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코 소경

복음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1부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으며, 2부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3부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제2부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라는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소경과 예수님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으로 마르코 복음의 제2부는 끝나고 제3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제2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좀 더 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의 복음선포를 중단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은 세차례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며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세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받을 보상이나 영광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첫번째 수난 예고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두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놓고 서로 다툽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제자들은 영광의 날에 하나는 예수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의 청원에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하고 되묻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은 세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의 질문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잠시 우리가 집중하고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번째 수난 예고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의 장소에 예루살렘 직전에 계십니다. 그곳 예리코에서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경에게 제자들에게 했던 똑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대답에 그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 청원대로 그는 눈을 떴고, 곧바로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자 마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여정에 동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리코 소경 가운데 참으로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본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참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지, 예수님을 참으로 따라나선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자 예리코 소경에게 하신 질문,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 수 있게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어,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복음의 기쁨

오늘은 전교주일이고, 교회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을 기쁨을 누리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복음이라는 말 자체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셨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치유와 용서가 넘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기쁘고도 복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을 기쁨으로 여기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물론 인간의 기본적 필요는 채워져야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그러하고, 재물도 마찬가지이며 성적인 욕망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결핍이 충족되었다고 멈추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욕망은 한계를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즉각적이고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을 쉽게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이자 위험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기쁨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실망과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샘솟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또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로잡으시고 그 사람 안에서 살아 계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와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줍니다. 이제까지 살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체험하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잠깐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세상에 실망하고 사람에 실망한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인생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을 줍니다. 험한 세상을 나름의 방식대로 꿋꿋하게 살아갈 용기라는 힘을 줍니다.

복음의 기쁨을 체험한 이들은 세상에 자신이 체험한 기쁨을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다락방에서 숨어있던 사도들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복음의 기쁨을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하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하고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고, 우리의 삶에 힘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전교주일에, 복음의 기쁨이 먼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가득해지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복음의 기쁨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청년의 질문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에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또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질문을 가집니다. 우리 삶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인생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궁극적인 신비는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대변하여 오늘 복음의 청년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미 어릴 적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대답합니다.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삶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고 훌륭한 삶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함정도 있고 위험도 있습니다. 계명과 율법은 인간 삶의 외적인 행동과 행위에 집중됩니다. 더구나 그것들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살인해서는 안되고, 간음해서도 안되며, 도둑질해서도 안됩니다. 모두가 금지와 규제입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모두가 선하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요청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요청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청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산을 팔아서 자선하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요청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입니다. 재산과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사람은 재산과 재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보다 재물과 재산을 더 앞세우고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재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갈망에 제대로 응답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며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이 말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인생의 노력으로 이룬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이루고 쌓아올린 것으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가치도,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 모두가 실상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구하고자하는 영원한 생명, 제자들이 놀라 질문하던 구원, 인간이 쌓아올리고 이루어 놓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탱하고 있고,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의 삶을 감싸 안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손이 죄짓게 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을 자를 것이며,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말씀이며 곧이 곧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표현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표현 뒤에 숨겨진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를 희생하고 포기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단식하고 희생하며 절제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삶을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과 눈에 대해서 다시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몸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일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하느님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 몸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과 탐욕을 추구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노동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손으로 만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손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 손이 만든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은 세상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탐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손은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뿌리치며 자기 자신의 것만 챙기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발은 우리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발이 우리 삶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되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손이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탕 속에 있다면 우리의 좋은 마음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가지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것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는 것에서 탐욕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마음을 낳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이웃과 세상,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눈을 다시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빈 손에 하느님을 담을 수 있기를, 우리의 발로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사랑과 자비 가득한 시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순교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변방에서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엄청난 박해로 많은 이들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의 거의 모든 교황들이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각 민족들에게 전해질 때마다 박해와 순교는 뒤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200년 전 조선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 역시 네 차례에 걸친 엄청난 박해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순교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순교한다는 말에는 박해와 핍박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존 질서와 이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박해가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은 언제나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 자체는 언제나 세속의 지배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인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00년 전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와 그 이념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세상의 질서와 문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신앙의 도전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가장 큰 도전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로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몇 번째 손가락에 꼽힐 만큼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라면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됩니다. 인간도 재산과 지위로 평가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결핍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마음과 영혼의 결핍과 고갈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계속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될 수 없듯이, 물질과 소비로 우리 영혼의 고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갈수록 풍요로워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갈수록 고갈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물질로 온전히 채워질 수 없다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물질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복음은 가르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로 평가받거나 판단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참다운 존엄과 행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전보다 더 많은 도전과 유혹을 합니다. 순교의 본래 의미가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의 증언과 증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가치와 어떻게 다르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할 것인지 묵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의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은 네 개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으니 복음서의 핵심 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 이후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시고 동시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어색한 상황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이 걸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길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서로가 엇갈립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전해지는 메시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란 히브리말 메시아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구세주 정도로 번역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름이 부어진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이 부어진 사람은 예언자와 사제, 그리고 왕입니다. 그러나 주로 누군가 왕의 자리에 오를 때, 사제가 기름을 부어 그를 축성해 줍니다. “기름이 부어진 사람이란 주로 왕을 뜻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자신들을 구해줄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 36)하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빵도 주고 자리도 주고 권력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명예와 권력의 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직감하신 그리스도의 길은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는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 삶의 방식을 전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고,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온전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내가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길인지 성찰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시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누구이신지 다시 질문하고 묵상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에파타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진 특징입니다. 동물들도 소리를 내고 몸짓을 하여 의사소통을 하긴 하지만, 그것을 언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듣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듣고 말함으로써 단순히 정보만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문화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바꾸어 말하면 듣고 말하기가 안되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이게 안되면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가 상당히 훼손당합니다.

저는 사제 서품을 받고 오랜 시간 동안 외국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나 듣고 말하는 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온 사제들과 함께 살았는데, 듣고 말하는게 시원찮으니 사제들과의 대화에도 쉽게 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식사 시간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자존심도 상당히 상처받았습니다. 이렇게 듣고 말하는 것은 정보 교환이나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말하기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의학적이고 생리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정신적 압박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듣고 말하기가 안되어서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독재자는 민중이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에 듣고 말하기가 힘든 것은 사회적인 병리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귀먹고 말 더듬는 것은 총체적으로 비인간적 상태와 상황, 비구원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주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주님의 치유가 단순히 의학적인 것만도 아니고,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것만도, 또는 사회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회복시켜 주시고 인간으로서 충만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것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영원한 것을 갈망하고, 오로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찾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기도하고, 인간만이 경험세계 안에 있는 인생에 만족하지 않고 그 너머의 의미를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인간이고자 할 때, 우리는 초월을 향해 열려있고, 하느님을 향해 서있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신 다음, “에파타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귀와 입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으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 구원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을 묘사하며,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치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때, 주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그렇다면 나는 참으로 귀가 열려있고, 입이 열려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내 자신과 내 삶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시편 51,17).


생태적 회개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고 동시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부터 다음달 10 4일까지 교회는 창조 시기라는 이름의 한달을 지냅니다. 이 시기 동안에 교회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며 이웃들과 함께 연대합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를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인 오늘,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찬미받으소서>라는 제목의 가르침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재작년에 매 주일마다 주보로 <찬미받으소서>요약문을 함께 읽기도 했습니다. 오늘 교황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며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이 가르침을 펴내신 가장 큰 이유는 기후변화, 정확히 말해서 지구 온난화입니다. 지구 온난화란, 지구의 평균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1, 2도가 더 올라가도 자연계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집니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 바다의 수면이 올라갑니다. 그럼으로써 바다 생태계가 교란됩니다. 오늘 하루에도 지구상에는 죽어가는 생물종이 엄청납니다. 우리 체온이 1, 2도 올라가면 우리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해보면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과학자들은 지금보다 지구의 온도가 4도 더 올라가면, 지구의 70%가 사막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지나친 에너지 사용과 쓰레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역사상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내고 있고, 겨울을 가장 따뜻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과거 그 어느때보다 우리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버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됩니다. 입던 옷도, 먹던 음식도, 공장에서 버리는 모든 것도 쓰레기가 됩니다. 핵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핵 발전소에 들어가서 나온 모든 것, 핵 방사선에 노출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됩니다. 핵 폐기물은 현재의 과학과 기술의 능력으로는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냥 땅에 묻어 놓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의 핵 오염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전하다면 자기 땅에 버리고 묻으면 되지 왜 바다에 버리겠습니까. 사실 이미 우리나라에도 경주에 방폐장, 다시 말해서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가 있습니다. 더 나가서 시간이 지나면 노후한 핵 발전소 그 자체가 거대한 쓰레기가 됩니다.

정부도 알고 기업도 알고 있지만, 당장 중단시키지 않습니다. 경제를 위해서입니다. 경제를 위해서 우리가 우리 자식 세대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도 여러 차례 경고하십니다. 경제와 과학이 우리에게 혜택도 가져다주지만, 그것이 가지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편하게 살려고 사용하는 에너지와 우리가 사용하다가 버린 쓰레기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우리가 지구에 함부로 대한 결과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의 회개는 생태적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회개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를 위한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좀 더 검소하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덜 사용하고 덜 소유하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기쁨을 얻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은 결국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보여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에 지구 모든 생물종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지난 7월말부터 한달이 넘도록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연속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대목으로서,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끝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불리 먹었다고 당신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빵과 물고기 너머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그게 뭔가 어리둥절해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자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고 우리가 묵상할 부분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사람들은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실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사람들은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은 이성적으로 파악되기 힘들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중들의 반응은 솔직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 우리가 이성으로 파악해서 아는 것은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라고 합니다. , 사랑은 새로운 앎을 가져다주고, 그렇게 새롭게 알면 새롭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머리로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슴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나서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또 그렇게 알고있습니다.” 믿음이 알게 해 줍니다. 알아야 믿게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참으로 믿어야 앎이 열리고 깨우침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알아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어야 알 수 있는 분이고 사랑해야 알 수 있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갑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응답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응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지난 4주 동안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연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첫 시작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천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의 의미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산다는 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먹는 것으로 유지되고 지속됩니다. 빵과 물고기는 인간이 먹고 살기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양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가 육체적으로만 먹고 살기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으로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참으로 영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 무엇인지 밝혀 주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우리가 참으로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참으로 영을 지닌 존재로서 살기 위해서는 빵과 물고기 너머 생명의 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의 빵이란 다름아닌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살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먹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써 영원 안에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 안에 갇히지 않고 영원을 향해 서 있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먹고 사는 일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예수님은 머무르시고, 우리의 온 삶이 예수님의 의해 지탱되며,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온갖 수고를 하여 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을 나누기 위해 포도주를 만들어 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 노동과 노고의 결실이고 우리의 슬픔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봉헌되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가 되듯, 우리의 삶이 주님과 하나되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머무르시며 살아계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성경을 펼쳐 읽으면,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을 돌보시며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끌어 가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느님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을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통하여 그리고 아무도 주목조차 하지 않는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은 마리아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를 통하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지만, 마리아를 보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꿰뚫어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바로 주님의 어머니라고 예언합니다. 엘리사벳의 예언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마리아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순명과 결단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어머니라는 사실은 단지 예수님의 출산과 양육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하시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하셨습니다. 루카복음 8장을 보면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23장에서는 예수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성모님이 사도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여정에 함께 했던 어머니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찢기는 가슴으로 지켜본 어머니이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활동한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엘리사벳이 예언한 대로, “내 주님의 어머니이고 사도들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가 모든 신앙인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언제나 예수님 주변에서 소리없이 예수님을 도운 어머니가 우리 인생 여정의 길에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가 우리 삶의 시련과 고통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신 어머니가 우리가 바치는 간절한 기도에 함께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여정이 끝나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아 영원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 승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오르셨다는 믿음입니다. 모든 신앙인 역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마리아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어머니 마리아가 세상의 온갖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온갖 어려움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가끔씩 제 마음을 되돌아보고 헤아려 봅니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딱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 마음이 한결이거나 하나인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내 마음 속을 계속 들여다보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느끼거나 만나기도 합니다. ‘, 여기에 하느님이 라는 사람의 씨앗을 뿌리시고, 숨을 불어넣어셨구나하는 부분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심층 심리학 역시 마음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마치 빙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빙산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우리는 그 빙산의 제일 꼭대기 층만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90%는 바다 속에 잠겨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구조는 빙산과도 같아서, 우리가 알고 있고 의식하고 있는 우리 마음이란게 사실은 물 위에 떠 있는 10%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층 심리학은 이 10%의식 속에 있는 자신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우리가 잘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는 90%무의식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90%를 이루는 깊은 층의 우리 마음이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 자신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의식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갈 때 행복해지고, 반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면 마음이 아프고, 심한 경우에 몸도 아프다는 것입니다. 심층 심리학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루는 깊은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때 가장 행복하고 충만해집니다.

제가 얄팍한 심리학적 지식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이러한 심리학의 관점으로 우리의 생명을 들여다보면 우리 생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라는게 여러 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가장 윗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명입니다. 빵과 물고기를 먹어야 지속되는 생명입니다.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의 깊은 층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 내가 받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오히려 제일 윗층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명, 그리고 진짜 자기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받는 생명이고, 이를 우리는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혼은 빵과 물고기만으로는 충만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부터 양식을 얻어야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 동안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계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다시 그 내용을 되돌아보면,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람들은 빵을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로 채워지지 않는 생명, 빵과 물고기 너머의 생명을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가장 깊은 층의 생명이 있고, 바로 그 영혼의 굶주림은 하느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양식,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키워 나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몸이 우리의 영혼을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목격하고 경험한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빵의 기적의 참다운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그 사건을 두고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란 사건 너머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깨달을 때, 그 사건이나 사물을 우리는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이 일을 표징이라고 부른다면, 사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사건 너머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빵과 물고기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영원한 갈망과 갈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빵과 물고기라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빵과 물고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참다운 생명은 빵과 물고기만으로 충족되지 않으며, 인간의 참된 삶은 육체적 한계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의 시선 너머에까지 다다르고, 인간 마음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정신과학이 다 잴 수 없고, 인간의 마음을 심리학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은 영원을 향해 서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생명과 삶은, 참으로 인간 그 자체는 영원을 향해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영원을 향해 서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으라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찾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양식,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빵이고, 예수님 바로 당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삶이 영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이고 참된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묵상해보면, 우리의 삶이 단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장수를 했다고 해서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해서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건강과 장수, 재산과 평판을 훨씬 더 넘어서 있는 것이고, 영원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노쇠와 병고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고, 우리가 많지 않는 재산으로도 기쁘게 살 수 있게 도와 주시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인정 없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은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있고, 우리의 삶과 우리 인생이 하느님의 크신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찾고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즉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이들을 배불리신 기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로 옮겨 가셨고, 이미 병자의 치유를 목격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 마침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먹고 남은 것만으로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많은 군중을 빵으로 먹이시듯, 예수님 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좀 더 묵상해 볼 점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빵의 양을 많게 하신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자신의 것을 내놓자 이루어진 거대한 나눔이 일어났는지 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내놓은 빵을 들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후에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전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는 어린 아이의 마음도 훌륭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이 몇 개 되지 않는 빵과 물고기를 모든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주님께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것들을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가진 나약한 마음을 강하게 바꾸어 주시고 비뚤어진 탐욕도 바르게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의 우리가 가진 것들을 아름답게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성체성사의 신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이 예물준비성가를 부르며 예물을 봉헌할 때, 사제는 혼자 예물준비 기도를 바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 기도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인간이 땅을 일구어 얻은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더 나가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친 것을 도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양식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둔 결실을 참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귀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가 힘들여 이루어 놓은 것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더 나가서 주님께서는 주님은 단조롭고도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삶을 최고로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삶과 인생을 더욱 의미있고 귀하며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당신의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도움으로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게 변하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지난 주에 초복을 지냈고 이번 주간 중에 중복을 지내게 됩니다. 여름의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휴가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좋은 휴가 보내시길 빌고, 또 계획이 없더라도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휴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휴식을 권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쉰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쉬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밤잠을 설치면 다음날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쉬고 잘 잘 수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것이 잘 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쉼은 치유되고 회복되는 쉼입니다. 우리는 종종 힐링(healing)”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또 무엇을 보았더니 힐링이 되더라, 어떤 음악을 들었더니 힐링이 되더라, 그 음식을 먹었더니 힐링 되더라, 하고 말합니다. 이 힐링이라는 말 안에는 결국 치유와 회복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찢겨지고 부서진 내 마음이 치유를 받는 것, 온갖 피로와 상처에서 회복하는 것, 내 실수와 잘못, 내 부족함과 약점 때문에 넘어졌던 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 내 정신과 영혼이 새로운 기운을 채워 넣는 것, 이 모두가 힐링입니다. 이런 힐링이 되는 휴식이 참다운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다운 휴식을, 참으로 힐링이 되는 휴식을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참다운 휴식을 하느님의 휴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창세기 2장의 첫 구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쉬셨던 이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라고 불렀고, 이 날을 일하지 않고 거룩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가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 자신을 창조하신 그 시간으로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모습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살이에 찢기고 상처받고 훼손된 지금 내 모습에서 하느님이 주신 참다운 내 모습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치유이고 회복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힐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휴식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내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이 가득해집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힐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역시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다운 쉼이 없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잘 쉬기 위해서 따로 외딴 곳으로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휴대폰과 텔레비전과 함께 동행합니다.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거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 가운데 많은 시간을 일상을 멈추고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한 주간 가운데 주일을 잘 보내는 것 역시 치유와 회복의 휴식이 됩니다. 참다운 휴식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야 이루어 지는 것이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이루어 집니다.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이 여름의 한 가운데 좋은 휴가와 참다운 휴식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잘 쉴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우리 몸의 온도는 36.5도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플러스 마이너스 1도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만, 적정 체온은 36.5도입니다. 우리 몸의 온도가 1 2도 올라가면 온 몸에 통증이 생깁니다. 춥고 온몸은 두들려 맞은 듯이 아픕니다. 온도가 더 오르면 우리 몸의 장기가 제 기능을 쉽게 못합니다. 우리 몸이 그러하듯, 지구의 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의 온도 역시 계속 상승하면 지구가 몸살을 앓습니다. 지구과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지금보다 지구 온도가 평균 4도가 상승하면 지구의 70%가 사막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으며, 바다의 온도 역시 상승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200년 전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다시 말해서 인류가 석탄과 석유를 사용한 이후로 지구의 온도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도 상승의 주범은 석탄과 석유에서 나오는 탄소입니다. 오늘날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바로 탄소입니다. 그래서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은 재생에너지 100%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국제적 협약들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게 된 이후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고, 우리 역사 속의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음식 쓰레기는 넘쳐나고,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 소유하고 소비한 것들이 쓰레기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지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힘겹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신음이 곧바로 우리들에게 덮쳐 올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1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지구의 신음을 들으며 복음을 살아가고 하는 우리들에게 복음의 요청으로 그리고 주님의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는 지구과학적 사실을 넘어, 사회경제적 문제를 넘어 신앙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이제 우리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여행하고 소비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경험한 지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요청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좀 더 단순하고도 소박한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 가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한 삶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면, 새로운 눈과 새로운 정신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고, 삶이 우리에게 주는 좋은 기회들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절제의 삶을 살게 되면, 절제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온갖 집착과 욕망에서, 가지지 못해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부러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태도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우리에게 주시는 요청이자 도전입니다. 더욱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으로, 그리고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치유해 주시는 치유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참된 스승이시고 치유자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병고와 슬픔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길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확신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지혜에 놀라고 예수님의 기적에 경탄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그분을 배척합니다.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선입견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의 선입견은 유다교 지도자들의 선입견과는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선입견은 신앙적인 것이라면,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에 사람에 대한 선입견입니다. 고향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지만, 실상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이웃을 바라볼 때 너무 쉽게, 그 사람의 과거, 겉모습, 직업, 다른 사람에게 들은 평판 등에 쉽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진짜 모습을 놓쳐버립니다.

이런 선입견의 밑바닥에는 닫힌 마음이 있습니다. 들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귀는 있지만 귀가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잠언 11,2에서는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뒤따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집회서 6, 33귀를 기울이면 지혜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선입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겸손해야 하며, 귀를 기울이는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듣는 마음입니다. 열왕기 상권을 보면, 하느님이 솔로몬 임금에게 무엇을 청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지혜와 분별의 마음을 주십니다. 참다운 지혜 역시 듣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듣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자신의 고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겸손, 듣는 마음, 지혜는 어떤 면에서 하나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 역시 겸손, 듣는 마음,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기적 역시 하느님의 능력과 신앙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실상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더욱 낮추어서,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참다운 예언자의 음성과 이끄심을 식별하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시도록 청하면서 오늘 미사를 봉헌합니다.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여인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여인은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이고, 다른 한 여인은 12년을 살고 죽은 소녀입니다.

먼저 열 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인에 대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여성이 달거리를 할 때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 여성은 열 두 해를 하혈하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12년 동안 육체적 질병이 그녀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율법 역시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12년을 부정한 상태로 산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병에 대해 드러내 놓고 고쳐주십사 청할 수도 없었고, 또한 질병이 치유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처지였기에 그녀는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예수님 뒤를 따라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에 대었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깊이 숨겨진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여인에게 배워야 할 것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입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주님 뒤에서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믿음과 용기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실 주님 말씀대로, 그녀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굳센 믿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열 두 해를 살다 죽은 소녀를 만납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죽은 소녀이기 보다는 그녀를 구해달라고 청하는 아버지 야이로 입니다. 아버지는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딸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제 딸을 죽었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오히려 주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키십니다.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실 때, 소녀는 일어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실 때 우리는 일어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소녀를 보며 깨달어야 할 것은, 주님의 손 안에 참된 생명이 있고,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을 때 참으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절망하지 말고 절대 희망을 놓치지 말고,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를 열어놓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 주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반대로 죽었던 소녀는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셨을 때 일어섭니다. 죽었던 소녀도 그리고 딸의 죽음을 전해 들었던 아버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는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면,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그 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예수님 복음 선포의 첫번째 장소는 갈릴래아 호수가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는 남쪽끝에서 북쪽끝까지의 거리가 20km가 넘고, 그 둘레가 50km가 넘는 아주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종종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호수가에는 크고 작은 마을과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들어본 도시, 카파르나움, 티베리아스, 벳사이다, 겐네사렛 등이 이 호수 곁에 형성된 도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가시기도 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첫번째로 예수님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밤사이 배를 타고 건너가시면서 예수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거센 돌풍이 일었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립니다. 밤이라 앞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바람은 파도를 일으켜 배가 제 방향을 가지 못하게 했으며, 파도는 배를 넘어와 버립니다. 앞은 보이지 않고, 방향 감각은 잃었으며, 배는 서서히 물에 잠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급하게 깨웁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어 고요하게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되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우리의 삶과 인생은 호수 건너편 목적지로 건너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목적지에 다다르기 까지는 온갖 돌풍과 어둠, 파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으며, 자주 방향을 잃습니다. 어느 순간에 내 발목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위험을 피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돌풍과 파도 없는 호수가 없듯이, 고통과 어둠과 슬픔 없는 인생 역시 없다는 것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풍랑과 호수를 고요하게 하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주님께서 함께 타고 계시는 배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과 신학의 초석을 세운 교부들은 종종 교회를 배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신 배를 타고 가면 안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신 그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그 배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인생의 호수를 건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배에 함께 타야 하고, 또 다른 한편 내 인생의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온갖 어둠과 돌풍과 파도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우리 인생의 호수를 건너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 안에서 우리는 호수 건너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여정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인생도 신앙도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빛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는 그 이름이 선생님일 수도, 친구, 또는 남편과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제라는 이름은 제 인생을 통해 가장 빛나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우연히 주어지거나,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낳는다고 곧바로 어머니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가르쳤다고 선생님이라고, 결혼했다고 곧바로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빛나는 이름들은 관계 안에서 그리고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름입니다. 아기를 가지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칠판 앞에 서지 않더라도 우리 인생의 선생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기를 낳는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면서 되어가는 이름입니다. 친구와 부부는 친구 맺는 그 순간에 또는 결혼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희생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딱 그만큼 친구가 되어가고 부부가 되어갑니다. 사제와 수도자 역시 서품과 축성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자신의 서약에 충실하는 만큼,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만큼 되어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인생은, 또한 인간은 이렇게 되어가는 존재이고, 형성의 과정 중에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그만큼 되어가는 존재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이집트 왕궁을 빠져나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에게는 40년이라는 광야의 생활이 필요했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까지 또 다른 40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오로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활동하기까지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13년을 회개의 생활을 했습니다. 신앙 역시 인생 전체를 통해서 성숙해가고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땅에 뿌려질 때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 커져서 새들이 그 그늘에서 쉴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의 매일 매일의 삶 안에서 나의 헌신과 포기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헌신하고 포기하는 그 만큼 부모가 되어가고, 부부가 되어가고, 사제와 수도자가 되어가듯 하느님 나라는 나의 일상 안에서 나의 헌신과 포기를 통해서 내 안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과정 속에 있습니다. 신앙 역시 서서히 성장해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또는 신앙은 인간의 눈에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으며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작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쉽게 지나지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인 되어갑니다.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그것들을 위해서 나의 헌신과 포기를 바칠 수 있을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 안에서 큰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인생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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