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사탄, 그리고 천사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음으로써 사순시기가 시작되었고 앞으로 40여일 동안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순시기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꾸며지지 않은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포장되지 않은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시기는 바로 광야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 한가운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자신을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세가지 유혹을 받으신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오늘 마르코 복음은 단 두 문장으로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고, 둘째는 천사의 시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빵과 힘, 명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은 광야에만 머물지 않았고, 예수님의 삶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빵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며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못박혔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광야에서의 사탄과 똑 같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 40).”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 역시 평생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진실되게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대면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유혹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다보면, 우리 인생 전체에 걸친 유혹과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가 무엇인지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광야,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동시에 천사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사나운 들짐승과도 우정을 나눕니다. 유혹과 위험 한 가운데서도 천사의 시중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의 곳곳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당신 죽음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온갖 유혹이 우리를 손짓하여도, 모든 희망이 다 무너져 내릴 때에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은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광야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순시기 동안 성찰하고 묵상해야할 부분입니다.

유혹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도 여전히 악마의 유혹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을 피해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도 깨달아야 하지만, 나를 감싸는 하느님의 은총도 깨달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우리들의 광야입니다.

오늘 광야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 역시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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