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설립 경위
부산 서구 대신동의 옛 지명은 ‘닥밭골’이었다. 예부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고을이라 닥밭골이라 불렀다. (서구 향토지) 일제 식민지 노동자들의 거주지이자 6.25전쟁 피난민의 대규모 정착지로서 서민적 애환이 묻어있으나 지금은 전국 곳곳에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닥밭골이 점차 알려지고 있다.
지하철 동대신역 5번 출구에서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면 ‘닥밭골 문화예술관’ ‘닥밭골 북카페’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지금도 ‘닥밭골 문화나눔터’에서는 닥나무 줄기 거두기를 시작으로 티 고르기, 물 빼기 등의 총 13단계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한지 제작과정을 볼 수가 있다. (예술부산 98호)
대신동의 숲이 우거진 넓은 들에 일본 수비대가 연병장으로 사용하다가 이후 1909년 부산형무소가 설치되고 넓이 일만여 평에 자리 잡은 형무소는 많은 애사를 남기고 육십여 년 만인 1973년에 북구 주례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1928년 부산공설운동장이 건설되면서 당시 부용동에 있던 전차 종점을 그 정문 앞 대신동으로 이전하여 부산시내 교통의 거점이 되었다. 점차 시가지 형성이 증가함으로서 부산부(釜山府)에서는 시장규칙을 제정하게 되고 대신동에도 시장이 개설됐다. 동대신성당 설립 당시 시장 가운데 자리 잡게 된 것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시장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부산교구에서 21번째 신설본당이었던 동대신성당은 1964년에 서대신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었다. 당시 최재선주교로부터 분가 추진을 위임받은 메리놀회의 임덕(Francis Beninati)신부는 최주교의 주선과 도움으로 고아원이었던 애린원 건물을 1,200만원에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수하고 그해 11월에 첫 미사를 봉헌했다.
본당 주보는 ‘착한 목자’였다. 설정 당시 관할구역은 서대신1가, 동대신1,2가와 부민 부용동 그리고 보수 1,2가 일부였으며 신자 수는 1.153명이었다. 이후 임신부는 8년 동안이나 초창기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본당 발전의 기초를 굳건히 다졌다.
임신부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출생, 뉴욕 메리놀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6월에 사제로 서품됐다. 그 후 이 년 동안 뉴욕본당 주임신부로 재임 후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와 인연을 맺게 됨으로 한국 생활이 시작된다. 충북 진천본당과 서대신성당, 괴정성당의 주임을 거쳐 신설된 동대신 본당의 주임사제로서 그 초석을 다지게 된다.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남몰래 가난한 교우 가정을 돌보기도 한 그는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어린이에게 알맞은 기도문과 성가를 골라 ‘어린이 미사 책’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모든 본당에서 사용하였다.
임신부는 특히 나환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했다. 삼랑진에 음성 나환우 30여 세대가 자활할 수 있는 집과 터전을 마련하고 ‘누가원’을 설립했다. 1970년에는 사하구 장림동 5,000여 평 부지에 사십 여 세대의 나환우들이 양계, 양돈으로 자활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그곳이 ‘계림농장’이며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머무르기도 한다.
본당 사목 후에도 교구 구라사업과 맹인연합회의 지도에 헌신하는 한편, 북방선교에 주력하고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지침에 따라 중국 연변대학에 파견돼 영어교수로 활동하면서 현지 교포들의 영신생활을 돌보기도 했다.
설립 당시 초대 본당회장에 허각 루가를 임명하고 7명의 유급 전교사를 두어 본당 활성화를 도모하게 된다. 본당을 5개 구역 20개 반으로 편성하고 각 신심단체를 조직했는데, 설립 50주년을 맞는 2014년 현재는 10개 구역에 42개 반으로 발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