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주일 묵상

예수님의 일생은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잠깐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의 활동만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르코복음의 주님 수난기는 파스카 축제일 이틀 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 바깥의 첫 마을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집에 들어오면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이 있었고,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하인이 손님의 손과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향유를 부어 드리는 일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입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을 맞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예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두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투루 쓴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죽음을 눈 앞에 둔 예수님은 이 일이 바로 당신의 장례를 앞당겨 치루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예수님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오늘 수난기의 두번째 장면은 유다의 배신입니다. 이미 율법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예수님 제자 가운데 한명인 유다가 그 음모에 가담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온갖 구실과 모략과 음모가 한곳에 모여듭니다. 하나의 이유, 하나의 원인이 아닙니다. 각자 나름의 이해관계, 갖가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죄악의 결과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됩니다. 숨겨져 있던 인간의 온갖 악과 미움과 교만이 폭로됩니다. 들킬세라 두려워 드러내지 못했던 온갖 미움과 증오와 폭력이 세상 밖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악이 이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로 모여듭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것, 바로 주님 죽음 직전 2-3일동안 있었던 일이 오늘 시작됩니다. 한편에는 주님께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의 행위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온갖 음모와 죄악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망도 반항도 변명도 없이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고,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주간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이 이번 주간 전례 안에서 재현됩니다. 이번 주간 주님의 십자가 길에 우리 모두 동반하기를 청합니다. 주님과 함께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삶과 죽음,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온갖 음모에 대항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이번 주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다짐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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