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순 제3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른바 성전정화사건에 대해 전해줍니다. 성전정화사건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의 환전상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고나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교 성전의 종말을 고하시고, 당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전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의 억압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머물게 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계약을 맺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징표로 하느님은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십니다. 모세는 이 돌판을 궤에 넣어 보관하게 됩니다. 이 궤를 계약의 궤라고 부릅니다. 이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됩니다. 모세는 진영 한 가운데 천막을 치고 그 속에 계약의 궤를 넣어두었습니다. 이 천막을 만남의 천막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성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할 때, 하느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 천막을 비추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이 천막 안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천막이야말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끄시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러, 다윗 임금이 계약의 궤를 자신의 성 안에 모셨습니다. 그로써 다윗은 하느님의 가문이 되었고,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계약의 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방에는 회당을 지어 하느님 말씀을 들었고, 수도 예루살렘에는 성전을 두어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성전은 허물어졌고, 성전 안에 모셔둔 계약의 궤 역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후에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사실 재건된 성전 안에는 계약의 궤를 모시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재건된 성전조차도 주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서기 70년에 로마 제국의 군사들에 의해 허물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우는 서쪽 벽만 남아있어, 유다인들이 그 벽에 머리를 치며 통곡과 탄식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하느님 현존의 자리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집으로 변해버린 성전의 종말과 붕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현존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당신을 드러내시는 장소는 어느 산, 어느 건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시며, 주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현존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성전에 대해 묵상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성체성사로 주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4)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 역시 정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 안에 환전상과 장사꾼들의 탐욕과 욕망 역시 정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실 때 우리는 참다운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오늘 우리 자신이 정화되어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이고,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신 주님께서 찬란한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주님 곁에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 위 구름 속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울리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격에 가득차 있습니다. 두려움과 기쁨, 이는 신적인 존재가 드러날 때 인간이 보편적으로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이제 제자들 앞에 주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이 천명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모의 전후 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여정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당신께서 고난을 겪을 것이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반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야할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말씀 후에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며, 당신이 바로 생명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 변모 사건의 의미가 더욱 밝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후에, 그리고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 후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주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는 것은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야 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지만, 십자가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모든 희망이 붕괴되고 나서야,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절감할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당신 부활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용기입니다.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을 눈 앞에 둔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의 고통과 죽음을 예감하는 제자들 앞에서 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우리 자신에게도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지고 살아가는 고통과 십자가, 매일 매일 겪는 절망과 죽음 안에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 싹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과 십자가 너머 바로 참다운 생명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힘든 삶을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광야, 사탄, 그리고 천사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음으로써 사순시기가 시작되었고 앞으로 40여일 동안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순시기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꾸며지지 않은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포장되지 않은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시기는 바로 광야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 한가운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자신을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세가지 유혹을 받으신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오늘 마르코 복음은 단 두 문장으로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고, 둘째는 천사의 시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빵과 힘, 명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은 광야에만 머물지 않았고, 예수님의 삶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빵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며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못박혔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광야에서의 사탄과 똑 같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 40).”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 역시 평생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진실되게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대면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유혹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다보면, 우리 인생 전체에 걸친 유혹과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가 무엇인지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광야,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동시에 천사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사나운 들짐승과도 우정을 나눕니다. 유혹과 위험 한 가운데서도 천사의 시중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의 곳곳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당신 죽음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온갖 유혹이 우리를 손짓하여도, 모든 희망이 다 무너져 내릴 때에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은 때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광야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순시기 동안 성찰하고 묵상해야할 부분입니다.

유혹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도 여전히 악마의 유혹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을 피해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유혹의 실체도 깨달아야 하지만, 나를 감싸는 하느님의 은총도 깨달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우리들의 광야입니다.

오늘 광야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 역시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나병 치유

오늘은 연중 제6주일이며 동시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루르드 성모님의 첫번째 발현일에 세계병자의 날로 정해 의료인과 병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치유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더 깊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를 읽어보면, 전염병을 가진 이는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되고 열 두 지파의 진영 바깥에 혼자 살아야 합니다. ‘부정하다는 말은 전례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며, ‘진영 바깥에 혼자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격리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전염병이 나으면 전례에 참여할 수 있고, 진영 안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뼈저리게 겪어보았기에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질병은 질병 자체로도 무서운 것이지만, 그 질병이 가져다주는 낙인과 편견, 배제와 소외가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을 괴롭힙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무엇보다 먼저 육체적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나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를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실상 질병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 역시 은총이며, 우리의 일상의 삶을 하느님이 감싸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코로나를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이 받쳐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느님이 감싸주시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은총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치유의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깨끗하게 되다는 말은 첫째로는 육체적으로 깨끗하게 된다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게 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회복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육체의 회복을 넘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모습, 본래의 참다운 자아로 회복하도록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우리를 되돌려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성찰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우리가 더럽혀 졌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온갖 상처를 안고 살고 있으며,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숨겨놓고 살아갑니다. 실상 우리가 나병환자 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고쳐주시며,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깊은 갈망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함구령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죽은 이를 되살려주시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또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병자들을 경계하시고 그들과 거리를 두십니다. 군중을 피해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가 하면, 군중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작은 배 위에서 그들을 가르치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여러 차례 병자를 치유하신 후, 치유의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귀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왜 치유받은 이들과 마귀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셨는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함구령은 치유와 구마의 참다운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병고를 피할 수 없고, 나이들고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늙고 아프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병고에서 치유되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 치유 받은 그들이 그 이후로 어떤 질병도 없이 살았던 것도 아니요 그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지금의 병고가 지나간다고 해서 앞으로 질병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질병의 고통에서 치유되는 것도 큰 은총이지만, 사람이 평생을 건강하게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늙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도 은총이며,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의 참된 의미는 우리 육신이 늙어가고 병들어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 바로 참되고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고 늙어가는 것도 참으로 인생의 신비이며 그 신비 가운데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늙음과 병듦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함구령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당신의 사명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고 빵을 많게하여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메시아를 거부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우러러보는 왕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빵이나 명예와 위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과 포기, 희생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셨고, 죽음과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은 이들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의 마음이, 마귀들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정체가 혹여 예수님의 참모습과 당신 사명의 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의 건강과 물질의 풍요로움에만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경계하시고 우리와 거리를 두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치유와 구마의 참다운 의미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풍요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늙음과 병듬 가운데 하느님을 깨닫고, 고통과 희생 가운데서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깨닫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갈릴래아에서의 선포와 활동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며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시고 부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의 첫번째 부분의 어느 하루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곧 하느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야만 도달하는 그런 곳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고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안에서 실현됩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하느님이 이제 우리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활동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악령은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결핍은 최고의 물질문명을 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소외와 배제 역시 인간 밖에서 인간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시며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자선주일을 지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우리가 이어받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자의 치유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부질없는 집착과 탐욕 때문에 병들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아파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부터 우리를 병들게 하고 억누르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참다운 자아로,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을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으며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음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고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이 우리 자신 안에서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 낚는 어부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 21km 그리고 그 폭이 13km가 되는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종종 이 호수를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호수에서는 물고기도 많이 잡혔기에, 여기서 잡은 물고기들이 이스라엘 전체로 팔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호수 주변에는 작은 도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 게라사, 티베리아스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도시들의 이름이 이 호수를 둘러싸고 발전한 마을들입니다. 그리고 이 호수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들은 도시의 부자들은아니었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당신의 첫번째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오늘 첫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해 함께 묵상하며, 우리 자신들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의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준비된 사람이거나 자격이 있거나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불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 자체가 실상 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깨닫고, 교회로 불리우고, 세례를 받은 모든 것이 가장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발로 성당에 나왔다 하더라도, 내 마음과 내 발을 교회를 이끈 근본적인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자격을 갖추었거나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불린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고,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과 그 은총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상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기도 했지만, 동시에 은총이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일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불러 주시면,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일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거룩한 것으로 변하고 우리의 일은 세상을 위한 일로 드높아 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달으면 깨다를수록, 우리의 삶은 더 거룩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며 더 큰 가치로 충만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묵상해 볼 것은 제자들의 응답, 곧 우리의 응답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포기를 배워야 합니다. 첫번째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려둡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버리고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움켜지고 집착하는 손을 놓아야 합니다.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갚아버리고 말겠다는 내 마음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돋보이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 더 큰 의미와 가치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듯,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주님 부르심은 더 의미있고 더 가치있는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의 일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기쁘게 받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첫 제자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주님께 불림 받은 일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신앙이 깊어지며 주님 제자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주님의 두 첫 제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일컬으며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두 사람에게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물음은 우리가 참으로 갈망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끔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통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첫번째 질문에 두 제자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되묻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성찰해보면, 가장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인 삶의 조건, 육체적인 건강, 용서와 화해 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실상 내 힘만으로, 내 의지만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도 깨닫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마음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갈망하고 있음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은총과 축복의 본질이야말로 하느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기도할 때마다 되풀이하듯이,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인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은총도 축복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제자들의 물음,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는 물음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의 갈망과 기원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되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그분과 함께 그날을 보냅니다. 우리가 우리 삶과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듣고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예수님도 모두가 신비입니다. 듣고 배운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비 안에 잠길 때, 그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계신 곳에 가서 보고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를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 신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성사는 무엇을 찾느냐?”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와서 보아라하시면, 우리는 주님 계신 곳에 가서 머물러라 합니다. 성체성사는 주님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천막 안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오고,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함께 머물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감싸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인생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 주님께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묵으시는 곳에 함께 머물도록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와서 보아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2주 전 성탄 대축일로 시작된 성탄 시기는 오늘 주님의 공현 대축일로 마무리됩니다. 원래 공현이라는 말은 거룩한 것 또는 신적인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공현은 메시아의 존재 또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역시 동방 박사를 통해 주님의 탄생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에 대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별을 쫓아 메시아를 찾아온 박사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마침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흐름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메시아를 향해 서 있고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길을 닦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순명으로 메시아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나는 동방 박사들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고, 구약성경도 모르며 이사야 예언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쫓아 메시아를 찾아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신비와 그 뜻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 줍니다. 최초의 우주 비행사였던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은 첫 우주 비행 후에 우주는 암흑이며 나는 신을 보지 못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 비행사 보만(Borman)은 우주 비행 후의 인터뷰에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을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실로 하늘은 물리학적이고 천문학적 하늘 이상의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시편 말씀은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 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시편 19,1)하고 노래합니다. 하늘과 창공은 거룩함과 하느님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참으로 갈망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이 드러나십니다.

하늘과 창공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막 태어나신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드렸고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드립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온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경계 바깥의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방 민족의 사람들이지만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은 이렇게 이방 민족 가운데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드러났습니다. 별이 동방 박사들을 이끈 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고장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별은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작은 고을, 가장 보잘것없는 땅, 가장 작고 약한 사람, 가장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 성탄의 신비, 공현의 신비,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별 너머, 하늘 너머,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먼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으며, 가장 작고 약한 것,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일상적인 삶 안에 거룩함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상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에게 일상의 삶은 보잘것없거나, 비루한 것이거나, 가치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을 드높여 주시고,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됩니다. 동방 박사들을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이끌었던 그 별이 오늘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품은 어머니 마리아

2024년 새로운 한 해가 오늘 시작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 교회는 이 날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또한 매년 11일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모님께 우리 자신들과 온 세상의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이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을 일컬어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려고 하면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전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1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한 처음에 있었고,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도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말하며, 하느님께만 부르던 호칭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교리는 한편으로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이지만, 더욱 근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교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신앙고백은 신학과 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며, 그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깁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항상 하느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되찾았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 모든 말씀들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태중에 품고 사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영성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넣고 되새겨 묵상하며, 그 묵상한 말씀에 순명하여 실천하는 것이 기도요 영성입니다. 오늘날 렉시오 디비나라고 불리는 기도뿐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과 같은 전통적인 기도와 영성, 최근의 향심기도와 같은 것도 마리아의 모습을 적용한 것입니다. 실로 말씀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말씀에 순명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고 불의와 싸우며,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질문명에 저항하여 가난을 선택하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 삶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바칩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힘이 내립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사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용기와 평화, 하느님의 능력과 축복이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맞이하는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온 세상의 평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주님의 성탄 대축일이 지나고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하듯이, 예수님 역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양육받고 성장했습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태어나서 1-2, 길게 잡아도 6-7년의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동안 아기는 엄마 품에서 사랑으로 느끼며, 최초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듯이, 이제 갓 태어난 예수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으며 예수라는 이름을 받았고, 또한 40일이 지난 후에 성전에 봉헌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부모님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서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느끼며, 신앙에 충실한 부모에게 보호받으며 신앙을 키우고, 의롭고 성령에 가득찬 사람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예수님이 공생활에서 보여주신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 하느님께 대한 끝없는 헌신과 봉헌,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대한 축복이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가정이 다 그렇듯이, 시련과 고통없는 가정 역시 없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헤로데 임금의 질투와 증오 때문에 성가정은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하고,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명합니다.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길도 없고, 나침반도 없이 떠나는 여정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과 맺어온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고, 언제 돌아오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받아들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키고 그들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아야 하는 땀과 눈물을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줍니다. 특별히 오늘 가정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쏟는 세상 모든 아버지의 땀을 응원하고,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을 위로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본당 신자들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기도와 보호를 있으시기를 빕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가정에도 주님께서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 알려주듯, 우리가 쌓아 올리고 우리가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실상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일으켜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손길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와 결과를 얻어야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님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우리 신자들의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큰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올 한해 우리를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감사와 찬미를 모아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 대축일에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과 구별되지만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부르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말씀으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들을 불러내시고, 당신 말씀으로 홍해바다를 가르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도 만남의 천막 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어 당신의 백성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행동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취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번역된 이 말은 원래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천막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뜻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광야에 머무를 때,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계약의 궤 안에 넣었고 그 궤를 천막 안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막은 만남의 천막이라 불리웠고, 그곳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막은 백성들 가운데에 있었고, 그 천막 주위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솔로몬 임금 때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져 계약의 궤를 성전 안에 모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 제국의 침략으로 성전은 붕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천막 없이 천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이제 우리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중심에 하느님이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천막을 치게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사실이,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이 사실이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 백성들을 해방시키시며 그들을 이끄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우리의 몸이 죽어도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은총이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엄마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와 깨닫지 못한 아이의 삶이 다를 수 밖에 없듯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슬픔과 절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우리 본당 모든 신자분들이, 그리고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우리 예비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 날입니다.


아기의 꿈, 우리의 꿈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지금부터 약 2800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환시를 보고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예언자의 예언처럼 오늘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렇게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이렇게 계십니다. 하느님은 무섭고 두려운 분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예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잠들어 있는 이 아기가 우리와 더불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 아기와 더불어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하고 예언합니다.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는 것, 이사야 예언자가 꿈 속에서 본 것, 그것은 바로 끝없는 평화입니다. 2800년 전 이사야가 꿈에서 보았던 것을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기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 6-8). 이것이 바로 끝없는 평화입니다. 늑대와 양이, 표범과 염소가, 어린 아이와 독사가 서로 친구가 됩니다. 전쟁도, 갈등도, 충돌이 사라집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 아이의 꿈으로 이루어집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온 우주 만물이 화해하고, 모든 생명이 친구가 됩니다. 평화는 우주 만물이 하느님 안에서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평화 안에서는 미움도 녹아버리고, 욕심도 이기심도 사라집니다. 하느님 안에서야말로 우리의 마음도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에서 본 것을 오늘 이 아기가 꿈꾸고 있습니다. 오늘밤 잠들어 있는 이 아기의 꿈을 이제 우리가 꿈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 안에서 사는 꿈을 꿉니다. 하느님과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웃과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사소한 것에 미워했던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며 욕심냈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가 꿈꾸기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새로운 용기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우리가 꿈꾸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만 갇혀버리고, 우리 인생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 안에 살고 싶어합니다. 특히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의 이런 꿈이 헛된 바람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오신 이 아기와 함께 꿈꿀 때, 우리의 꿈과 희망은 새로운 현실이 됩니다. 오늘밤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평화의 꿈을 꾸는 날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하루 앞둔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대림시기 동안의 하느님 말씀 전체를 되돌아보고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은 세 명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집중됩니다. 가장 먼저 대림 1주간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묵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강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었지만, 하느님은 새로운 해방과 구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공정과 정의, 끝없는 평화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다윗집 안에서 태어날 한 아기를 통해 당신 계획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합니다.

대림 2주간과 3주간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비추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그의 삶과 선포, 그리고 그의 억울하고도 황망한 죽음은 예수님의 삶을 앞서 보여줍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고, 예수님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었던 요한이 다시 돌아왔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겹쳐져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으며, 그분의 길을 비추어준 예언자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일주일 앞두고, 교회는 마리아에게 집중합니다. 마리아는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에 이어 가장 직접적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와 그 말씀에 순명하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전합니다. 마리아의 모습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마리아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관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복음만이 아니라 루카 복음 전체를 통해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넣어서 계속 계속 되새기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가서 마리아의 위대함은 순명입니다. 앞으로 오롯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온갖 수모와 모욕 그리고 온갖 위험과 시련이 너무나 명백히 예상되지만, 그녀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순명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주님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가 하나 더 묵상해보아야 할 것은 이 세명의 위대한 인물을 꿰뚫고 있는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 그리고 하느님의 주도권입니다. 마리아가 동정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철저하게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주도권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듯, 오로지 하느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가 한 아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천사의 말처럼,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리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하느님이 신비 자체이시듯 우리의 삶과 인생 역시 신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경우에는 시련과 고통이 가득한 눈물의 골짜기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경이로움과 기쁨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처지를 맞이하든 그 처지를 우리가 제대로 예견하기 힘들고,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인생은 많은 경우의 우리의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는 무엇 하나 정해진 것, 확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일을 자신할 수 없고, 우리의 어제를 다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면, 내 능력과 노력 이상의 무엇이 우리 삶을 받치고 있음도 깨닫습니다.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과 그 힘을 어렴풋하게 나마 알고 있기에 우리는 그 힘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기원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는 축복을 바랍니다. 오늘날 의 의미가 지나치게 현세적인 것,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되어서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복을 비는 것 자체가 이미 인생을 신비로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가 걸어온 인생에서 나의 노력이나 조건을 넘어선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 짓도록 도와 주신 스승과 같은 분도 있고, 내 노력과 능력 이상의 기회를 맞이한 사건도 있습니다. 그때 그 시련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 에서야 그 시련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그런 사건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일차적으로 나의 것이지만, 그것이 오로지 내가 이룬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나를 지탱해주고 이끌어주었던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이 아주 오래전의 일 일수도, 비교적 최근의 일 일수도 있겠지만, 그 손길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있고, 나를 이끌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경이로움과 신비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신의 삶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감사를 드릴 만한 여유와 여건이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우리를 덮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한다고 하여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운명을 탓하고 불행을 탓한다고 우리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하고, 감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기도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결국 참다운 신앙에서 나옵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에, 나를 이끌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에,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회개, 새로운 방향의 모색

우리의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됩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길들이 놓여져 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길들을 지나쳐서 하나의 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길이나 그 길에 들어서는 초입구에서는 그 길의 마지막 도착지를 알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낯선 도로에서나 등산길에서 우리는 이정표나 안내표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생은 길을 잘 못 들거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새로 시작할 수도 없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 2주일에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기 전에 그 분께 이르는 길을 새로운 예언자가 마련할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마지막 예언자가 주님께로 가는 큰 길을 마련할 것이고, 굽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곧게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온 유다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헤맨 장소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시련을 겪습니다. 빵도 없고 물도 없었으며,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오던 길이 끊어진 곳이며 갈 길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길이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광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보고, 갈 길을 다시 찾아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한편으로는 시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고, 그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광야로 이끕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회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회개는 방향을 바꾸고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 삶의 방향과 가치,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가 생각하는 방식 모두를 다시 재검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내가 걷고 있는 이 인생의 길이 올바른 방향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오실 주님께 다가서기 위해 광야를 거쳐갈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일 중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우리 인생의 길을 다시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거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길을 들어서 버리면 길을 바꾸기 힘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향하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여태 걸어온 길을 새롭게 점검할 수 있도록 우리도 광야에서 잠시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광야에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청하며 오늘 우리들의 미사를 봉헌합니다.


대림의 의미

오늘부터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대림시기로 시작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오실 것,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2000년 전에 이미 오신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자신들에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기다림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다림은 그냥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일이며 적극적인 일입니다. 열 두세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기다리는 것과 시험을 앞두거나 결혼을 앞둔 사람의 기다림이 같을 수 없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이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때가 찼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하고 말합니다. “때가 차다는 말은 연속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완료되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준비되고 채워졌음을 뜻합니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은 인간의 간절함이 최고로 높아지고, 하느님의 계획이 현실로 바뀔 준비가 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대림시기 동안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앞으로 20일이 지나면 다가올 그 날, 작년에도 있었고 내년에도 있을 달력 위의 1225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고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대림시기의 첫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있는 것은 단순히 잠들지 않은 것과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농부가 잠자고 있을 때도 곡식이 자라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어도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이웃이 큰 불행을 당하여 고통 속에 있는데, ‘나는 몰랐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깨어있는 것은 온 만물의 소리와 움직임을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움직임부터 시작해서 이웃의 마음, 자연 속에서 속삭이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오심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준비하고 기다립시다. 또한 깨어있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느끼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바람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

마태오 25, 31-46/ 2023. 11. 26.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번 주간을 마지막으로 교회 전례는 연중시기를 끝맺고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로 들어갑니다. 연중시기를 끝내며 교회는 다시 한번 더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의 임금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메시아이며 왕이시라고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이런 고백과 선포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표현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고 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고, 결국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도 이런 오해의 귀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왔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복음 선포를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 하느님의 치유와 용서와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시며,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며,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며 하느님의 구원이 다가왔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예수님이 이 되려고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나라가 오면 자신들을 제일 앞 자리에, 좋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의 청원에 예수님의 대답은 가장 작은 이, 가장 낮은 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했고, 그들의 마음 안에는 사실상 예수님이 주시는 빵과 건강과 힘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숨어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예수님이 왕이 되려고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들의 오해는 결국 십자가 위의 죄명패 유다의 왕 나자렛 예수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왕이 되려고 했다는 혐의를 쓰고, 로마 총독에 의해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이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모든 이들이 빵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족쇄에서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가장 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이들의 자리에, 가장 아픈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보여주셨고, 빵과 권력과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다운 행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이 바로 당신의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죽음에 이르는 헌신의 삶으로 참다운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왕이십니다. 빵과 권력과 명예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왕이 아니라, 연민과 약함과 헌신의 힘을 행사하시는 왕이십니다. 더 많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집착과 아집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왕이십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참다운 자유를 얻고, 또 다른 행복을 맞보며, 하느님 앞에서 참다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온 누리의 참다운 왕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번 묵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바리사이의 위선

마태오 23, 1-12/ 2023. 11. 5. 연중 제31주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태도를 나무라십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학자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 사회는 율법에 의해 돌아가는 체제였으니 율법학자는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바리사이 운동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 운동은 율법 해석의 한 전통으로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지킬 때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종파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지킴으로써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분리된 사람들또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 스스로 분리된 사람들이라고 여겼으므로, 그들의 행동과 말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다는 의식이 가득찬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스승이라고 여겼으며,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들었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태도와 자세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면,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깊숙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나는 네 하고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경계를 긋고, 다른 사람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선택하는 옷과 자동차,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 우리가 좋아하는 취향과 선택 뒤에 타인과 나를 구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신앙과 영성의 영역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를 영적 세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앙과 교회에 봉사하면서도 마음 안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세속성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큰 의식없이 하는 많은 말과 행동이 실상은 타인과 나를 구별짓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바리사이들이 숨어있고,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상 우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반대로 주님께서는 섬기는 마음, 낮은 마음이야말로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진실로 건강하게,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가꾸어야 합니다. 특히나 하느님 앞에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존중받는 것은 실로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갈고 가꾸어서 자기 자신의 참다운 모습, 하느님이 주시는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낮은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열고, 이웃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길이고, 동시에 신앙이 가르치는 참 행복과 진리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과 신앙적 깨달음은 바로 낮은 마음, 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주님께 낮은 마음과 섬기는 마음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랑의 이중 계명

마태오 22, 34-40/ 2023. 10. 29. 연중 제30주일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 즉 구약성경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명료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계명은 서로를 비추어 주며,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를 통해 완성됩니다.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은 사랑은 내용도 없고 알맹이가 없습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것은 맹목적입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사랑은 쉽게 부패하고 쉽게 사라집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향해 있을 때 온전히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랑은 너무 쉽게 부패합니다. 사랑은 너무 쉽게 소유욕, 지배욕, 질투와 뒤섞이고 너무 쉽게 변해버립니다. 말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집착과 애착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놓으면 너무 쉽게 욕망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교회와 신앙을 위해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마음에서 시작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위한 일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하고 성찰도 분별도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 쓰촨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너진 폐허 속에서 한 여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품 안에는 아기 한 명이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는 그 아기를 품고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이렇게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자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에는 절제와 성찰도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엄청난 용기도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또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독점하려고 하고, 참고 견디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그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이웃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를 포기하여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결심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