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부산가톨릭문예작품공모> 입상자 명단

 

 

 

 

부문

제목

성명

(세례명)

주 소

전화

본당

최우수

동화

종이상자의 꿈

최선아

루시아

부산시 사하구 괴정1동 491-9

국제아파트 2동 303호

010-2760-4036

사하

우 수

고래의 노래

안병근

루카

사상구 주례로93 현대무지개

아파트 104동 1506호

010-3314-5583

주례

수필

장마

배정순

레지나

울산시 남구 야음동 동부아파트

205동 1206호

010-5347-2209

야음

가 작

소설

수녀 황

박경민

글라라

울산시 중구 태화동 동부아파트

105동 1902호

010-8972-9230

우정

꽃달임

김세균

토마스

서구 동대신동3가 173

문화아파트 416호

010-7100-3121

서대신

콩트

엿장수와 동이

김정숙

프리실라

부산시 사하구 하단2동 530-5

서진빌라 101호

010-9150-4626

하단

나룻배 여행

김상구

요셉

동래구 명장1동 140 의 22번지

정든 빌라 301호

010-4857-7050

안락

수필

장미의 이름으로

박지예

가브리엘라

사하구 감천 1동 85-3번지 9통 3반

010-3382-9811

사하

신앙

체험

나를 춤추게 하는 주님

이광숙

세레나

김해시 장유동 율하리 중앙하이츠 806-502

010-9525-3948

율하

입 선

비오는 날

안정숙

데레사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282-1

성은아파트 A동413호

017-585-8537

염포

시조

코스모스

조원채

베드로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1539-18

010-2889-7033

삼산

수필

까미와 미미

김상욱

베드로

강서구 대저1동 중리2구 5길 28번지 2070번

010-8505-2266

삼계

슬픔으로

김민지

프란체스카

울산시 남구 옥동 도성가든 APT 112-204

052-258-2853

옥동

소설

반짝이는 그 무엇

조서연

루시아

연제구 연산9동 동서그린A 가동 203호

010-3018-1717

토현

수필

술, 그리움을 희석시키다

김상덕

부산시 강서구 강서우체국

사 50-122

010-8505-2266

엠마

오공소

들꽃의 침묵

유광숙 체칠리아

부산시 사상구 엄궁동 산 1-6 번지

010-4709-6619

엄궁

수필

어머니의 마음

김연희

세레나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4-1번지

청파아파트213호

010-9332-2420

금정

하늘문

고윤희

아우구스타

부산 해운대구 좌동 양운로 182,

102-1903

010-4738-2315

좌동

수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가족의 의미

윤영순

세실리아

남구 용호1동 LG 메트로시티 111동

1301호

010-5095-6814

남천

 

■ 2013년 제25회 부산가톨릭문예공모전 입상작 / 최우수 / 동화

 

 

 

종이상자의 꿈

최 선 아┃루시아

 

 

 

나는 누런색 종이상자입니다. 그것도 아주 빳빳하고 큰 종이상자입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다른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나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아마 폼 나고 멋진 물건을 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만 하면 그냥 행복해서 웃음이 납니다. 나는 내가 만나게 될 물건을 아주 포근히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고 끝까지 지켜주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창고는 매우 춥습니다. 나는 빨리 이 창고를 떠나 어디로든 가서 새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많은 선물들을 사게 될 겁니다. 쇼핑몰과 백화점이 바빠지면 나도 여기를 빨리 떠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눈이 내립니다. 눈이 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 오늘은 이 창고를 떠나 콧바람을 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갑자기 창고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의 손길이 바쁩니다. 오전에는 내 앞에 있던 상자들이 모두 세상 구경을 나갔으니 오후에는 기다리던 내 차례가 올 것 같습니다. 눈이 내리니 오전에 창고를 떠났던 내 친구들이 약간 걱정이 됩니다. 눈길에 사고라도 나면 빙판길에 뒹굴지도 모르니까요.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 할 일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멀리 창고에 있던 아저씨가 물건을 싣는 기사 아저씨에게 얘기합니다.

“오늘 물건들이 잘 나가네. 여기 이 큰 상자들도 모두 나가니 이따 모두 실어주세요.”

이제 드디어 내가 바깥나들이를 할 차례인가 봅니다. 나는 속으로 ‘야호!’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몸 어느 한 곳도 물에 젖지 않게 하고 빳빳하게 잘 지켜온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볼품없는 종이상자지만 훌륭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꿈들을 상상하는 동안 나는 트럭으로 옮겨져 커다란 장난감 창고에 다다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어마어마한 크기의 창고입니다. 창고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장난감이 종류별로 쌓여 있습니다. 블록놀이를 할 수 있는 장난감에서부터 인형, 그리고 작은 악기들이 창고에 꽉 차 있어서 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담을 만한 큰 장난감이 있을까 하며 창고 안을 쭉 둘러보니 나한테 꼭 맞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집 모양의 플라스틱 장난감인데 어른 키에 가까울 만큼 덩치가 컸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집 모양 장난감에게 인사를 먼저 건넸습니다.

“안녕! 나 오늘 여기 새로 도착한 종이상자야. 내가 덩치가 가장 커서 아마 너를 담게 될 것 같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 나는 비싸고 귀하신 몸이라 너에게 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집 모양 장난감은 나를 비웃으며 얘기했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길 거야. 너처럼 누렇고 못생긴 종이상자에게는 가지 않을 거라고.”

집 모양 장난감의 말에 갑자기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어떤 물건을 만나든 좋은 상자가 되어 잘 지켜줄 자신이 있는데 못생긴 종이상자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아니야. 나는 멋진 종이상자가 맞아. 세상에 나보다 더 튼튼하고 빳빳한 상자는 없단 말이야. 두고 보라고.’ 나는 다시 힘을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내 앞에 있던 상자들은 하나둘씩 갖가지 장난감들을 담고 주인들을 만나러 떠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쯤 여기를 떠나게 될까 봐 몹시도 궁금해집니다. 첫날에 인사를 나눈 집 모양 장난감하고는 아직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집 모양 장난감은 정말 나보다 더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겨지게 될까요? 아무튼, 나는 어떤 장난감을 담게 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장난감 선물을 받게 될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니까 말입니다.

어제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 창고 안은 종이상자끼리 서로 기대고 있어도 참 춥습니다. 작은 장난감들이 수없이 창고를 떠나고 있는 순간에도 집 모양 장난감들은 지금까지 하나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가격이 너무 비싸 사람들이 잘 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집 모양 장난감이 참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이때 앞을 지나가는 창고지기 아저씨의 혼잣말이 내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제야 집 모양 장난감이 하나 팔려나가는구나. 장난감 덩치가 너무 커서 창고가 비좁았는데 잘 됐어.’

집 모양 장난감에게도 이제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집 모양 장난감 쪽으로 가져갑니다. 집 모양 장난감이 날 보고 뭐라고 말할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아저씨는 집 모양 장난감에 먼저 스티로폼 옷을 단단히 입힌 후 나를 씌우고 나일론 끈으로 야무지게 묶었습니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집 모양 장난감은 이제야 굳게 닫혔던 입을 열고 나에게 한 마디 건넵니다.

“결국 내가 너에게 담기는구나. 고급스러운 내가 왜 이렇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아무튼, 네가 나를 맡았으니 도착지까지 절대 내 몸이 부서지지 않게 잘 보호해줬으면 해.”

“알았어. 나만 믿어. 너를 안전하게 데려다 줄게.”

기다렸던 일들이 눈앞에 일어나니 너무 신기하고 마냥 좋기만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출발하게 된 것도 참 행운입니다.

트럭에 올라 고속도로에 나가니 선물들을 싣고 달리는 택배회사의 트럭들이 넘쳐납니다. 모두가 새 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인 모양입니다. 나처럼 다른 상자들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합니다. 선물을 싸는 종이상자로 태어난 내가 너무 행복하고 기쁜 하루입니다. 시간이 흘러 온 사방은 금방 어두워졌고 나는 긴 여행 끝에 어느 고층 아파트의 한 집에 도착이 되었습니다. 택배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자 쌍둥이 아이들이 쏜살같이 달려 나왔습니다.

“와! 장난감 도착했다. 엄마, 장난감 왔어요.”

아이들은 매우 좋아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가위를 들고 와서 내가 두른 허리띠를 자르고 테이프를 뜯어 그 큰 장난감을 겨우 꺼냈습니다. 쌍둥이들이 사는 아파트 거실은 아주 넓어 집 모양 장난감이 머무를 곳도 충분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고 나는 내가 꿈꾸던 그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아주 좋았습니다. 달콤한 행복은 금방 끝났고 이별은 순식간에 찾아왔습니다. 집 모양 장난감과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아이들의 엄마는 나를 포개어 재활용품이 모이는 곳으로 곧장 데려갔습니다. 추운 날 이렇게 버려지는 것을 상상은 해왔지만 이런 일이 막상 나에게 일어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이렇게 튼튼하고 빳빳한 내가 바로 재활용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날 밤 오랜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온 나는 너무 피곤하여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난 후 어디선가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에 갑자기 눈이 떠졌습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인데 누군가 재활용 창고로 들어와서 종이들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입니다. 할머니는 바퀴 달린 녹슨 철제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종이상자를 담고 계셨습니다. 종이상자들은 하나둘씩 포개어져 얌전히 바구니 안에 누웠습니다. 할머니는 다른 종이상자들을 다 담고 나서 나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이 상자는 너무 튼튼하고 좋다. 버리기는 진짜 아깝구먼. 이건 내가 따로 챙겨야겠어.”

할머니의 그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내가 버려지지 않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할머니는 상자로 가득 찬 장바구니를 끌고 어디론가 나가시더니 30분 후에 다시 오셨습니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할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이끌고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언덕배기 쪽방촌 꼭대기 집으로 향했습니다.

삐거덕대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한쪽에 코 흘리는 할머니의 손자가 외로이 놀고 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 추운 날씨였지만 할머니가 피워둔 연탄불 덕분에 방에는 다행히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오자 할머니에게 곧장 안겼습니다.

“할머니, 어디 갔다 왔어?”

“응, 우리 기찬이 주려고 할머니가 장난감 집 하나 구해왔지.”

“장난감 집?”

기찬이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래. 이 할미가 이걸로 멋진 집 하나 만들어줄게.”

“우와, 신 난다. 할머니, 빨리 만들어줘.”

아이는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선물에 기뻐서 그 비좁은 방을 폴폴 먼지가 나도록 뛰었습니다.

내가 이제 이 아이에게 장난감 집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할머니는 가위와 테이프를 들고 나를 이리저리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내 몸을 보기 좋게 잘라서 예쁜 세모 지붕도 만들고 볼펜으로 창문도 그려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솜씨를 발휘하자 그럴싸하게 종이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만든 집에 쏙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우리 집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손자가 좋아하니 할머니도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습니다.

“할머니! 이 집 안에 들어와. 정말 좋아. 할머니, 여기 안에 엄마 얼굴도 크게 그려줘.”

할머니는 손목이 아파 힘드셨지만, 손자가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그려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날 손자에게 줄 선물이 걱정이었는데 오늘 아침 나를 만나 장난감 집을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어 많이 기쁘신 것 같았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 나는 늘 멋진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꿈꾸었는데 나의 바람대로 오늘 가장 멋진 일을 해낸 것 같아 참 뿌듯합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기찬이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습니다. 볼품없는 종이상자지만 난 참 행복합니다.

 

 

 

■ 2013년 제25회 부산가톨릭문예공모전 입상작 / 우수 / 시

 

 

 

고래의 노래

안 병 근┃루카

바다안개 자욱한

무욕의 밤바다

건질 것이 꼭 그 무엇이어야 하는 세상

나는 바보같이 저 욕심 없는 바다에

너를 잡기 위해

낡고 구멍 난 그물을 서툴게 던진다

이끼 낀 조가비를 운명처럼 등에 지고

작살 맞은 상흔 혼자 핥으며

빛조차 비껴가는 심해를

숙명처럼 유영하는 너의 날갯짓

우~우~우~엉

천년의 전설보다 더 슬픈

너의 노랫소리

깊은 밤바다를 헤치고

환청같이 내 마음을 두드리는데

나는 이 새벽 바다안개 속에 홀로 서서

낡고 빈 그물을 거둔다.

■ 2013년 제25회 부산가톨릭문예공모전 입상작 / 우수 / 수필

 

 

 

장마

배 정 순┃레지나

 

 

 

연일 장맛비가 내린다. 문득 햇볕에 검게 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곱게 단장하신 모습이 아니다. 언제나 허리춤에 긴 치마꼬리를 올려붙이고 머리에는 수건을 쓴 채, 분주하게 종종걸음을 치고 계시는 모습이다.

나는 오 남매 중 막내여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 직도 한데 늘 어머니의 손길에 대한 갈증에 목이 말랐다. 그 시기의 어머니는 나에게 시간을 할애할 틈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셔서 어린 오 남매를 건사하는 일이 고스란히 어머니 몫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남자가 없다는 것은 지붕에 대들보가 빠진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필사적이었고 자잘한 일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는데도 나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는 외로움이요, 기다림 그 자체였다.

휴일이 따로 없는 농촌에서 유일하게 집안에서 쉴 수 있는 때가 비 오는 날이었다. 그러니 장마철은 나의 쌓인 욕구 불만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는 절호의 찬스였다. 보릿고개의 막바지를 힘겹게 넘어선 시기이기도 해서, 가난한 농촌 살림살이이지만 간식거리도 제법 다양했다. 갓 찧은 햇보리에 콩을 드문드문 섞어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고소한 보리 볶음과 삶은 완두콩, 포실한 속살을 드러낸 찐 감자의 감칠맛은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만큼이나 오붓하고 정겨운 먹거리였다.

간식을 먹으며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정담을 나눌 기회도 기실은 장마가 가져다준 귀한 선물이었다.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깊은숨 몰아쉬며, 어린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인생은 헌 신짝처럼 내던지신 어머니!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툇마루에서 단잠에 빠지셨다. 아마도 꿈속에서도 가뭄에 타들어 가던 작물들의 환호성 소리를 들었으리라. 농작물의 기사회생은 어머니의 전부이자 생명을 살리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늘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와, 가뭄 든 논 물꼬에 물들어가는 소리를 최고로 치셨다. 기댈 곳 없는 과부의 생명, 아마도 장맛비는 하늘이 어머니를 위해 예비하신 측은지심은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장마철은 나에게 수난시대였다. 농촌에선 아이들 스스로 밥 떠먹을 능력만 있으면 가사를 도와야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산이나 들로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뜯기는 일이었다. 오빠들은 시오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떼를 써 봐도 별수 없었다. 더욱이 장마철에는 변변찮은 우의도 없이, 비료 포대를 반으로 접어 걸치고 소를 몰고 들로 나가야 했으니 어린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런 와중에 이웃집에 내 또래의 서울 아이가 내려왔다. 그 아이는 생전 보지도 못한 파란 꽃무늬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의 검은 콩처럼 까만 살빛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 집은 아버지만 회사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비가 안 오는데도 날마다 들에 일하러 가시지 않고 집에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그런 세상이 있을까. 그 아이가 부럽고도 또 부러웠다. 그날부터 나는 알에서 깨어난 새처럼 도시에 대한 환상에 젖어 파란 꽃무늬 원피스를 자면서도 꿈을 꾸었다.

장마철은 무더위의 전령사다. 비가 그치면 폭염暴炎이 시작된다. 언제나 견디기 힘든 무더위를 몰고 온다. 실한 결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풍년이 든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장마도 마찬가지다. 장마다운 불편함을 견디어냈을 때, 자연은 그 수고로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수확하는 농부들에게 함박웃음을 안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마가 여름휴가나 단풍놀이처럼 기다려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타는 대지에 단비를 뿌려 농부의 애타는 마음을 적셔주는가 하면,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세균번식이 우려되어 집안을 구석구석 점검하고 살뜰히 살피는 때도 장마 때이다.

나 역시 장마철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유년 시절의 풋풋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느린 기류의 흐름 속에서 정신없이 휩쓸려 넘어가는 세월의 흐름을 관조할 수 있다. 여유로운 나와의 만남, 뭔가 걸러내지 않으면 일보 전진할 수 없을 것 같은 갑갑함을 털어내어, 모처럼 홀가분해지는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삶에 깊이가 없다. 젊지 않은 나이에도 내가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길을 떠나는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장마처럼 치근덕거리고 성가신 세월의 무게가 나를 성장시키는 근원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결실 또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진실한 삶은, 과정의 성실함에 있다.

장마는 앞만 보고 치달리기만 하는 내 인생의 ‘쉼표’이다. 달리다가도 때로는 멈추어 서서 왜 뛰는가, 어디로 향해 뛰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남은 삶 세속적 가치에 연연해 앙탈을 부리기보다는 장맛비 속의 여백을 읽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리라.

나에게 있어 장맛비는 여백이며, 쉼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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