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주님의 부활 대축일 이후의 미사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다음으로 주님의 사도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주님을 만난 사실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도 그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티베리아스 호수가에서 일곱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역시, 엠마로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의 공통된 체험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체험을 묵상해보면, 우리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사건과 체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랬으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곱명의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쉽사리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또는 어떤 느낌과 체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삶에 동반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 일상 가운데 나와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셨고, 내가 슬플 때 위로해 주셨으며, 내 삶이 헝틀어졌을 때 나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부였던 제자들이 더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시작하도록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일상 안에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제자들이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바로 빵을 나눌 때였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아침 식사를 할 때 가장 뚜렷하게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성목요일 밤 빵을 나누어 주시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이 만남과 체험은 성체성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가장 뚜렷하게 현존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노력으로 성체성사에 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식사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는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나서 나를 따라라하고 명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초대하시고, 새로운 사명으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사명으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우리가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망설이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더욱 기쁜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물

오늘은 원래 부활 제2주일이지만, 우리 교구 모든 본당에서는 교황님의 추모 미사로 봉헌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고 또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독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 사도가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구절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승리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어느 교황님이 자신의 고백 신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일으키는데, 왜 자신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데도 불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고백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도 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후계자는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권력도 있지요.”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신자들에게 강복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먼저 청했습니다. 그분은 이기고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와 만날 때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고, 어떤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할 때도 종교적 교리를 놓고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대변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가 지구의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상처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이야말로 참다운 권위였고, 그분의 듣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외침이 되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고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황님은 미국 정부와 이태리 정부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민과 난민 문제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정부를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2016년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계속 세월호 뺏지를 달고 계시자 옆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뺏지를 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이렇게 교황님은 금과 은이나 또 다른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 직무 역시 역사의 한페이지가 되었습니다.

교황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교황의 죽음 이후는 교회의 방향을 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콘클라베라고 부르는 이 절차를 통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됩니다. 새로 선출되는 교황 역시 개인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모미사를 봉헌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느님의 크신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전날, 다시 말해, 금요일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다행히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 예수님은 무덤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유다인들의 축제이자 안식일에는 율법에 의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간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알립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맨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고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십니다. 주님을 보고서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 될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녀가 보고 느끼며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속가>에서도 말합니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으로 우리도 주님의 빈 무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 주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안식일 율법이 해제되는 가장 빠른 시간에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와 무덤 곁에 머물면서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동참했던 이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체험한 이에게 부활은 현실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무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본 이들에게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고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하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가고 무덤을 지키며 무덤을 대면할 수 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각자의 무덤을 찾아가고 그 무덤 끝까지 들어가며, 자기 무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내 인생을 가로막던 돌, 나를 억압하던 돌, 나를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았던 그 돌을 치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용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을 찾아간 시간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하고 제자들 역시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의미도 온전히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히 날이 밝으면, 온전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의 부활도 우리 인생의 의미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상처 앞에 머무르며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새롭게 이해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머무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로 우리 역시 우리 상처와 아픔을 딛고 우리의 무덤을 열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우리 삶의 파스카

탈출기 12장을 보면,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봄이 시작되는 때에 맞춰 새해를 시작하고, 새해 첫 달을 닛산 달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닛산 달의 열 나흘째에 파스카 축제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달력으로 계산하면, 닛산 달은 춘분에 시작합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되면 파스카 축제가 시작됩니다. 올해 춘분이 3 20일이었고,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이 바로 지난 주 토요일 4 12, 음력으로 3 15일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난 토요일 밤부터 보낸 한주간, 성주간이 바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기간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원래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해 주신 사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이 축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이 이집트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셨을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재앙이 자신들을 건너가고 넘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파스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파스카 축제 기간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내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했던 어린양의 죽음과도 같은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당신 백성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스카 기간의 금요일,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봉헌하는 그 시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넘어가도록 스스로 피를 쏟으신 파스카 어린양이시며, 당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건너가신 파스카 자체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너갔던 그 밤,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빛의 예식을 통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며 그 밤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시는지 읽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하여 오늘밤은 세번째 파스카의 밤, 우리들의 파스카입니다.

오늘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넘어서 희망과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부활이 숨어 있었듯이,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 우리의 부활이 숨어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오늘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합니다. 바로 오늘밤에 우리의 삶이 주님의 평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밤이야말로 우리들의 파스카 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소개합니다. 이 말 자체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양희생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이란 공동체가 어떤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뜻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희생양은 공동체 전제의 집단적인 회개와 속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의 날에 염소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공동체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광야로 내쫓았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동성애자를 박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쟁과 민족적 우월성을 정당화하고자 했고, 일제 제국주의는 관동대지진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몰아서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희생양은 공동체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인간 내면에는 소수의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양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수난기에서도 대사제 카야파의 말이 언급됩니다. 카야파는 유다인들에게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습니다. 백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희생양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린양파스카 어린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하기 전, 죽음의 재앙이 이집트 전역을 덮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집 문설주에 바릅니다.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고,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때 속죄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을 잡는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파스카 어린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 말은 첫째로 예수님은 희생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 때문에, 모두의 죄를 뒤집어쓰고,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희생양이십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이요, 우리의 생명을 위한 죽음,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식을 정성껏 봉헌합시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네 복음서 모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최후 만찬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에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최후 만찬이야말로 예수님 삶과 사명의 핵심이자 종합이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산이자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당신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최후 만찬의 의미, 다시 말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헌신과 봉사의 모습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 최후 만찬 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당신 죽음의 피라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 바로 당신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계약입니다. 사실 성경의 이름도 계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계약을 뜻하고, 신약은 새 계약을 뜻합니다. 계약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이 계약은 탈출기 24장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소를 잡아서 하느님께 바치고,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백성에게 뿌립니다. 이 계약을 통해,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를 섬기는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기도 했고, 하느님 보다는 세속의 기회를 쫓아 살았습니다. 실상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계약에 충실한 분이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계약의 제물이 되고 계약의 증거가 되고자 했습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듯이, 예수님 스스로 당신 피를 하느님의 제단에 그리고 백성에게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최후 만찬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어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당신의 피를 쏟아서 하느님과 백성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만찬을 영원히 거행하여,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화해와 결합을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과 백성이 맺는 새로운 계약이며, 그 계약을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영원히 기억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직전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이며 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산과 유언을 매일 매일 미사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만찬 미사의 의미와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첫번째 성 목요일 밤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합니다. 오늘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님의 일생은 기껏해야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에 있었던 일 뿐입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이며, 오늘부터 우리가 그 여정을 따라 걷게 될 첫번째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 축제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데, 맨 마지막 토요일 안식일을 마치면 끝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때에 이집트 노예생활과 광야 생활을 되새기며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계약이며, 이 파스카 식사가 바로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식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번째 성목요일의 주님의 만찬을 우리는 성목요일 밤 주님 만찬 미사로 재현합니다.

파스카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유다 최고의회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십니다. 최고의회로 끌려가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유다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스카 축제를 위한 어린양을 잡는 시간인 오후 세시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오후 세시에 주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이고, 성금요일 저녁에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수난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당일인 토요일은 안식일이기에 아무도 무덤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토요일이 끝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날부터 예수님께서는 여인들과 사도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시고,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토요일밤 우리는 주님부활 파스카 성야미사를 봉헌합니다.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첫번째 파스카,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두번째 파스카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우리들의 파스카를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함께 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명의 절정의 여정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에 동반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고,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부활의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여정의 시작,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묵상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한 지 묻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였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죄와 율법, 구체적인 한 죄인에 대한 태도 등 여러 관점과 태도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이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이 이 여인을 끌고 온 진짜 이유는 율법을 어긴 이 여인을 벌하고, 이 여인의 비윤리적 행위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진짜 의도는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욕망을 단죄함으로써 자신들의 숨겨진 의도와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성찰해 봐야 할 점은,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숨겨진 의도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도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와 역사 안에서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소수 민족, 동성애자, 집시들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를 조장하였고,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특정한 이웃을 지나치게 미워하거나, 이웃을 배제시키고자 하거나, 이웃을 지나치게 모욕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리 자신들은 바리사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숨은 욕망은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의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지 우리 자신과 대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하듯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웃을 손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죄 지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 여인에 대한 태도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단죄하거나 이 여인의 죄의 크기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인의 미래를 신뢰해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이웃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 속에는 우리 자신의 더 큰 욕망이 숨어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실상 이웃을 단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을 때, 주님 역시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믿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우리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자비로운 아버지

오늘 복음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로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신의 몫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몫이 바닥이 나자,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고,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자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전혀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다고 여기며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 곁에 있었던 큰아들은 동생도 못마땅했지만, 그 동생을 너무나 기쁘게 맞이해주시는 아버지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시며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더 명확하게, 어떤 설교나 강의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넓고도 크신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작은아들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입고 있는 모든 옷을 벗고 나서야,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나서야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나서야,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고, 아버지를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 매달립니다.

큰아들의 모습 역시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큰아들이 화가 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화는 아버지를 향해 쏟아부어 집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동생보다 아버지께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많이 사랑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자기 몫을 요구한 셈입니다. 시기와 질투,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역시 큰아들의 마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큰아들은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실상은 작은아들처럼 아버지를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아버지께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고, 두 아들 모두를 아버지의 잔치로 데려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이 잔치에 함께 하여 즐기고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을 다시 되돌아 보고, 동시에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의 마음에 의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느님의 이름

오늘 제1독서 탈출기 3장의 말씀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고통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이 체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원초적인 하느님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느님 체험과 그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을 되새기도록 합니다. 오늘 특별히 하느님의 이름 야훼와 그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입니다. 더 단순하게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이름은 나는 나다입니다. 이 이름의 첫번째 의미는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존재하며, 주변의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그냥 그분일 뿐, 어떤 인간의 말과 생각도 그분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와 사유 너머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당신이 말하시는 그대로 그냥 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말로 바로 야훼입니다. ‘야훼라는 말뜻이 그냥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이름을, 하느님이 당신 자신이 야훼라고 밝혀 주신 부분이 구약성경에서 세 차례 등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자신들에 입에 올리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름을 말해야 할 때, 야훼 대신에 히브리어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진한 고딕체 글짜로 주님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바로 아도나이, 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께만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바로 야훼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바로 야훼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게 체험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체험 하나는 예수님이 어두운 밤에 풍랑이 이는 호수가를 걸어오신 사건입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을 보면,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치도 모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듯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는 곧 있는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던 토마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느님과 같은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예수님 역시 하느님과 같으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기도 중에 변모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십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늘 조용한 장소로 피해 가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시고,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묵상해 볼 점은,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도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도하면서 극복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어떤 고통과 역경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가슴이 찢어질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힘과 용기를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겐 기도야말로 힘이자 용기입니다. 우리 역시 고통과 시련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께서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서 조용한 장소를 찾으십니다. 신앙인 역시 중요한 결정 앞에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고, 지나치게 TV나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한발 물러서야 합니다. 온갖 소음을 피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하느님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깊은 기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 하느님이 주신 원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당신께 사랑받는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변모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시기의 두 번째 주간을 맞습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내면에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줄여야 합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에라도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야 말로 우리의 힘이자 용기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참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산에 올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스스로 광야로 나가고 산으로 올라가 주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은총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번잡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우리 스스로 기도하기를 결심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유혹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에 앞서, 성령이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사십일을 기도하며 지냈는데, 그 기간 중에 악마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빵의 유혹,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 그리고 인정받고 능력과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이 광야에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당신 삶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 유혹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빵의 유혹입니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유혹입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거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악마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 역시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빵의 기적 이후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피해서 그들에게서 거리를 둡니다. 공간적으로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시고, 시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그 유혹을 피해 가십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잠시만 눈을 감으면 물질적 이익이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바로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삶 가운데, 특별히 당신 수난 중에 되풀이되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리셨을 때(마태오 27, 39-),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곧이어 율법학자와 수석 사제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지 않았고 십자가 위에서도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고, 또 그것들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이웃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때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인정받고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유혹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인간의 불안하고도 온전하지 못한 조건 그리고 인간의 존재 깊이 숨겨진 욕망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유혹받고 있음을 깊이 깨닫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며 욕망을 감추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다가오는 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깨달을수록,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광야에 서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순시기야말로 우리 삶의 전환을 이룰 기회이고, 우리 삶의 광야입니다.

오늘 내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넘어가는 유혹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유혹에 맞서 싸울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의 말, 하느님의 말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단지 말한 것을 너머서서 그 마음을 전해주며, 그 말의 뿌리를 드러내 준다는 뜻입니다. 1독서 역시 사람의 말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낸다고 전해주며, 말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실상 사람의 말은 입에서 발설되는 그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어떤 사실을 전달하거나 서로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러기에 아픈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은 그 사람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넘어진 이에게 건네는 격려의 말은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과의 말은 화해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사람의 말은 사람을 바꾸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말은 힘이 셉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하시니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는 이의 귀가 열렸습니다. “일어서라하시니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자 마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간음한 여인이 용서와 치유를 받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어 내며, 사람들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아픈 이들을 치유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 문 곁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며 일어서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병자들을 치유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통을 받아서 오늘 교회 역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백성에게 용서와 치유, 생명과 평화를 건네줍니다. 교회는 미사 안에서 사제의 입으로 발설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고, 당신 몸의 생명을 나누어 줍니다. 교회는 일곱 성사 안에서 사제를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당신 백성에게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을 전달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 말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가 현실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일곱 성사를 통해서, 사제의 입을 통해서 발설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자 각자의 기도와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새롭게 발설되고, 그 말씀은 신자 안에서 활동하고 효력을 발생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고 용서하며,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고, 예수님이 내뱉으신 그 말씀이 교회와 우리 자신의 입을 통해 다시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이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말의 신비이자 성사의 신비입니다.

오늘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세상 모든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 역시 이 연결망 안에서, 다시 말해서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별히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은 이웃 인간과의 관계, 자연 만물과의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나의 행동 하나도 개인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자연 만물에 그리고 하느님께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는 관계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나 코로나19와 같은 질병 역시 우리가 자연 만물을 착취하고 파괴한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웃에게 내뱉은 말 한마디 역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고스란히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관계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빛입니다.

불교 전통 안에서도 비슷한 통찰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인과 연으로 묶여져 있고, 지금 나에게 생기는 일들은 업보, 다시 말해서 과거 인연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과거 행동의 결과대로 오늘을 살아가고, 인간은 어제 이웃에게 한 것은 오늘 고스란히 되돌려 받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주는 깨달음 그리고 불교의 종교 전통이 주는 통찰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그리스도교 교리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연결시키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인간의 관계망 안에서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내가 상대방을 원수로 대하면, 상대방 역시 나를 원수로 대할 것이고 이 관계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할 수 있다면,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잘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악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한다고 원수의 태도가 즉각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태도와 진심은 관계 안에서 돌고 돌아 나에게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그냥 그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살아있고, 오늘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우리의 삶에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오늘 내가 참고 견디며 사랑하는 것이 당장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설령 나의 진심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과 갖는 관계 그리고 자연 만물과 갖는 관계의 가장 밑바닥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심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받아 주실 것이고 하느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이 말합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진심과 사랑의 행위는 이웃을 통해서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진실을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상식이나 통념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우리가 찾는 행복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가치가 참으로 인간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고 계십니다. 풍요로운 삶, 안락한 삶, 걱정 없는 삶, 남 보기 부러울 것 없는 삶이 곧바로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나 가치 있는 삶과 같은 말도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자 합니다. 가난과 풍요를 가르는 근본적인 잣대에서 우리가 자유롭고 해방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잣대에서 해방되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참다운 행복을 찾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용기 있게 참다운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지금 부유하고 웃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삶이 주는 위험도 깨달어야 하고, 안락한 삶이 주는 유혹도 경계해서 합니다. 삶의 물질적인 조건이 우리가 인간적 품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지나친 물질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인간의 마음과 얼굴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쌓아놓은 것이 곧바로 행복의 조건도 아니고, 인생의 성공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고 울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불행은 아니요, 지금 부유하고 웃는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깊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더욱 더 깊이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용기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주님께 신뢰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

오늘 두번째 독서인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보면, 여러 차례 “복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해 받았고, 또한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음을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바오로 사도가 전해받았고 또 전해준 복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이란 그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good news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소식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된 것은 예수님이 이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공적 활동의 시작 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 앞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악령을 쫓아내며 아픈 이들을 치유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복음이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복된 소식, 복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용법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해 받았고, 그 복음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다름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연결해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우리 자신들에게 실현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믿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르코 복음사가의 마르코 복음의 제일 첫 구절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여 복음의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주님의 봉헌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은 태어난 지 여드렛날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후에 성전에 봉헌됩니다. 성탄대축일 40일 후에 교회는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여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그리고 이 축일에 교회는 전통대로 성전의 제대에서, 그리고 각 가정에서 기도할 때 사용될 초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과 마리아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던 제물, 비둘기 한 쌍을 봉헌 제물로 바칩니다. 그리고 이 제물은 성전에서 태워져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봉헌의 핵심은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제사는 제물을 태워버립니다. 짐승이건 곡식이건 제사를 위한 제물이 되면 모두 태워 없애 버립니다. 오늘날의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용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손에 닿지 않고, 더 이상 인간이 사용할 수 없도록,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봉헌의 핵심은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이라도 한낱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태워버림의 핵심은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의 시간, 나의 노력, 내 영역의 모든 것을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한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역시 완전한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포기이고 봉헌입니다. 더 나가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태워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이러한 봉헌, 자기 포기의 가장 가까운 예를 오늘 우리가 함께 축복하고 교회에 봉헌하는 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다른 이들을 비추어 줍니다. 이것이 자기 포기이고 봉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축일의 정신대로 봉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시간, 내 노력, 내 마음, 내 자존심, 이 모두를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작은 봉헌들이 모여서 우리 공동체와 우리 교회의 더 큰 봉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 봉헌 축일은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수도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우리 자신 역시 포기하고 희생하여 봉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첫 시작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첫째는 루카 복음서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를 들려주고 있으며, 둘째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의 첫 시작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서의 첫 문장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복음서를 저술한 사람이 이 복음서를 왜, 어떻게 저술하게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복음서가 어떤 책인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또 어떻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루카 복음서의 첫 구절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받아서 썼는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하고 복음사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배웠던 가르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듣고 본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 증언 안에, 복음서 안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일회성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우리가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하고 노래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때 거기서 말씀하심으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기록된 문자 안에 굳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 자체가 바로 영이며 생명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때 거기서 종결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예수님 치유의 기적은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실현되고, 예수님 사랑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이에게서도 이루어집니다. 성경의 말씀은 그냥 글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과 더불어 자라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되고, 읽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면 성경 말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이시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번째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이 글자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실현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 역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하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오고,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실현됩니다.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가, 수많은 성인들의 삶과 죽음이 이를 증언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이시며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 각자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카나의 혼인잔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성탄 시기가 끝나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동시에 오늘은 우리 본당이 축성되고 설립된 본당의 날이기도 합니다. 1978년 오늘 바뇌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우리 당감성당이 축성된 날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1 15일에 바뇌의 성모님을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우리 본당의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함께 기도합니다. 동시에 2028년이면 우리 본당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 모두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또한 외적으로도 더 나은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카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고, 성모님도 그 잔치에 참석하였고, 예수님 역시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아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잔치에는 어련히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카나의 잔치에서는 그만 술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술이 떨어지면 잔치가 끝나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술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물독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맞는 축제와 잔치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드러냅니다. 혼인잔치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시고 참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을 축복해 주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물을 술로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이 더욱 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과 희망은 우리가 준비한 포도주로는 한계가 있음을 오늘 복음은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있어야만 우리의 잔치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희망이 계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한 포도주로 우리 인생의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가장 먼저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성모님은 잔치가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에 동참합니다. 성모님 역시 우리가 기쁨과 희망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예수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본당의 주보 성인이신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아시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마련한 포도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주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포도주로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가장 먼저 아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며, 특별히 바뇌의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시길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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