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간혹 길을 가다 보면, 응급차에 새겨진 지팡이와 뱀의 상징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응급차뿐 아니라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보건과 의료 단체와 기구에는 어김없이 뱀이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상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의술의 신이라 불리는 아스클레피우스가 뱀이 물어다 준 약초로 사람을 치유했다는 신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뱀은 한편으로는 독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독제나 약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보다 더 오래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민수기(21,4-9)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하게 됩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광야에서 그들은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차라리 이집트 노예살이가 더 나았다하며 불평을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샘물도 찾게 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으면,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갈망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벌하십니다. 불뱀의 독 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다못한 모세는 하느님께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의 간청을 들어 하느님은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놓으면, 뱀에 물린 이들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것의 의미는, 마치도 모세가 들어올린 뱀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불뱀에게 물려 고통받는 이들이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보며 치유를 받았듯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두가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곧 하느님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짐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 그리고 하느님의 빛이 드러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조리와 모순의 사건이지만, 바로 그 부조리와 모순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납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으로써 인간은 죄와 죽음에서 치유를 받고 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빛 안으로 나가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쳐다보며 치유받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통과 슬픔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불합리하며 모순적인 일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려고 애쓰지만, 실상 그 고통 속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 속에 주님이 계시고, 그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 내는 우리의 노력 속에 주님의 부활이 숨어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십자가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과 빛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기를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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