 잠시 본국에 귀국한 범 신부는 수도회 본부와 친지들에게 한국 전교의 현황을 소개한 다음 다시 입국하였다. 그런 후 그해 8월 30일 가까스로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이곳은 대연동과 용호동을 잇는 도로를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위치였다. 길 건너편에는 콘세트 건물이 있었는데, 이를 즉각 인수하여 내부를 개조, 급식소도 설치하였다. 그리고 10월 11일에 임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임시 성당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범 신부는 급식소에 기거하며 일대의 300여 주민들에게 우유, 밀가루, 옥수수가루 등을 조리해서 제공하는 한편, 가정 방문과 더불어 용호동의 나환자촌을 찾아 전교 활동을 벌이는 등 지역 사회 봉사에 주력하였다. 당시 전교 활동 결과 17명의 신자를 찾아냈는데, 그 중 8명은 범일동 본당에 나가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냉담 상태에 있었다.

이듬해인 1961년 1월 10일 마침내 임시 성당이 완공되어, 2월 23일에는 범일동 본당 주임이었던 범 신부가 대연동 임시 성당으로 이주하여, 17명의 신자와 함께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것이 대연본당의 시작이었으며, 그 달 24일에는 부산교구로부터 대연 본당으로 승격 받기에 이르렀다. 본당 설립 후 범 신부는 ‘콜베’라는 유치원을 개방하게 되었고, 평일 미사는 임시 성전에 딸린 안방에서 봉헌되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62년 3월 24일 기공식을 가진 후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범 신부는 당시 인근 미군 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아 터를 닦고 신자들과 함께 자재를 운반하고 손수 벽돌을 찍었다. 이리하여 그 해 12월 8일에는 신축 성당의 낙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 때 본당의 주보성인으로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를 택하였다. 이로써 대연 본당은 본당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당시의 신자수는 300여 명 정도였다.
이후 대연 성당의 교세가 계속 확장되어 1975년 4월에는 신자수가 3,593명에 달하여 문현 본당을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 또한 부산교구의 교세 확장 계획에 따라 3년 후인 1978년 4월 오륙도 본당과 용호 본당을 다시 독립시켰다. 이때 본당 신자수는 3,622명에 달하였다. 특히 오륙도 본당을 분할하게 된 것은 범 신부가 나환자들에게 깊은 배려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범 신부는 현재 석포 본당이 위치한 난민 주택 2동을 구입하였고 용호동에 거주하는 극빈자와 나환자 자녀를 수용하여 양육하였다. 1965년 3월 28일에는 현재의 새싹 유치원으로 이전, 부산시로 부터 보육원 인가를 받았다. 원생이 80여 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성당 뒷 마당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이 보육원을 거쳐 사회로 진출한 젊은이의 수만해도 250명에 이른다.

‘콜베’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은하 유치원’은 1963년 6월 6일에 유치원 인가를 얻었는데, 1971년 5월 19일에 ‘은하 유치원’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립 당시에는 성체회 소속의 수녀가 교육과 경영을 담당하여 매년 약 80명의 원아를 모집, 배출하였으며 이후 신자를 포함한 인근 주민들의 자녀에게도 개방하여 왔다.
새싹 유아원은 1974년 5월 24일, 황만용(마리오) 신부가 부산시로 부터 탁아 시설 인가를 받아, 부모 모두가 직장에 다니는 영세 가정의 자녀 40명을 수탁하여 오후 4시까지 돌봄으로써 시작되었다. 1983년 2월 20일에 자립 유아원으로 독립하여 성체회 소속의 본당 수녀가 만 4세에서 취학 전까지의 아동 80명을 보살피고 있다.
그동안 교리실의 부족을 느껴오던 차에 1978년 8월에는 현재의 교리실로 증축하였으며 이듬해 4월 남천 본당을 분할 등 지역주변의 변화에 따른 석포본당, 이기대 본당, 못골본당을분할하여 왔으며, 이처럼 대연 본당은 남구의 모체가 된 본당으로서 현재 신자수가 4,732명에 달하고 있다.
 

4. 대연본당 분리 계통도
범일본당 ⇒ 대연본당(1961년) → 문현 본당 : 1975년 4월
→ 용호 본당, 오륙도 본당 : 1978년 4월
→ 남천 본당 : 1979년 4월
→ 석포 본당 : 1984년 4월
→ 못골 본당 : 2004년 10월
 

5. 성전 낙성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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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성인인 안또니오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저희 대연성당은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수도자들이 사목하고 있는 본당입니다.
작고 겸손하셨던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처럼 저희 대연성당 교우들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며, 지역사회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대연성당에 여러분들을 기쁜 마음으로 초대합니다.

 
주소 : 부산시 남구 수영로 266번길 51 (대연동)
주임신부 : 김해원 가브리엘 사무실 :  TEL. 051-622-0635 평협회장 :  TEL. 010-4554-4000
보좌신부 : 고순현 마카리오  F E X   :  TEL. 051-628-4689 연도회장 :  TEL. 010-7326-0673
수녀원 :  TEL. 051-622-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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