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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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메온 베르뇌 (St. Simeon Berneux)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t. 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님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주교님은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t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베르뇌 주교님은 순교 후 102년 만인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1978-2005)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 사제서품과 동양의 선교사로 활동
베르뇌 주교님은 1837년 사제로 서품 된 후,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여 1839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입회하여 동양지역 선교 사제로 파견되었다. 최초 파견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킹(베트남)이었다. 통킹(베트남)으로 가던 중 마카오에 들렀다가, 최양업과 김대건 신부를 만난 것이 훗날 만주를 걸쳐 한국에 입국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선교활동 중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었다. 베트남에서 활동한 기간은 약 4년이다. 그 후 한국과 관계 깊은 지역인 만주와 요동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며, 1854년 만주교구 주교님으로 서품되었다. 조선교구 제3대 페레올 주교님 후임으로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2. 파리외방전교회 활동
조선교구의 주교는 제1대 뷔뤼기에르(1792-1835)주교부터 제9대 라리보주교까지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사제들이 소임을 수행하였다(10대 조선교구장: 노기남 주교님).  조선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던 ‘파리외방전교회”는 일명“순교대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에서 활동한 170명의 신부 중에 25명이 순교했고 한국의 103위 성인 중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사제들이 10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3. 베르뇌 주교님의 주요 활동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주교님은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조선교구 입국 및 초기 활동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베르뇌 신부님을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성인은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성인은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님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조선교구내 최초 신학교 설립  
조선교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첫번째)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두번째)의 선종이후 36년간 조선인 신부가 없었다. 당시 파리외방선교회의 주요 전략은 “현지인 성직자 양성제도”였지만 조선교구에는 신학교조차 없었다. 하지만 제4대 베르뇌 주교님은 1855년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옹기를 구워 팔아 신앙생활을 영위하던 은둔 교우촌이던 충북 제천 베론(현, 베론성지)에 성요셉 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한국교회 최초 베론 신학교는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882년 조미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교구에서는 폐낭신학교로 신학생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강성삼(1882), 강도영(1883), 정규하(1884) 등을 신학교로 보내어 졌다.
 
  인쇄소 설립  
베르뇌 주교님은 서울에 인쇄소 2개를 설립하여 사목활동을 구전에 아닌 활자화된 인쇄물을 통한 선교활동에 주력하셨다.
 
  조선교회 주보성인 성모마리아의 정신 기틀 마련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매일 묵주기도와 칠고의 묵주신공을 바칠 정도로 돈독한 성모신심을 지녔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인해 성모신심이 널리 확산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주교는 1838년 조선교구 주보성인으로 성모 마리아로 정해줄 것으로 교황청에 요청하였고,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허락하셨다. 제4대 베르뇌주교에 이르러 조선교회를 성모의 보호 아래 맡긴다는 뜻에서 1861년 10월 조선교구를 8개 사목구로 나누고, 7개 사목구를 성모와 관련한 이름으로 명명했다. 서울지역(성모무염시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충주지방(성모탄생), 공주지역(성모영보: 주님탄생예고), 충청도 동북부지방(성모자헌), 충청도 서부지방(성모왕고: 동정마리아방문), 경상도 서북부(성모승천), 경상도 서부지방(성모취결례: 주님봉헌) 사목구로 칭하였다.

 
 4. 순교의 순간
베르뇌 주교님은 1866년 2월 뜻밖에도 병인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베르뇌 주교님은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성인은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이즈음에 도리 신부와 볼리외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베르뇌 주교님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님과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베르뇌 주교님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으며 수지성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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