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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건너 그 곳

오지영 젬마 / 교구평협 기획분과 차장 gemma784@hanmail.net

 

추자도의 바다는 비밀스럽게 걸어 나온다. 말을 걸어보지만 자꾸만 침묵만을 강요한다. 그냥 길을 걸었다. 공소를 찾는 길은 쉬웠지만 풀지 못한 문제지를 들고 헤매는 것 마냥 걸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예수성심상이 손짓을 하는데도 난 빨리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황경한 묘가 있는 추자도다.

황경한은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를 부모로 태어났지만 신유박해 때 백서사건으로 아버지 황사영 알렉시오가 순교하고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하추자도에 남겨지게 되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살다간 황경한은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혀있다.
풍광이 너무 좋아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 조용해서 겁이 났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였다. 손에 든 묵주를 꼭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황경한 묘’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반가운 마음에 뛰었다. 그렇게 찾았던 곳인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아픔이 온몸을 휘감는다. 땀과 눈물이 같이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 왜 아픔을 동반하는지 모를 슬픔이 비죽비죽 가슴을 때린다.

묘지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기도를 하고 묘지를 쓸어안았다. 아픔이 전해진다. 이게 신앙일까? 항상 미지근한 삶 속에서 얼마나 안주하고 살았는지.

환영 속에 붉은 맨드라미 같은 황경한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찾아온 길이지만 마음속에 하느님을 꼭 안고 온 길이기도 하다.

묘지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바다 멀리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가면서 보니 더 자세하게 보였다. 산 귀퉁이에 커다랗게 서 있는 십자가는 귀양 가는 정난주 마리아가 황경한을 배에서 내려놓은 자리라고 한다. 가슴이 쿵쿵 뛴다. 또 눈물이 흐른다. 아픔의 바다가 자리하고 바위가 있고 바위위의 십자가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 같다. 아들을 부르는 사무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신앙 속에서 산다고 살아왔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꼈는데 이번 성지순례의 은혜로움은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인 것 같다. 더불어 성탄의 기쁨이 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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