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회개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에 우리 삶의 과제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 개의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첫째는 생존의 과제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과제입니다. 둘째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과제입니다.

먼저 생존의 과제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사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자식을 낳고 가르치고 키우는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일에 들어갑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더럽고 치사한 일도 온갖 수모도 견디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없이 하는가 하면, 양심이나 인간적 도리 또는 체면을 일정 부분 포기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게 다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존만으로는 만족도 행복도 느끼지 못합니다. 뭔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실상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또다른 과제는 의미 있는 삶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삶을 원하고 추구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앙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결국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실상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느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기도 하며, 명상과 기도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생존의 과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이런 것을 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가장 근원과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좋고 아름다운 모습,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그것을 찾을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고, 우리 자신은 참으로 행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러 힘과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성찰의 힘입니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맨 얼굴을 보는 용기입니다. 성찰은 쉽게 말하자면 거울을 보는 능력입니다. 거울을 보아야 자기 얼굴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울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입니다. 인간과 가장 닮은 침팬지는 학습을 통해 거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인간만이 거울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을 때,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가장 잘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찰하는 힘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성찰을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회개입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힘이며, 우리 자신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야 말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도록 기다리고 준비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성찰과 회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성찰과 회개가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4주간 동안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무엇보다 먼저 성탄은 달력에 나와있는 12 25, 단순히 2000년 전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은 달력 위의 그날 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대림시기 동안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은 바로 달력 위의 그 날짜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입니다.

대림시기 동안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오신 그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님은 과거의 주님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미래에 오실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미래에 오실 주님, 우리 각자의 삶의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은 과거에 오신 분만도 아니고 미래에 오실 분만도 아닙니다. 주님은 과거의 주님이시고 미래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지금 현재의 주님입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가 기다리고 준비할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현재 여기에서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은 미래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연적이고 우주적 재앙에 대해 예고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도, 우리의 모든 희망이 붕괴되는 것 같아도, 우리 삶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것만 같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짓밟고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 속에 빠져 지내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늘 깨어 기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음은 단순히 잠들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기억하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을 때,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 동안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첫번째 준비는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나의 가장 깊은 갈망과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삶이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성령께서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시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할 때, 과거에 오신 주님이 그리고 미래에 오실 주님이 현재 나에게 오시는 주님이 됩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깨달을 때가 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절망과 슬픔 속에 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며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오시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들의 성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오시길 늘 깨어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로 보면,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새로운 한 해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시기로 시작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기 전에, 오늘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먼저 묵상하며 지냅니다.

구약성경의 사무엘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판관이자 예언자인 사무엘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이스라엘의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합니다. 사무엘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게 되면 임금이 백성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전쟁도 일으키고 강제 노역을 시킬 것이며 딸들을 데려다 하녀로 삼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임금을 원합니다. 임금이 있어야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번영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무엘은 사울이라는 젊은이를 뽑아 도유하여 임금으로 축성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이 주신 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왔고,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그 계약의 궤를 성전에 모십니다. 그 이후의 왕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대하여 우상숭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다툼과 분열 가운데 있었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빌론 제국에 함락되어 다윗의 왕조는 끝나버립니다. 실패와 좌절 가운데 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새로운 왕을 보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은 부귀와 번영,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리라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왕은 임금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죄를 뒤집어쓰고 고난 받고 죽어가는 종의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부귀와 번영을 가져다줄 왕의 모습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의 왕은 구약성경 안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은 빵이 보여주는 풍요와 번영을 추구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영광의 때에 자신들이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하고 되물으시며 거절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귀와 영광의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어쩌면 그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권력과 명예를 이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모든 이들이 빵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족쇄에서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가장 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이들의 자리에, 가장 아픈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다운 생명을 보여주셨고, 빵과 권력과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다운 행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참다운 자유를 얻고, 또 다른 행복을 맞보며, 하느님 앞에서 참다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온 누리의 임금이시요 참 생명을 주는 참다운 왕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는 참다운 왕이심을 기억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마르코 복음 13장의 후반부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13장 전체를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시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마치도 장사꾼들과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목격하시고는 그들을 다 쫓아 버리십니다. 이 모습을 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는 이제 마지막 강을 지나버린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사꾼들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이요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의 붕괴는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붕괴이고,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이 허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시작으로, 전쟁과 기근이 발생할 것이며, 제자들에 대한 음모와 박해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큰 환란에 뒤이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전의 붕괴, 전쟁과 음모, 박해와 기근과 같은 환란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갖 환란과 재앙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이런 환란과 재앙을 딛고 역사는 앞으로 나가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의인들을 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을 다시 모을 때까지 어떤 환란과 역경에도 굴하지 말고 견디어 내라는 말씀이요,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의 핵심은 멸망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 속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의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눈을 가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전의 붕괴와 전쟁, 온갖 음모와 환란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듯, 우리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이 마지막 끝이 아닙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고 역사는 진전하며, 이 모두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희망의 시간을 향해 서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고 견디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겠다는 희망의 시간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주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시간, 우리 삶과 인격의 궁극적인 완성에 대해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서 우리 모두는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짐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지막 시간으로 걸어가는 것이 파멸과 멸망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차고, 때가 되면 주님께서 권능과 영광으로 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의 파괴, 온갖 재앙과 환란에서도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생의 온갖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길을 걷는 우리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며, 우리가 걷는 길의 마지막 종점이 주님의 만나는 곳이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우리의 눈을 가리지 않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첫째가는 계명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은 첫째 가는 계명을 구약성경의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은 인간 존재의 전체를 뜻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이 계명을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아 들어라하고 먼저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경건한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어라하며 시작하는 신명기의 이 계명을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바칩니다. 매일 두번씩 이 계명을 되뇌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계명을 인용하시며, 율법학자의 질문에 훌륭히 대답하십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질문에 충분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굳이 레위기 19 18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두 계명이 전혀 연결지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두 계명을 덧붙이신 이유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실상은 하나이고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없으며 다른 하나를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은 너무나 쉽게 독선과 독단, 아집으로 변해버립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유럽에서 가톨릭을 믿는 나라와 개신교를 믿는 나라가 30년 동안 전쟁을 합니다. 물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 표면적으로는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사랑은 너무 쉽게 독선으로 변합니다. 또한 하느님 사랑은 너무 쉽게 자기 과시로 변하기도 합니다. 주위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질주하다 보면 목표와 목적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면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 역시 쉽게 부패합니다. 사랑은 너무 쉽게 소유욕, 지배욕, 질투와 뒤섞이고 너무 쉽게 변해버립니다. 말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집착과 애착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어 놓으면 너무 쉽게 욕망으로 변해버립니다. 이웃사랑을 온전히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도 멀리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굳이이웃사랑을 첨가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적 관계를 분명히 깨닫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을 우리는 요셉 성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율법에 충실하고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요셉은 법대로,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약혼녀 마리아를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했다는 뜻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단죄 받지 않도록, 마리아의 인격과 체면이 손상 받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게 되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두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샘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줄기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맹목적이고,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사랑은 부패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예리코 소경

복음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1부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으며, 2부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3부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제2부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라는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소경과 예수님의 만남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으로 마르코 복음의 제2부는 끝나고 제3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제2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좀 더 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가에서의 복음선포를 중단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은 세차례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며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세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받을 보상이나 영광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첫번째 수난 예고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두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놓고 서로 다툽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제자들은 영광의 날에 하나는 예수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의 청원에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하고 되묻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은 세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의 질문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잠시 우리가 집중하고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번째 수난 예고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의 장소에 예루살렘 직전에 계십니다. 그곳 예리코에서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경에게 제자들에게 했던 똑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대답에 그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 청원대로 그는 눈을 떴고, 곧바로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자 마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여정에 동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리코 소경 가운데 참으로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본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참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지, 예수님을 참으로 따라나선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자 예리코 소경에게 하신 질문,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 수 있게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어,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복음의 기쁨

오늘은 전교주일이고, 교회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을 기쁨을 누리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복음이라는 말 자체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셨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치유와 용서가 넘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기쁘고도 복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을 기쁨으로 여기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물론 인간의 기본적 필요는 채워져야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그러하고, 재물도 마찬가지이며 성적인 욕망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결핍이 충족되었다고 멈추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욕망은 한계를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즉각적이고 외부적이고 물질적인 문화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을 쉽게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이자 위험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기쁨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실망과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샘솟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또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로잡으시고 그 사람 안에서 살아 계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와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줍니다. 이제까지 살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체험하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복음의 기쁨은 잠깐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세상에 실망하고 사람에 실망한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인생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을 줍니다. 험한 세상을 나름의 방식대로 꿋꿋하게 살아갈 용기라는 힘을 줍니다.

복음의 기쁨을 체험한 이들은 세상에 자신이 체험한 기쁨을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다락방에서 숨어있던 사도들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복음의 기쁨을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하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하고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고, 우리의 삶에 힘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전교주일에, 복음의 기쁨이 먼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가득해지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복음의 기쁨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고, 모든 이들이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청년의 질문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에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또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질문을 가집니다. 우리 삶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인생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궁극적인 신비는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대변하여 오늘 복음의 청년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미 어릴 적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대답합니다.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삶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고 훌륭한 삶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함정도 있고 위험도 있습니다. 계명과 율법은 인간 삶의 외적인 행동과 행위에 집중됩니다. 더구나 그것들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살인해서는 안되고, 간음해서도 안되며, 도둑질해서도 안됩니다. 모두가 금지와 규제입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모두가 선하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요청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요청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청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산을 팔아서 자선하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요청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입니다. 재산과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사람은 재산과 재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보다 재물과 재산을 더 앞세우고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재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갈망에 제대로 응답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며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이 말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인생의 노력으로 이룬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이루고 쌓아올린 것으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가치도,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 모두가 실상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구하고자하는 영원한 생명, 제자들이 놀라 질문하던 구원, 인간이 쌓아올리고 이루어 놓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탱하고 있고,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의 삶을 감싸 안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손이 죄짓게 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을 자를 것이며,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말씀이며 곧이 곧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표현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표현 뒤에 숨겨진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를 희생하고 포기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단식하고 희생하며 절제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삶을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과 눈에 대해서 다시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몸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일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하느님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 몸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과 탐욕을 추구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노동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손으로 만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손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 손이 만든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은 세상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탐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손은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뿌리치며 자기 자신의 것만 챙기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발은 우리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발이 우리 삶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되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손이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탕 속에 있다면 우리의 좋은 마음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가지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것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는 것에서 탐욕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마음을 낳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이웃과 세상,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 눈을 다시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빈 손에 하느님을 담을 수 있기를, 우리의 발로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눈이 사랑과 자비 가득한 시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순교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변방에서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엄청난 박해로 많은 이들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의 거의 모든 교황들이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각 민족들에게 전해질 때마다 박해와 순교는 뒤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200년 전 조선으로 전파된 그리스도교 역시 네 차례에 걸친 엄청난 박해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순교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순교한다는 말에는 박해와 핍박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존 질서와 이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박해가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은 언제나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 자체는 언제나 세속의 지배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인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00년 전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와 그 이념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세상의 질서와 문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신앙의 도전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가장 큰 도전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로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몇 번째 손가락에 꼽힐 만큼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라면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됩니다. 인간도 재산과 지위로 평가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결핍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마음과 영혼의 결핍과 고갈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계속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될 수 없듯이, 물질과 소비로 우리 영혼의 고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갈수록 풍요로워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갈수록 고갈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물질로 온전히 채워질 수 없다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물질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복음은 가르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로 평가받거나 판단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참다운 존엄과 행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전보다 더 많은 도전과 유혹을 합니다. 순교의 본래 의미가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의 증언과 증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가치와 어떻게 다르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할 것인지 묵상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의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은 네 개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으니 복음서의 핵심 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 이후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시고 동시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어색한 상황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이 걸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길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서로가 엇갈립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전해지는 메시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란 히브리말 메시아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구세주 정도로 번역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름이 부어진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이 부어진 사람은 예언자와 사제, 그리고 왕입니다. 그러나 주로 누군가 왕의 자리에 오를 때, 사제가 기름을 부어 그를 축성해 줍니다. “기름이 부어진 사람이란 주로 왕을 뜻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자신들을 구해줄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 36)하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빵도 주고 자리도 주고 권력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빵과 명예와 권력의 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직감하신 그리스도의 길은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는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 삶의 방식을 전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고,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온전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내가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길인지 성찰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시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누구이신지 다시 질문하고 묵상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에파타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진 특징입니다. 동물들도 소리를 내고 몸짓을 하여 의사소통을 하긴 하지만, 그것을 언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듣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듣고 말함으로써 단순히 정보만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문화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바꾸어 말하면 듣고 말하기가 안되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이게 안되면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가 상당히 훼손당합니다.

저는 사제 서품을 받고 오랜 시간 동안 외국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나 듣고 말하는 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온 사제들과 함께 살았는데, 듣고 말하는게 시원찮으니 사제들과의 대화에도 쉽게 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식사 시간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자존심도 상당히 상처받았습니다. 이렇게 듣고 말하는 것은 정보 교환이나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말하기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의학적이고 생리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정신적 압박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듣고 말하기가 안되어서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독재자는 민중이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에 듣고 말하기가 힘든 것은 사회적인 병리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귀먹고 말 더듬는 것은 총체적으로 비인간적 상태와 상황, 비구원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주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주님의 치유가 단순히 의학적인 것만도 아니고,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것만도, 또는 사회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회복시켜 주시고 인간으로서 충만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것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영원한 것을 갈망하고, 오로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찾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기도하고, 인간만이 경험세계 안에 있는 인생에 만족하지 않고 그 너머의 의미를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인간이고자 할 때, 우리는 초월을 향해 열려있고, 하느님을 향해 서있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신 다음, “에파타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귀와 입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으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 구원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을 묘사하며,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치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있을 때, 주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그렇다면 나는 참으로 귀가 열려있고, 입이 열려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내 자신과 내 삶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시편 51,17).


생태적 회개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고 동시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부터 다음달 10 4일까지 교회는 창조 시기라는 이름의 한달을 지냅니다. 이 시기 동안에 교회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며 이웃들과 함께 연대합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를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인 오늘,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찬미받으소서>라는 제목의 가르침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재작년에 매 주일마다 주보로 <찬미받으소서>요약문을 함께 읽기도 했습니다. 오늘 교황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며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이 가르침을 펴내신 가장 큰 이유는 기후변화, 정확히 말해서 지구 온난화입니다. 지구 온난화란, 지구의 평균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1, 2도가 더 올라가도 자연계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집니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 바다의 수면이 올라갑니다. 그럼으로써 바다 생태계가 교란됩니다. 오늘 하루에도 지구상에는 죽어가는 생물종이 엄청납니다. 우리 체온이 1, 2도 올라가면 우리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해보면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과학자들은 지금보다 지구의 온도가 4도 더 올라가면, 지구의 70%가 사막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지나친 에너지 사용과 쓰레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역사상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내고 있고, 겨울을 가장 따뜻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과거 그 어느때보다 우리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버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됩니다. 입던 옷도, 먹던 음식도, 공장에서 버리는 모든 것도 쓰레기가 됩니다. 핵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핵 발전소에 들어가서 나온 모든 것, 핵 방사선에 노출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됩니다. 핵 폐기물은 현재의 과학과 기술의 능력으로는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냥 땅에 묻어 놓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의 핵 오염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전하다면 자기 땅에 버리고 묻으면 되지 왜 바다에 버리겠습니까. 사실 이미 우리나라에도 경주에 방폐장, 다시 말해서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가 있습니다. 더 나가서 시간이 지나면 노후한 핵 발전소 그 자체가 거대한 쓰레기가 됩니다.

정부도 알고 기업도 알고 있지만, 당장 중단시키지 않습니다. 경제를 위해서입니다. 경제를 위해서 우리가 우리 자식 세대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도 여러 차례 경고하십니다. 경제와 과학이 우리에게 혜택도 가져다주지만, 그것이 가지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편하게 살려고 사용하는 에너지와 우리가 사용하다가 버린 쓰레기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우리가 지구에 함부로 대한 결과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의 회개는 생태적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회개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를 위한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좀 더 검소하고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덜 사용하고 덜 소유하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기쁨을 얻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은 결국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보여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에 지구 모든 생물종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지난 7월말부터 한달이 넘도록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연속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대목으로서,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끝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불리 먹었다고 당신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빵과 물고기 너머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그게 뭔가 어리둥절해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자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고 우리가 묵상할 부분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사람들은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실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사람들은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은 이성적으로 파악되기 힘들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중들의 반응은 솔직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 우리가 이성으로 파악해서 아는 것은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라고 합니다. , 사랑은 새로운 앎을 가져다주고, 그렇게 새롭게 알면 새롭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머리로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슴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나서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또 그렇게 알고있습니다.” 믿음이 알게 해 줍니다. 알아야 믿게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참으로 믿어야 앎이 열리고 깨우침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알아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어야 알 수 있는 분이고 사랑해야 알 수 있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갑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응답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응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지난 4주 동안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연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첫 시작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천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의 의미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산다는 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먹는 것으로 유지되고 지속됩니다. 빵과 물고기는 인간이 먹고 살기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양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가 육체적으로만 먹고 살기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으로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참으로 영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 무엇인지 밝혀 주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우리가 참으로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참으로 영을 지닌 존재로서 살기 위해서는 빵과 물고기 너머 생명의 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생명의 빵이란 다름아닌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살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먹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써 영원 안에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 안에 갇히지 않고 영원을 향해 서 있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먹고 사는 일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예수님은 머무르시고, 우리의 온 삶이 예수님의 의해 지탱되며,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온갖 수고를 하여 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을 나누기 위해 포도주를 만들어 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 노동과 노고의 결실이고 우리의 슬픔과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봉헌되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가 되듯, 우리의 삶이 주님과 하나되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머무르시며 살아계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성경을 펼쳐 읽으면,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을 돌보시며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끌어 가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느님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을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통하여 그리고 아무도 주목조차 하지 않는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은 마리아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를 통하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지만, 마리아를 보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꿰뚫어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바로 주님의 어머니라고 예언합니다. 엘리사벳의 예언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마리아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순명과 결단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어머니라는 사실은 단지 예수님의 출산과 양육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하시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하셨습니다. 루카복음 8장을 보면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23장에서는 예수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성모님이 사도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여정에 함께 했던 어머니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찢기는 가슴으로 지켜본 어머니이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활동한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엘리사벳이 예언한 대로, “내 주님의 어머니이고 사도들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가 모든 신앙인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언제나 예수님 주변에서 소리없이 예수님을 도운 어머니가 우리 인생 여정의 길에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가 우리 삶의 시련과 고통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신 어머니가 우리가 바치는 간절한 기도에 함께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여정이 끝나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아 영원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 승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오르셨다는 믿음입니다. 모든 신앙인 역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마리아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어머니 마리아가 세상의 온갖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온갖 어려움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가끔씩 제 마음을 되돌아보고 헤아려 봅니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딱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 마음이 한결이거나 하나인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내 마음 속을 계속 들여다보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느끼거나 만나기도 합니다. ‘, 여기에 하느님이 라는 사람의 씨앗을 뿌리시고, 숨을 불어넣어셨구나하는 부분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심층 심리학 역시 마음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마치 빙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빙산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우리는 그 빙산의 제일 꼭대기 층만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90%는 바다 속에 잠겨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구조는 빙산과도 같아서, 우리가 알고 있고 의식하고 있는 우리 마음이란게 사실은 물 위에 떠 있는 10%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층 심리학은 이 10%의식 속에 있는 자신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우리가 잘 모르고 의식하지 못하는 90%무의식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90%를 이루는 깊은 층의 우리 마음이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 자신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의식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갈 때 행복해지고, 반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면 마음이 아프고, 심한 경우에 몸도 아프다는 것입니다. 심층 심리학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루는 깊은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때 가장 행복하고 충만해집니다.

제가 얄팍한 심리학적 지식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이러한 심리학의 관점으로 우리의 생명을 들여다보면 우리 생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라는게 여러 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가장 윗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명입니다. 빵과 물고기를 먹어야 지속되는 생명입니다.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의 깊은 층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 내가 받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오히려 제일 윗층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명, 그리고 진짜 자기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받는 생명이고, 이를 우리는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혼은 빵과 물고기만으로는 충만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부터 양식을 얻어야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 동안 주일미사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계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다시 그 내용을 되돌아보면,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람들은 빵을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로 채워지지 않는 생명, 빵과 물고기 너머의 생명을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가장 깊은 층의 생명이 있고, 바로 그 영혼의 굶주림은 하느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양식,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키워 나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몸이 우리의 영혼을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목격하고 경험한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빵의 기적의 참다운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그 사건을 두고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란 사건 너머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깨달을 때, 그 사건이나 사물을 우리는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이 일을 표징이라고 부른다면, 사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사건 너머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빵과 물고기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영원한 갈망과 갈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빵과 물고기라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빵과 물고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참다운 생명은 빵과 물고기만으로 충족되지 않으며, 인간의 참된 삶은 육체적 한계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의 시선 너머에까지 다다르고, 인간 마음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정신과학이 다 잴 수 없고, 인간의 마음을 심리학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은 영원을 향해 서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생명과 삶은, 참으로 인간 그 자체는 영원을 향해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영원을 향해 서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으라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찾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양식,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빵이고, 예수님 바로 당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삶이 영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이고 참된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묵상해보면, 우리의 삶이 단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장수를 했다고 해서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해서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건강과 장수, 재산과 평판을 훨씬 더 넘어서 있는 것이고, 영원을 향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노쇠와 병고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고, 우리가 많지 않는 재산으로도 기쁘게 살 수 있게 도와 주시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인정 없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은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있고, 우리의 삶과 우리 인생이 하느님의 크신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찾고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즉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이들을 배불리신 기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로 옮겨 가셨고, 이미 병자의 치유를 목격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 마침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먹고 남은 것만으로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많은 군중을 빵으로 먹이시듯, 예수님 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좀 더 묵상해 볼 점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빵의 양을 많게 하신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자신의 것을 내놓자 이루어진 거대한 나눔이 일어났는지 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내놓은 빵을 들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후에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전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는 어린 아이의 마음도 훌륭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이 몇 개 되지 않는 빵과 물고기를 모든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주님께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것들을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가진 나약한 마음을 강하게 바꾸어 주시고 비뚤어진 탐욕도 바르게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의 우리가 가진 것들을 아름답게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성체성사의 신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이 예물준비성가를 부르며 예물을 봉헌할 때, 사제는 혼자 예물준비 기도를 바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 기도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인간이 땅을 일구어 얻은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더 나가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친 것을 도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양식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둔 결실을 참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귀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가 힘들여 이루어 놓은 것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더 나가서 주님께서는 주님은 단조롭고도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삶을 최고로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삶과 인생을 더욱 의미있고 귀하며 가치있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당신의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도움으로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게 변하도록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지난 주에 초복을 지냈고 이번 주간 중에 중복을 지내게 됩니다. 여름의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휴가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좋은 휴가 보내시길 빌고, 또 계획이 없더라도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휴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휴식을 권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쉰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쉬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밤잠을 설치면 다음날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쉬고 잘 잘 수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것이 잘 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쉼은 치유되고 회복되는 쉼입니다. 우리는 종종 힐링(healing)”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또 무엇을 보았더니 힐링이 되더라, 어떤 음악을 들었더니 힐링이 되더라, 그 음식을 먹었더니 힐링 되더라, 하고 말합니다. 이 힐링이라는 말 안에는 결국 치유와 회복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찢겨지고 부서진 내 마음이 치유를 받는 것, 온갖 피로와 상처에서 회복하는 것, 내 실수와 잘못, 내 부족함과 약점 때문에 넘어졌던 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 내 정신과 영혼이 새로운 기운을 채워 넣는 것, 이 모두가 힐링입니다. 이런 힐링이 되는 휴식이 참다운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다운 휴식을, 참으로 힐링이 되는 휴식을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참다운 휴식을 하느님의 휴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창세기 2장의 첫 구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쉬셨던 이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라고 불렀고, 이 날을 일하지 않고 거룩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가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 자신을 창조하신 그 시간으로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모습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살이에 찢기고 상처받고 훼손된 지금 내 모습에서 하느님이 주신 참다운 내 모습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치유이고 회복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힐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휴식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내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이 가득해집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힐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역시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다운 쉼이 없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잘 쉬기 위해서 따로 외딴 곳으로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휴대폰과 텔레비전과 함께 동행합니다.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거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 가운데 많은 시간을 일상을 멈추고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한 주간 가운데 주일을 잘 보내는 것 역시 치유와 회복의 휴식이 됩니다. 참다운 휴식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야 이루어 지는 것이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이루어 집니다.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이 여름의 한 가운데 좋은 휴가와 참다운 휴식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잘 쉴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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