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 대축일에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과 구별되지만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부르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으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들을 불러내시고, 당신 말씀으로 홍해바다를 가르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만남의 천막 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어 당신의 백성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행동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취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번역된 이 말은 원래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천막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뜻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광야에 머무를 때,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계약의 궤 안에 넣었고 그 궤를 천막 안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막은 만남의 천막이라 불리웠고, 그곳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막은 백성들 가운데에 있었고, 그 천막 주위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솔로몬 임금 때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져 계약의 궤를 성전 안에 모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 제국의 침략으로 성전은 붕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천막 없이 천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이제 우리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중심에 하느님이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천막을 치게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사실이,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이 사실이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 백성들을 해방시키시며 그들을 이끄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우리의 몸이 죽어도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은총이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엄마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와 깨닫지 못한 아이의 삶이 다를 수 밖에 없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슬픔과 절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우리 본당 모든 신자분들이,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우리 예비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 날입니다.


아기의 꿈, 우리의 꿈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지금부터 약 2800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환시를 보고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예언자의 예언처럼 오늘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렇게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이렇게 계십니다. 하느님은 무섭고 두려운 분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예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잠들어 있는 이 아기가 우리와 더불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 아기와 더불어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하고 예언합니다.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는 것, 이사야 예언자가 꿈 속에서 본 것, 그것은 바로 끝없는 평화입니다. 2800년 전 이사야가 꿈에서 보았던 것을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기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 6-8). 이것이 바로 끝없는 평화입니다. 늑대와 양이, 표범과 염소가, 어린 아이와 독사가 서로 친구가 됩니다. 전쟁도, 갈등도, 충돌이 사라집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 아이의 꿈으로 이루어집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온 우주 만물이 화해하고, 모든 생명이 친구가 됩니다. 평화는 우주 만물이 하느님 안에서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평화 안에서는 미움도 녹아버리고, 욕심도 이기심도 사라집니다. 하느님 안에서야말로 우리의 마음도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에서 본 것을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습니다. 오늘밤 잠들어 있는 이 아기의 꿈을 이제 우리가 꿈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 안에서 사는 꿈을 꿉니다. 하느님과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웃과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사소한 것에 미워했던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며 욕심냈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가 꿈꾸기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새로운 용기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우리가 꿈꾸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만 갇혀버리고, 우리 인생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 안에 살고 싶어합니다. 특히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의 이런 꿈이 헛된 바람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오신 이 아기와 함께 꿈꿀 때, 우리의 꿈과 희망은 새로운 현실이 됩니다. 오늘밤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평화의 꿈을 꾸는 날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하루 앞둔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대림시기 동안의 하느님 말씀 전체를 되돌아보고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은 세 명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집중됩니다. 가장 먼저 대림 1주간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묵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강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었지만, 하느님은 새로운 해방과 구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공정과 정의, 끝없는 평화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다윗집 안에서 태어날 한 아기를 통해 당신 계획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합니다.

대림 2주간과 3주간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비추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그의 삶과 선포, 그리고 그의 억울하고도 황망한 죽음은 예수님의 삶을 앞서 보여줍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고, 예수님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었던 요한이 다시 돌아왔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겹쳐져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으며, 그분의 길을 비추어준 예언자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일주일 앞두고, 교회는 마리아에게 집중합니다. 마리아는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에 이어 가장 직접적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와 그 말씀에 순명하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전합니다. 마리아의 모습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마리아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관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복음만이 아니라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넣어서 계속 계속 되새기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가서 마리아의 위대함은 순명입니다. 앞으로 오롯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온갖 수모와 모욕 그리고 온갖 위험과 시련이 너무나 명백히 예상되지만, 그녀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순명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주님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가 하나 더 묵상해보아야 할 것은 이 세명의 위대한 인물을 꿰뚫고 있는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 그리고 하느님의 주도권입니다. 마리아가 동정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철저하게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주도권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듯, 오로지 하느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가 한 아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천사의 말처럼,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리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하느님이 신비 자체이시듯 우리의 삶과 인생 역시 신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경우에는 시련과 고통이 가득한 눈물의 골짜기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경이로움과 기쁨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처지를 맞이하든 그 처지를 우리가 제대로 예견하기 힘들고,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인생은 많은 경우의 우리의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는 무엇 하나 정해진 것, 확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일을 자신할 수 없고, 우리의 어제를 다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면, 내 능력과 노력 이상의 무엇이 우리 삶을 받치고 있음도 깨닫습니다.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과 그 힘을 어렴풋하게 나마 알고 있기에 우리는 그 힘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기원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는 축복을 바랍니다. 오늘날 의 의미가 지나치게 현세적인 것,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되어서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복을 비는 것 자체가 이미 인생을 신비로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가 걸어온 인생에서 나의 노력이나 조건을 넘어선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 짓도록 도와 주신 스승과 같은 분도 있고, 내 노력과 능력 이상의 기회를 맞이한 사건도 있습니다. 그때 그 시련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 에서야 그 시련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그런 사건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일차적으로 나의 것이지만, 그것이 오로지 내가 이룬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나를 지탱해주고 이끌어주었던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이 아주 오래전의 일 일수도, 비교적 최근의 일 일수도 있겠지만, 그 손길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있고, 나를 이끌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경이로움과 신비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신의 삶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감사를 드릴 만한 여유와 여건이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우리를 덮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한다고 하여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운명을 탓하고 불행을 탓한다고 우리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하고, 감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기도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결국 참다운 신앙에서 나옵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에, 나를 이끌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에,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회개, 새로운 방향의 모색

우리의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됩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길들이 놓여져 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길들을 지나쳐서 하나의 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길이나 그 길에 들어서는 초입구에서는 그 길의 마지막 도착지를 알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낯선 도로에서나 등산길에서 우리는 이정표나 안내표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생은 길을 잘 못 들거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새로 시작할 수도 없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 2주일에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기 전에 그 분께 이르는 길을 새로운 예언자가 마련할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마지막 예언자가 주님께로 가는 큰 길을 마련할 것이고, 굽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곧게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온 유다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헤맨 장소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시련을 겪습니다. 빵도 없고 물도 없었으며,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오던 길이 끊어진 곳이며 갈 길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길이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광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보고, 갈 길을 다시 찾아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한편으로는 시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고, 그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광야로 이끕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회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회개는 방향을 바꾸고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 삶의 방향과 가치,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가 생각하는 방식 모두를 다시 재검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내가 걷고 있는 이 인생의 길이 올바른 방향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오실 주님께 다가서기 위해 광야를 거쳐갈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일 중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우리 인생의 길을 다시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거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길을 들어서 버리면 길을 바꾸기 힘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향하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여태 걸어온 길을 새롭게 점검할 수 있도록 우리도 광야에서 잠시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광야에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청하며 오늘 우리들의 미사를 봉헌합니다.


대림의 의미

오늘부터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대림시기로 시작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오실 것,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2000년 전에 이미 오신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들에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기다림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다림은 그냥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일이며 적극적인 일입니다. 열 두세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기다리는 것과 시험을 앞두거나 결혼을 앞둔 사람의 기다림이 같을 수 없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이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때가 찼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하고 말합니다. “때가 차다는 말은 연속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완료되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준비되고 채워졌음을 뜻합니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은 인간의 간절함이 최고로 높아지고, 하느님의 계획이 현실로 바뀔 준비가 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대림시기 동안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앞으로 20일이 지나면 다가올 그 날, 작년에도 있었고 내년에도 있을 달력 위의 1225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고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대림시기의 첫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있는 것은 단순히 잠들지 않은 것과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농부가 잠자고 있을 때도 곡식이 자라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어도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이웃이 큰 불행을 당하여 고통 속에 있는데, ‘나는 몰랐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깨어있는 것은 온 만물의 소리와 움직임을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움직임부터 시작해서 이웃의 마음, 자연 속에서 속삭이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오심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준비하고 기다립시다. 또한 깨어있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느끼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바람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

마태오 25, 31-46/ 2023. 11. 26.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번 주간을 마지막으로 교회 전례는 연중시기를 끝맺고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로 들어갑니다. 연중시기를 끝내며 교회는 다시 한번 더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의 임금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메시아이며 왕이시라고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이런 고백과 선포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표현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고 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고, 결국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도 이런 오해의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왔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복음 선포를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 하느님의 치유와 용서와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시며,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며,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며 하느님의 구원이 다가왔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예수님이 이 되려고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나라가 오면 자신들을 제일 앞 자리에, 좋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의 청원에 예수님의 대답은 가장 작은 이, 가장 낮은 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했고, 그들의 마음 안에는 사실상 예수님이 주시는 빵과 건강과 힘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숨어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예수님이 왕이 되려고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들의 오해는 결국 십자가 위의 죄명패 유다의 왕 나자렛 예수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왕이 되려고 했다는 혐의를 쓰고, 로마 총독에 의해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이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모든 이들이 빵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족쇄에서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가장 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이들의 자리에, 가장 아픈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보여주셨고, 빵과 권력과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다운 행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이 바로 당신의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죽음에 이르는 헌신의 삶으로 참다운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왕이십니다. 빵과 권력과 명예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왕이 아니라, 연민과 약함과 헌신의 힘을 행사하시는 왕이십니다. 더 많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집착과 아집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왕이십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참다운 자유를 얻고, 또 다른 행복을 맞보며, 하느님 앞에서 참다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온 누리의 참다운 왕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번 묵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바리사이의 위선

마태오 23, 1-12/ 2023. 11. 5. 연중 제31주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태도를 나무라십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학자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 사회는 율법에 의해 돌아가는 체제였으니 율법학자는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바리사이 운동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 운동은 율법 해석의 한 전통으로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지킬 때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종파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지킴으로써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분리된 사람들또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 스스로 분리된 사람들이라고 여겼으므로, 그들의 행동과 말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다는 의식이 가득찬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스승이라고 여겼으며,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들었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태도와 자세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면,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깊숙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나는 네 하고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경계를 긋고, 다른 사람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선택하는 옷과 자동차,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 우리가 좋아하는 취향과 선택 뒤에 타인과 나를 구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신앙과 영성의 영역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를 영적 세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앙과 교회에 봉사하면서도 마음 안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세속성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큰 의식없이 하는 많은 말과 행동이 실상은 타인과 나를 구별짓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바리사이들이 숨어있고,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상 우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반대로 주님께서는 섬기는 마음, 낮은 마음이야말로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진실로 건강하게,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가꾸어야 합니다. 특히나 하느님 앞에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존중받는 것은 실로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갈고 가꾸어서 자기 자신의 참다운 모습, 하느님이 주시는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낮은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열고, 이웃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길이고, 동시에 신앙이 가르치는 참 행복과 진리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과 신앙적 깨달음은 바로 낮은 마음, 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주님께 낮은 마음과 섬기는 마음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랑의 이중 계명

마태오 22, 34-40/ 2023. 10. 29. 연중 제30주일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 즉 구약성경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명료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계명은 서로를 비추어 주며,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를 통해 완성됩니다.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은 사랑은 내용도 없고 알맹이가 없습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것은 맹목적입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사랑은 쉽게 부패하고 쉽게 사라집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향해 있을 때 온전히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랑은 너무 쉽게 부패합니다. 사랑은 너무 쉽게 소유욕, 지배욕, 질투와 뒤섞이고 너무 쉽게 변해버립니다. 말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집착과 애착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놓으면 너무 쉽게 욕망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교회와 신앙을 위해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마음에서 시작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위한 일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하고 성찰도 분별도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 쓰촨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너진 폐허 속에서 한 여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품 안에는 아기 한 명이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는 그 아기를 품고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이렇게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자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에는 절제와 성찰도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엄청난 용기도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또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독점하려고 하고, 참고 견디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그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이웃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를 포기하여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결심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초대받은 사람들

마태오 22,1-14/ 2023. 10. 15. 연중 제28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오늘날엔 약간 빛 바래긴 했지만, 특히나 농경사회에서 잔치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드러냅니다. 더욱이 혼인 잔치야말로 잔치 중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기쁨과 풍요가 혼인 잔치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느님의 구원을 잔치에 비유합니다.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초대와 우리의 응답에 대해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혼인 잔치에 임금은 두 번에 걸쳐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첫번째는 임금이 마음 속으로 선택한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도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일을 위해서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갔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임금의 종들을 붙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임금의 첫번째 초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택하고 부르셨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의 초대를 완전히 거부한 것입니다.

임금의 두 번째 초대는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잔치에 초대됩니다. 악인이나 선인도 구별없이 초대됩니다. 모두가 초대받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나게 됩니다. 임금의 두번째 초대는 주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부르심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부르심에는 민족의 경계도, 죄인이나 의인이나 구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맞는 합당한 준비를 갖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구원의 역사와 그 계획을 밝혀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좀 더 묵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당신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잔치는 우리 일상의 단조로움과 고달픔을 넘어서는 기쁨입니다. 우리 삶의 풍요로움과 기쁨이 하느님의 잔치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합니다. 밭으로 가거나 장사를 하러 갑니다. 우리는 삶의 풍요가 마치도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물건을 팔아 남기는 이윤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풍요와 기쁨은 온전히 자기 노력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강박이 우리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여기면,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기 힘들어 집니다. 우리 삶의 풍요와 기쁨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 잔치에서 삶의 기쁨과 풍요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예복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우리는 신앙으로 응답해야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우리 각자는 각자 나름의 예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주지만, 또 다른 한편 우리가 하느님께 초대받을 때 입을 예복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질문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갖출 예복이 어떤 것인지 함께 묵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루카 1, 26-38/ 2032. 10. 8. 부산교구 수호자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늘은 우리 부산교구의 수호자이신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삶과 고통, 그 일생의 순간 순간을 기념하는 여러 축일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맞는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각별한 축일입니다.

실상 이 축일의 시작이 그러했습니다. 16세기 이슬람 세력이 유럽을 침공했고, 유럽의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바다에서 이슬람 세력에 맞섰습니다. 이 레판토 해전에서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 비오 5세 교황은 이 승리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축일의 위기에 빠지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기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7년에 부산대목구로 시작한 부산교구 역시 어려움 가운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0여개 남짓한 본당, 부산과 경남을 통틀어 1만명도 되지 않는 신자들이 전부였습니다. 초대 교구장 최재선 주교님께서는 우리 교구를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봉헌하고, 모든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날 부산교구는 130여 개의 본당을 가진 큰 교구로 성장을 했습니다. 이렇듯 성모님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도와주시는 분이시고, 특별히 묵주기도는 어려움에 있는 이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청원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는 주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바치는 50번의 성모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시작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세마디의 인사말은 그리스도인이 선물로 받는 은총과 기쁨, 힘과 용기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음,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기쁨이고 힘이고 용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도 부산교구의 성장도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의 결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렇게 묵주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삶에 지친 이들이 안식을 얻고, 묵주기도 안에서 희망이 무너진 이들이 위안을 얻으며, 묵주기도 안에서 길을 잃고 넘어진 이들이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동반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부산교구의 수호자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지내며, 우리 교구와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모든 신자들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일어서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두 아들의 비유

마태오 21, 28-32/ 2023. 10. 1. 연중 제26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주인의 말에, 큰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지만 막상 일하러 나갔고,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는 누구인지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 같지만 실상 실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언뜻 보기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지만 실상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될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뿐 아니라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창녀와 세리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접합니다. 세리는 로마에 협력하여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고 창녀는 윤리적 타락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사회적 낙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죄인으로 생각했고, 그러기에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하고 또 청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결국 죄인은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죄인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깨닫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기대는 사람입니다. 결국 죄인은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인간의 실존과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가난한 사람이 물질을 적게 소유하고 결핍 상태에 있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듯, 복음이 말하는 죄인 역시 하느님 앞에 서있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갑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이끌어 줍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응답은 자기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자기 입으로 배우자를 평생 사랑하겠노라 고백하면서 혼인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고백은 시작입니다. 그 응답이 입술에서만 머문다면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내 삶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내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 말고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 하느님 자비 말고는 어떤 것에도 기댈 데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과 한계과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더 나가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기대고 청하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느님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포도밭 주인과 일꾼들

마태오 20, 1-16/ 2023. 9. 24. 연중 제25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시작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고, 우리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묵상해볼 점은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일꾼에게도 오후 늦게 일한 일꾼에게도 똑같이 그들이 먹고 살기에 필요한 만큼의 삯을 줍니다. 포도밭 주인이 주는 품삯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정의롭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품삯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나의 능력과 자질, 내가 이룬 성과와 결과를 넘어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때문에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 비유는 인간의 모습, 즉 우리의 모습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비유에서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들은 처음 포도밭에 불려올 때 주인과 약속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늦게 온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들이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질투와 시기를 유발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자기 삶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총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그럼으로써 유혹에 넘어집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깨달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서 필요한 은총을 필요한 만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을 넘어서는 풍요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욱 겸손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참다운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리고, 우리의 못난 모습을 성찰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우리 삶의 새로운 풍요로움과 참다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선교사보다 먼저 오시는 하느님

2023. 9. 1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원래 연중 제25주일이지만, 한국교회는 9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을 오늘로 옮겨서 지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포함한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을 기억하고 공경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하나에 대해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대개 선교사가 그 지역에 가서 군주와 귀족들에게 세례를 주고 점차로 그 영향이 아래로 퍼져갑니다. 독일 지역에는 성 보니파시오가, 아일랜드에는 성 파트리시오와 성 콜롬바노가 그러했습니다. 많은 경우 위에서 시작되어 아래로 내려오는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평신도로 시작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선교였습니다. 지금부터 230여년 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니던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이태리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풀이하자면 하느님의 참다운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 도교의 개념을 빌어서 하느님과 천주교에 대해 설명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학자들이 돌려 읽고 토론하면서 한국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승훈, 이벽, 정약전, 그리고 처음에는 이 모임에 참여하다가 나중에는 빠져버린 정약용 등입니다. 이들 중 이승훈이 가장 먼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옵니다. 이들이 책을 읽으며 함께 공부한 곳이 지금의 경기도 미리내로 알려져 있고,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공동체를 형성한 곳이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회이며,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입니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의 가르침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형제 자매로 불리웠으며,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에게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당시에 제대로된 이름조차 없던 여성들에게, 비록 외국 이름으로 지어진 세례명이긴 하지만 모든 여성에게도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표면적으로 제사 문제였지만, 당시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네 차례의 큰 박해를 당했고, 수많은 순교자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희생 위에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 없이, 그리고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곰곰히 묵상해보면,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교사가 이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우리 민족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진리를 찾고 정의를 실현할 마음을 이미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시작할 때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누구보다도 먼저 와 계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이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갑니다. 겉으로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는 달리 현대인의 내면은 그 이전 어느 때보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외면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삶의 위안을 찾으려 하고 의지할 곳을 찾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실 선교사보다 그들에게 먼저 와 계십니다. 내가 그 이웃에게 다가서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그 이웃의 마음 속에 와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내 이웃의 마음 안에 하느님이 이미 와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모두가 선조들을 본받아 자발적인 선교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이웃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갈망하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이자 위로라는 사실을 이웃에게 전해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모아,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화해

마태오 18, 15-20/ 2023. 9. 10. 연중 제23주일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모두가 비슷비슷하고 공통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고, 또한 사도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서 나온 것이니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는 각각의 특징도 있고 각각의 성격도 뚜렷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 복음서는 교리교사의 복음서라고 일컬어 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말하는 큰 주제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산상설교 또는 진복팔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어떻게 화해하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참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화해하고 그를 용서해주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고, 화해하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와 화해를 쉽게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군가가 공동체의 형제 자매에게 잘못을 했으면, 가서 그와 만나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단둘이 만나서 안되면, 두세 사람이 함께 가야 하고, 그것도 안되면 공동체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고 여러 번의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잘못한 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를 만나야 하며, 그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과정을 포기해 버립니다. 더구나 그와 만나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뒷담화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단둘이 만나고, 그와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사람과 화해하여, 우리가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뒷담화는 그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런 뜻에서 언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하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벌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 성당 공동체 역시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교우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대로 험담하거나 뒷담화보다는 서로 만나 대화하고 이해함으로써 화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화해와 용서, 우리의 기도와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달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좋은 형제 자매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걸림돌

마태오 16, 21-27/ 2023. 9. 3. 연중 제22주일

지난 주일 복음을 잠시 되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바위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아직 부활에 대해 깨닫지 못한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방금 전에 베드로에게 바위라고, 반석이라고, 그래서 주님께서 세울 교회의 디딤돌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이제 베드로에게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딤돌이자 동시에 걸림돌, 이게 베드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고자 했습니다. 효녀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바다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은 그냥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청의 죽음이 아버지의 눈을 살린 것처럼, 주님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우리도 주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고, 우리가 짊어지는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고 하지만, 실상 그 시련과 고통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만납니다. 십자가를 피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만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고통과 죽음의 신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탄이라고 걸림돌이라고 주님께 야단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실상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강한 듯하지만 약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지만 동시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도 하며 배신하기도 합니다. 디딤돌이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 베드로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바로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 사도와 같이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든 십자가를 피해서 기쁨과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걸림돌이지만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마태오 16,13-20/ 2023. 8. 27. 연중 제21주일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의 대답이자 신앙고백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천명하십니다. 물론 교회라는 인간 공동체가 역사 안에 등장한 것은 주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강림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계획과 의도 안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뚜렷이 드러나듯이,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처음부터 사도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의 네 가지 본질적 특성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는 거룩합니다, 거룩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라고 하는 인간의 공동체는 현실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옳지 않은 판단도 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이기에 현실적으로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렇게 인간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시듯, 교회 역시 인간적인 동시에 영적인 하느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지상의 교회, 인간의 공동체, 죄많은 공동체는 천상 교회인 영적인 교회를 향해 길을 걷는 순례자이자 나그네입니다. 교회 역시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교회, 주님의 몸인 교회는 언제나 거룩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교회가 역사적으로 여러 개의 교회로 갈라져 있지만 교회는 본성상 하나이고,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은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민족이나 언어나 인종에 따라 갈라질 수 없으며,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이고, 당감성당은 당감동 지역에 있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너는 바위이다. 이제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를 바위 삼아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며, 동시에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을 베드로 사도가 행한 것처럼,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이 행한 것을 오늘 교회는 행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또한 사도들의 교회이고, 사도들의 증언과 전통, 사도들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어떤 경우에는 교회 때문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교회는 현실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 안에 교회의 영적 본질, 주님의 교회가 살아있습니다. 주님의 의도와 지향을 잊지 않고 새롭게 되새길 때,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더욱 주님 교회답게 살 수 있도록, 더욱 더 하나되고, 더욱 더 거룩해지며, 더 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모습을 간직하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오 15, 21-28/ 2023. 8. 20. 연중 제20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방인 여인과의 만남에 대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으로 옮겨 가셨고, 거기서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간절하게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처음에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도 못들은 척하셨고, 나중에는 예수님 당신 사명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는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여 자녀들의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끈질기고도 간절한 간청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시고, 그 여인의 큰 믿음을 칭송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첫째는 왜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이방인을 에 비유하며 이방인 여인의 청을 거절했을까, 둘째로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꾼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복음에 앞선 부분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지역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만, 유다인들과 계속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앞선 부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유다인의 전통과 관습을 어겨서 다시 한번 유다인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전통이 하느님의 계명을 가로막고 있다고 한탄하시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에 이어서, 오늘 복음은 곧바로 에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으로 가셨다고 전합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 민족을 가르는 경계와 담에 부딪치셨는데, 바로 그러한 경계 너머에서 딸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한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탁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 여인이 지역으로 보나, 민족으로 보나, 그리고 종교로 보나, 유다 민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시키고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관습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다인과 예수님만을 믿고 간청하는 이방인 가운데 누가 참 신앙인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과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이방인 여인처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으며 온전히 의탁하고 있는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태도와 마음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방인 여인은 지역, 민족, 종교를 넘어서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의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없다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그녀의 청원을 예수님을 거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녀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청원은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간절하고도 끊임없는 기도야 말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합니다.

실상 유대인인지 아닌지, 이방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일을 넘어서고, 하느님의 마음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간절한 마음과 온전한 의탁입니다. 오늘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주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으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

루카 1, 39-56/ 2023. 8. 15. 성모 승천 대축일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만큼 사랑받고 공경받는 성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이나 위치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성인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호칭을 성모 마리아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바다의 별, 상지의 옥좌 등 성경 안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의 교리를 통해서, 또는 마리아께 기도하면서 받은 특별한 체험과 은총을 통해 마리아의 호칭이 나오게 됩니다. 마리아의 많은 호칭 가운데, “영원한 도움이라는 호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호칭은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그려진 성모님의 이콘 성화의 이름입니다. 15세기에 로마의 상인에 의해 로마로 옮겨지게 되었고, 지금은 로마의 구속주 수도회의 성당인 성 알폰소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성화를 가지고 온 상인은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 성화를 주었고, 그 친구의 딸의 꿈 속에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영원한 도움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이 성화를 보며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많은 도움과 은총을 베푸셨다고 합니다. 사실 복음서의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해 보면, 성경에 나오는 성모님께 이 호칭,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가장 큰 협력자요 도움이었고, 예수님에게도 큰 도움이 된 분이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도 도움이 되신 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자면,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도움없이는 주님의 탄생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순명과 결단으로 하느님의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도 성모님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뒤바라지를 묵묵히 하셨습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여러 구절에서 성모님과 여러 여인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뒷바라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8장을 보면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24장에서 예수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성모님이 사도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활동했으며, 사도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이러한 도움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집니다. 참으로 성모님은 영원한 도움이십니다.

오늘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에 오르셨음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참다운 신앙인의 마지막 운명을 보여 줍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 안에 하느님 곁에 머물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이 여정 가운데, 이미 하느님 곁에 계시는 성모님이 우리 신앙인에게 영원한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 중에도 성모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고, 어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마지막 날에 성모님처럼 하느님 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영원한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 모두를 오늘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 드립니다. 성모님이 우리의 영원한 도움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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