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차 ‘의덕의 거울’ 평의회 훈화]

 

"우리는 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나요? 그냥 하느님께 직접 용서를 청할 수 없나요?”                                   

[이상훈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이미 고해성사를 보았거나,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 오시기에 (1테살 5,12~13) 고해성사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3,15). 따라서 우리에게 ‘사제’라는 영적인 어버이를 주셨고,

사제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베푸는 권한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20,23).


요컨대,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은 경이로운 영적 보화로, 우리는 기쁨으로 이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그분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십니다(루카10,16).

오직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을 죄로 여긴다면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과 나누는 우리의 친교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죄는 성령과 우리의 온전한 통교를 단절함으로써 교회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죄를 지은 상태는 마치 우리가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죽은 가지와 같으며, 이 죽은 가지는 결국 나무에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로마11,20~22).


교회는 한 몸으로 구성 되어있습니다(에페5,23).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통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와도 화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려 할 때, 먼저 형제들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죠(마태5,21~26).


왜, 그럴까요? 하느님과 그분 백성들과 화해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고해성사는 또 겸손의 덕이 성장하게 도와줍니다. 겸손은 진정한 회개를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마태23,12).
교만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사제에게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겸손한 행위는 우리 삶에서 교만을 몰아내는 것이죠(에제6,49~50).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겸손을 다름 아닌 정직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겸손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지요.


사제는 죄에 대해서 우리가 보다 객관적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제는 또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집에서 은밀히 하느님께 직접 나아간다면,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관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매튜 핀토/다른위/‘아담과이브는배꼽이있었을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