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지난 주에 초복을 지냈고 이번 주간 중에 중복을 지내게 됩니다. 여름의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휴가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좋은 휴가 보내시길 빌고, 또 계획이 없더라도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휴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휴식을 권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쉰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쉬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밤잠을 설치면 다음날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쉬고 잘 잘 수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것이 잘 쉬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쉼은 치유되고 회복되는 쉼입니다. 우리는 종종 힐링(healing)”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또 무엇을 보았더니 힐링이 되더라, 어떤 음악을 들었더니 힐링이 되더라, 그 음식을 먹었더니 힐링 되더라, 하고 말합니다. 이 힐링이라는 말 안에는 결국 치유와 회복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찢겨지고 부서진 내 마음이 치유를 받는 것, 온갖 피로와 상처에서 회복하는 것, 내 실수와 잘못, 내 부족함과 약점 때문에 넘어졌던 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 내 정신과 영혼이 새로운 기운을 채워 넣는 것, 이 모두가 힐링입니다. 이런 힐링이 되는 휴식이 참다운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다운 휴식을, 참으로 힐링이 되는 휴식을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참다운 휴식을 하느님의 휴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창세기 2장의 첫 구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쉬셨던 이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라고 불렀고, 이 날을 일하지 않고 거룩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가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 자신을 창조하신 그 시간으로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모습으로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살이에 찢기고 상처받고 훼손된 지금 내 모습에서 하느님이 주신 참다운 내 모습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치유이고 회복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힐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휴식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내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이 가득해집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힐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역시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다운 쉼이 없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잘 쉬기 위해서 따로 외딴 곳으로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휴대폰과 텔레비전과 함께 동행합니다.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거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 가운데 많은 시간을 일상을 멈추고 따로 외딴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한 주간 가운데 주일을 잘 보내는 것 역시 치유와 회복의 휴식이 됩니다. 참다운 휴식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야 이루어 지는 것이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이루어 집니다.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이 여름의 한 가운데 좋은 휴가와 참다운 휴식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잘 쉴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우리 몸의 온도는 36.5도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플러스 마이너스 1도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만, 적정 체온은 36.5도입니다. 우리 몸의 온도가 1 2도 올라가면 온 몸에 통증이 생깁니다. 춥고 온몸은 두들려 맞은 듯이 아픕니다. 온도가 더 오르면 우리 몸의 장기가 제 기능을 쉽게 못합니다. 우리 몸이 그러하듯, 지구의 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의 온도 역시 계속 상승하면 지구가 몸살을 앓습니다. 지구과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지금보다 지구 온도가 평균 4도가 상승하면 지구의 70%가 사막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으며, 바다의 온도 역시 상승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200년 전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다시 말해서 인류가 석탄과 석유를 사용한 이후로 지구의 온도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도 상승의 주범은 석탄과 석유에서 나오는 탄소입니다. 오늘날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바로 탄소입니다. 그래서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은 재생에너지 100%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국제적 협약들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게 된 이후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고, 우리 역사 속의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음식 쓰레기는 넘쳐나고,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 소유하고 소비한 것들이 쓰레기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지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힘겹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신음이 곧바로 우리들에게 덮쳐 올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1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지구의 신음을 들으며 복음을 살아가고 하는 우리들에게 복음의 요청으로 그리고 주님의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는 지구과학적 사실을 넘어, 사회경제적 문제를 넘어 신앙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이제 우리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여행하고 소비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경험한 지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요청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좀 더 단순하고도 소박한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 가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한 삶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면, 새로운 눈과 새로운 정신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고, 삶이 우리에게 주는 좋은 기회들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절제의 삶을 살게 되면, 절제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온갖 집착과 욕망에서, 가지지 못해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부러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태도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우리에게 주시는 요청이자 도전입니다. 더욱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으로, 그리고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치유해 주시는 치유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참된 스승이시고 치유자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병고와 슬픔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길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확신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지혜에 놀라고 예수님의 기적에 경탄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그분을 배척합니다.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선입견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의 선입견은 유다교 지도자들의 선입견과는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선입견은 신앙적인 것이라면,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에 사람에 대한 선입견입니다. 고향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지만, 실상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이웃을 바라볼 때 너무 쉽게, 그 사람의 과거, 겉모습, 직업, 다른 사람에게 들은 평판 등에 쉽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진짜 모습을 놓쳐버립니다.

이런 선입견의 밑바닥에는 닫힌 마음이 있습니다. 들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귀는 있지만 귀가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잠언 11,2에서는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뒤따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집회서 6, 33귀를 기울이면 지혜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선입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겸손해야 하며, 귀를 기울이는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듣는 마음입니다. 열왕기 상권을 보면, 하느님이 솔로몬 임금에게 무엇을 청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지혜와 분별의 마음을 주십니다. 참다운 지혜 역시 듣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듣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자신의 고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겸손, 듣는 마음, 지혜는 어떤 면에서 하나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 역시 겸손, 듣는 마음,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기적 역시 하느님의 능력과 신앙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실상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더욱 낮추어서,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참다운 예언자의 음성과 이끄심을 식별하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시도록 청하면서 오늘 미사를 봉헌합니다.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여인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여인은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이고, 다른 한 여인은 12년을 살고 죽은 소녀입니다.

먼저 열 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인에 대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여성이 달거리를 할 때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 여성은 열 두 해를 하혈하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12년 동안 육체적 질병이 그녀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율법 역시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12년을 부정한 상태로 산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병에 대해 드러내 놓고 고쳐주십사 청할 수도 없었고, 또한 질병이 치유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처지였기에 그녀는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예수님 뒤를 따라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에 대었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깊이 숨겨진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여인에게 배워야 할 것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입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주님 뒤에서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믿음과 용기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실 주님 말씀대로, 그녀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굳센 믿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 주십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열 두 해를 살다 죽은 소녀를 만납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죽은 소녀이기 보다는 그녀를 구해달라고 청하는 아버지 야이로 입니다. 아버지는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딸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제 딸을 죽었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오히려 주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키십니다.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실 때, 소녀는 일어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실 때 우리는 일어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소녀를 보며 깨달어야 할 것은, 주님의 손 안에 참된 생명이 있고,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을 때 참으로 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절망하지 말고 절대 희망을 놓치지 말고,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를 열어놓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 주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반대로 죽었던 소녀는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셨을 때 일어섭니다. 죽었던 소녀도 그리고 딸의 죽음을 전해 들었던 아버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히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는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면,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그 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예수님 복음 선포의 첫번째 장소는 갈릴래아 호수가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는 남쪽끝에서 북쪽끝까지의 거리가 20km가 넘고, 그 둘레가 50km가 넘는 아주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종종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호수가에는 크고 작은 마을과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들어본 도시, 카파르나움, 티베리아스, 벳사이다, 겐네사렛 등이 이 호수 곁에 형성된 도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가시기도 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첫번째로 예수님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밤사이 배를 타고 건너가시면서 예수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거센 돌풍이 일었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겁에 질립니다. 밤이라 앞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바람은 파도를 일으켜 배가 제 방향을 가지 못하게 했으며, 파도는 배를 넘어와 버립니다. 앞은 보이지 않고, 방향 감각은 잃었으며, 배는 서서히 물에 잠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급하게 깨웁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어 고요하게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되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면,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우리의 삶과 인생은 호수 건너편 목적지로 건너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목적지에 다다르기 까지는 온갖 돌풍과 어둠, 파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으며, 자주 방향을 잃습니다. 어느 순간에 내 발목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위험을 피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돌풍과 파도 없는 호수가 없듯이, 고통과 어둠과 슬픔 없는 인생 역시 없다는 것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풍랑과 호수를 고요하게 하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주님께서 함께 타고 계시는 배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과 신학의 초석을 세운 교부들은 종종 교회를 배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신 배를 타고 가면 안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신 그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그 배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인생의 호수를 건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배에 함께 타야 하고, 또 다른 한편 내 인생의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온갖 어둠과 돌풍과 파도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우리 인생의 호수를 건너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 안에서 우리는 호수 건너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여정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인생도 신앙도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빛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는 그 이름이 선생님일 수도, 친구, 또는 남편과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제라는 이름은 제 인생을 통해 가장 빛나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우연히 주어지거나,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낳는다고 곧바로 어머니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가르쳤다고 선생님이라고, 결혼했다고 곧바로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빛나는 이름들은 관계 안에서 그리고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름입니다. 아기를 가지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칠판 앞에 서지 않더라도 우리 인생의 선생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기를 낳는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면서 되어가는 이름입니다. 친구와 부부는 친구 맺는 그 순간에 또는 결혼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희생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딱 그만큼 친구가 되어가고 부부가 되어갑니다. 사제와 수도자 역시 서품과 축성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자신의 서약에 충실하는 만큼,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만큼 되어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인생은, 또한 인간은 이렇게 되어가는 존재이고, 형성의 과정 중에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그만큼 되어가는 존재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이집트 왕궁을 빠져나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에게는 40년이라는 광야의 생활이 필요했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까지 또 다른 40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오로로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활동하기까지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13년을 회개의 생활을 했습니다. 신앙 역시 인생 전체를 통해서 성숙해가고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땅에 뿌려질 때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 커져서 새들이 그 그늘에서 쉴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의 매일 매일의 삶 안에서 나의 헌신과 포기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헌신하고 포기하는 그 만큼 부모가 되어가고, 부부가 되어가고, 사제와 수도자가 되어가듯 하느님 나라는 나의 일상 안에서 나의 헌신과 포기를 통해서 내 안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과정 속에 있습니다. 신앙 역시 서서히 성장해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또는 신앙은 인간의 눈에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으며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작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쉽게 지나지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인 되어갑니다.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그것들을 위해서 나의 헌신과 포기를 바칠 수 있을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 안에서 큰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인생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내 계약의 피

오늘은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선포된 복음은 마르코 복음이며,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때의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빵을 들고 당신의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가 든 잔을 들어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최후의 만찬을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으로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계약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계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어시고, 그들을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시나이에서 그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면, 하느님은 복을 내려 주시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은 고대 유목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짐승을 둘로 나누어 그 피를 뿌리고, 쪼개진 짐승 사이로 계약당사자들이 걸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계약의 징표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의 징표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더 없이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십계명 돌판을 아름답게 장식한 나무 상자 안에 넣어서 진영 한가운데 모셨습니다. 십계명 돌판을 넣은 상자를 구약성경은 계약의 궤라고 부르고, 계약의 궤를 모신 천막을 만남의 천막이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 계약의 궤 앞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우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계약의 궤를 그 안에 모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고, 이 성전이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바빌론 제국의 침략으로 성전은 붕괴되고, 계약의 궤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내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죽음, 당신의 피, 당신이 들어올리신 포도주가 바로 짐승을 둘로 쪼개어 그 주위에 뿌린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당신의 최후 만찬의 포도주로 이제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이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빵을 들어 당신의 몸이라고 하시며, 당신 몸을 하느님과 맺는 계약의 표징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당신 죽음의 의미가 최후 만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주님께서는 최후 만찬 때 제정하신 성찬의 예식을 당신이 다시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거행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에 성체를 영함으로써, 하느님과 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이 새롭게 갱신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성장해 나갑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구원의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영함으로써 우리의 슬픔과 절망이 기쁨과 희망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고된 삶이 용기를 얻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체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오늘 성체성혈 대축일에, 우리 삶을 감싸고 우리의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만물의 하느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하느님, 그분의 말씀이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모두 한분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철학과 신학적 사유의 결과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던 첫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오늘 전례 독서와 복음은 아니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4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 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은 한분이시지만, 하느님 현존의 세가지 차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만물 위에, 만물 너머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시야와 시선 너머에 계시고, 우리의 경험과 지혜 너머에 계시고, 우리의 능력과 성취 너머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다 알 수 없고, 우리의 말로 하느님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절대적인 신비이시고, 우리가 그 신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멀리 계시는 분이시고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만물을 통하여 계십니다. 멀리 계신 하느님이, 만물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이 당신의 말씀을,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봅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충만하신 생명을 봅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와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통하여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그분은 만물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 위에 내리게 하시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할 때, 그 때 하느님의 영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 성령을 우리 안에, 만물 안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만물 위에, 만물 너머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의 영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자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거룩한 영도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오늘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해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묵상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신비와 은총에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성령 강림의 의미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이 지난 후,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당신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의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제1독서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거센 바람이 불고 불꽃 모양의 혀가 사도들 위에 내려앉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 민족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민족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고 전합니다.

오늘 독서가 전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믿고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자 합니다.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신화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인간의 모습에 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교만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 노력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룬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인류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자랑스러워하지만, 그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인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룬 엄청난 물질문명은 고스란히 자연과 생태의 위기로 인간에게 되돌아옵니다. 인간수명의 연장이 참으로 축복인지 재앙인지도 의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할 때, 우리도 역시 하늘에 이르는 탑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교만이 인류의 언어를 갈라놓았고, 인류를 분열시켰다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각자의 언어로 말하지만 모든 민족이 알아들었다고 전합니다. 바벨탑 이후 갈라진 모든 언어와 민족들이, 바벨탑 이후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의 분열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다시 회복되고 있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다른 민족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들었는지 입니다. 사도들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은 것은, 오늘 사도행전에 의하면,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모두가 성령으로 가득차서, 하나의 언어로 한 목소리로 인간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말하고 듣습니다. 성령의 강림의 가장 큰 의미는 인류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고, 한 목소리로 당신의 업적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사도들 위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이야말로 교회의 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에게 태어났듯이,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사도들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아 성령께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웃과 하느님 앞에 쌓아 올린 교만의 탑을 허물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합니다. 세상 만물을 힘과 돈의 논리로 대하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미워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는 우리의 아픈 마음을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서로 갈라진 마음을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일치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교회가 되며,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희망과 구원을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기도를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하늘로 오르심

오늘은 주님의 승천대축일입니다. 오늘 승천대축일에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이 전하는 하늘이 단순히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도 아님을, 우주선을 타고서야 도달하는 우주의 공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곧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제자들의 시야 너머입니다. 제자들이 눈과 귀 너머에, 제자들의 경험과 지혜 너머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리의 말로 다 표현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 다 파악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체험하는 곳입니다. 다 말할 수 없고 다 알 수는 없지만,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계속 체험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은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고 두 눈이 멀어버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곳도 하늘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부르심 역시 하늘에서 울려왔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그렇게 보면, 내 마음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 바로 그곳이 하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그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가서 닿는 곳이고, 우리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시는 곳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아 하느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시는 곳 역시 하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이 어렵고 마음이 지쳤을 때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만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하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비로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며 째째하게 굴던 부끄러운 내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을 우리가 올려다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세상을 더욱 각박하게 살아가며, 우리의 삶이 더욱 지치고 어려워집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좀 더 여유있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늘을 올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를 보면,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한 하늘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용기와 위로를, 내가 겪은 사랑과 화해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사랑과 화해를 체험하게 해주신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승천대축일에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그 하늘, 우리도 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하늘을 보며 힘들고 지친 우리 마음이 위로와 용기를 받기를 청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그 위로와 용기를 이웃들 앞에서 당당히 증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하늘에 가 닿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루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의 큰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로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이라 생각하지만, 사랑하기를 힘들어 하고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그 모두에게 사랑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오늘 요한복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새로운 계명을 전해줍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런 주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은 서로의 관계를 바꾸어 줍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당신의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되게 하십니다.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친구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랑이라 여기지만 상대방에게는 억압과 구속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친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쉽게 변하고 쉽게 부패하는 것은 친구로 여기지 못해서 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베풀어 주거나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주기 보다는, 같은 자리에 서고 같은 아픔을 느끼며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산을 주는 것보다 같이 비를 맞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동등한 자리에서 벗이 되는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전부를 내어 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전부를 내어 놓았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대로 우리가 전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까지는 아닐지라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 목숨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존심은 내려 놓아야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포기하고, 내놓고, 희생하고, 손해보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 전부를 내거는 모험이고, 이런 모험은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압니다.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시며 우리의 처지와 품위를 높여주신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배우고 닮아 하나씩 우리 삶이 변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모든 부부들이 더욱 더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가정들이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더 깊이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 모두가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했던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이 새겨지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부르심의 의미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그리스도인의 사명, 이 모두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이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함께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 때 그 당시에는 느낄 수 없고 몰랐었지만 돌아다보니 그 때 하느님이 우리 자신을 이끌어 주셨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과정은 다양한 계기와 동기들의 결과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다양한 계기와 동기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삶을 계획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나의 계획과 실행 너머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보살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마음의 뒤에는 하느님이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도 오늘 복음에서 양들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잠깐 바오로 사도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서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바오로는 자신을 신앙인으로 또 사도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도 같이, 우리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로,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서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인으로 부르심 받고 사는 사람이지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수도자, 평생을 하느님 백성에 대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제가 그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베네딕도와 프란치스코, 이냐시오가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에 충실했던 분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교회를 쇄신하고 신앙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들의 삶과 기도의 모범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또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수도자와 사제들이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부르심에 더욱 충실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또한 사제와 수도자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청원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부활의 선물

부활대축일 이후 계속해서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활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남으로써 이해되고 납득되는 체험의 사건이고, 믿음으로써 이해되는 신앙의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에 관한 복음을 묵상해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엄청난 부활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 오늘날 우리도 체험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그 선물에 대해 오늘 잠시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의 이런 말씀과 인사는 부활 이후에만 나옵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실 이러한 평화는 이미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28).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평화가 주님의 부활로 성취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가끔씩 기도할 때 이런 평화를 체험합니다. 어떤 감정이나 어떤 외부적인 감각도 이런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의 평화는 분명히 부활하신 그분의 선물입니다. 이런 평화는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용기를 가지게 하며 희망을 북돋아 줍니다. 주님의 평화는 제자들을 변하게 만들었고, 오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하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책으로, 말씀이 글자로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과 글자는 성경을 읽는 사람과 함께 자라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이 오늘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도록 인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제자들의 용기가 우리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빵을, 오늘 복음에서는 물고기를 잡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빵은 제자들과 주님을 일치시켜 주시고, 제자들 서로를 결합시켜 주시며, 모든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이 일치의 식탁에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고, 사도들과 하나됩니다. 성체성사는 주님과 하나되고 사도들과 하나되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성체성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의 은총을 우리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우리가 더욱 굳세어 지고, 주님께서 성경을 밝혀 주시어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당신 몸을 주시어 우리가 주님과 교회와 하나됩니다. 주님 부활의 선물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기를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부활의 체험

예수님의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입증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깨달음의 사건이고 신앙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게 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게되는 것은 그것이 체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된 것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곧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체험은 몇몇 사람이 비밀스럽게 부활하신 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체험은 복음서에 남겨져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원초적 체험은 지금 여기에서도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부활의 체험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게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주님 부활이 체험되는가 하면,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위대한 성인들의 체험을 통해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활은 체험으로 이해되고 깨달음으로 이어지며 신앙으로 전해지는 사건입니다. 지난 주 부활대축일 이후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의 체험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장면을 묵상해보면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마지막 만찬이 우리 마음 안에 떠오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향해가던 제자들과 동행하십니다. 처음엔 몰랐지만, 제자들은 그분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분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바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수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먹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첫번째 성목요일 밤 만찬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목요일밤의 만찬,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제서야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곳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 십자가의 상처 속이었습니다. 모두가 비껴가려고 하는 그곳, 모두가 넘어가려고 하는 그곳, 그 아픔과 상처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주님 십자가 고통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을 때,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우리가 성금요일의 고통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수난의 성금요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첫번째 부활절의 아침이 밝기 전, 아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모두가 배신하고 외면하고 도망갔던 바로 그 자리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찾아갑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가장 허무한 사건이요 무덤은 가장 쓸쓸한 자리이지만, 우리가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할 때 오히려 부활이 체험됩니다. 첫번째 성토요일의 어둠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무덤을 지키던 마리아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무덤을 덮고 있던 성토요일 어둠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자리는 성목요일 밤의 만찬 안에서, 성금요일의 당신 상처와 고통 안에서, 그리고 성토요일의 당신 무덤 앞에서 입니다. 주님의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 각자의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고 이겨낼 때, 그리고 끝까지 침묵과 어둠의 주님 곁을 지키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우리 역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역시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부활의 깨달음

인생을 살다 보면, 이전에 모르고 그냥 지나쳐왔던 일들이 일순간에 이해가 되고 해명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 겪었던 어떤 일이 과거에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는가 하면, 지난 과거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수도 있으며, 그래서 지나간 과거가 마냥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이 다시 느껴지기도 하고, 어머니의 그 말씀과 행동을 그때는 이해못했는데 지금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미 지나가버리고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롭게 펼쳐지게 됩니다. 과거의 어머니가 이해되고 과거의 내가 새롭게 해명됩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있고, 오늘은 과거를 참으로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미래는 오늘 여기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냥 넘어간 일들을 새롭게 해명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눈으로 볼 때 오늘 나의 삶은 더 깊이 이해되는 법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더라도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시신을 싸고 있던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도, 베드로 조차도 빈무덤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아직 어두울 때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직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새로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는 마리아를 시작으로 해서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의 참다운 의미를, 주님께서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리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자신들의 지난 과거가 이해되고 자신들의 삶이 해명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압도되고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참다운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입증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었던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 부활의 눈으로 내 삶의 의미와 내 인생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있었던 어떤 일로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새롭게 이해되고 내 삶이 새롭게 해명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내 인생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충만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주님 부활의 눈으로 이해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억울한 일들을 통해 주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주님 부활의 눈으로 이해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주님 부활의 눈으로 판단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고 우리의 인생을 떠받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깊은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특별히 세례를 받는 이들이 주님 부활로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평화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갈망을 모아,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파스카의 의미

오늘 밤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신 밤, 주님의 파스카 성야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넘어가다”, “건너가다는 뜻입니다. 실상 이스라엘의 역사도 파스카의 역사이고, 우리의 인생도 파스카의 역사입니다. 오늘 파스카의 의미에 대해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는 첫번째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해방되어 홍해바다를 건너간 사건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가려 하지만,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거듭해서 모세를 막아 세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집트에 많은 재앙을 내리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집트 안의 모든 사람과 짐승의 맏배를 죽이시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말씀대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에 바릅니다. 죽음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을 건너갑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무도 죽은 이는 없었습니다. 어린양의 죄없는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넘어가고홍해바다를 건너가서이집트에서 해방됩니다. 이것이 첫번째 파스카입니다.

둘째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탈출, 다시 말해 이집트에서의 파스카를 기념하여 파스카라는 이름의 축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한 주간 동안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파스카 만찬 때는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기억하며 누룩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파스카 축제 전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죽었던 어린양을 기억하여, 오후 3시에 어린양을 잡아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파스카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며칠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당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누룩없는 빵을 들고 당신 몸이라 하셨고, 포도주를 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쏟으실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이후에 잡혀가시고, 파스카 축제 전날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봉헌하는 그 시간,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접하고 나서야, 그분이야 말로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택한 파스카 어린양이시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스스로 피를 쏟으신 파스카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너가심,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심, 이것이 바로 주님의 파스카입니다.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서 건너간 밤,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간 밤, 이 밤에 교회는 주님 부활을 기념하며 파스카 성야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 주님의 파스카를 기억하고 거기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오늘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해서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시는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밤에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심으로써 우리에게도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밤은 우리들의 파스카 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무너진 마음이 주님의 파스카로 새로운 희망으로 건너갑니다. 넘어지고, 상처받고, 길을 잃은 우리의 인생이 주님 파스카로 새로운 용기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부활이 숨어 있었듯이, 우리의 고통과 슬픔 속에 우리의 부활이 숨어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오늘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합니다. 바로 오늘밤에 우리의 삶이 주님의 평화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밤이야말로 우리들의 파스카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인간 본연의 됨됨이를, 그 성품과 인격의 진면목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을 때는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을 때입니다. 체면이나 명성, 재력이나 인맥 등이 다 무의미해지고 떨어져 나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한 사람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고, 더욱이 그가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명백히 예견하고 있다면, 그 때 그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말과 행동이 그 인생의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된다면, 그것은 그의 삶의 총괄이요 그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총괄이요 예수님 마음과 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과 행동을 전해줍니다. 주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첫째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이고, 두번째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오늘 요한복음은 만찬 때의 일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일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만찬의 의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한다는 것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가 전해줍니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주님의 죽음이야말로 죽음과 멸망을 눈 앞에 둔 인간을 구하기 위한 죽음이며, 주님의 몸과 피야말로 생명의 하느님과 새롭게 맺는 약속과 계약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마지막 만찬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체성사를 통해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신 첫번째 성목요일, 그날이 바로 성체성사가 세워지고 사제의 직무가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그 밤을 기억하고 그 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은 발씻김입니다. 주님의 발씻김은 주님 죽음의 의미, 주님 마지막 만찬의 의미, 그리고 성체성사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발씻김에서 드러나는 성체성사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헌신과 봉사입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파스카 만찬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헌신과 봉사는 사제의 헌신으로, 세상을 위한 하느님 백성 모두의 봉사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강론이 끝나면 발씻김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발씻김 예식에 우리 본당의 사제들만이 아니라, 우리 본당 모든 신자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목위원들도 함께 할 것입니다.

발씻김은 또한 정화를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 자체가 정화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세상의 헛된 가치에서, 탐욕과 욕망에서 정화되어 하느님의 숨결로 우리 생명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발씻김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신발을 제대로 신을 수 없었던 옛 사람들의 발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험한 세상과 평탄치 않은 길에서 얻은 상처가 고스란히 우리의 발에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난 발을 보듬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발씻김은 비뚤어지고 상처난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를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가 서로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라고 명하시고, 세상의 가치에서 정화되고 탐욕과 욕망에서 해방되라고 가르쳐 주시며,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첫번째 성 목요일의 밤, 주님은 당신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당신 생명의 성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밤 우리를 정화시켜주시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발씻김 속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첫번째 성목요일 밤의 마지막 만찬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발씻김 속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첫 성목요일 밤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실 것입니다. 아멘.


성지주일 묵상

예수님의 일생은 30년 남짓 됩니다. 그러나 그 30여년 세월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잠깐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신 1년 남짓, 요한복음에 의하면 길어야 3년 남짓한 기간의 활동만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죽음 직전의 2-3일의 일들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상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이 2-3일에 일어난 일들이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증언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르코복음의 주님 수난기는 파스카 축제일 이틀 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 바깥의 첫 마을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집에 들어오면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이 있었고,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하인이 손님의 손과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향유를 부어 드리는 일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입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을 맞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예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두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투루 쓴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죽음을 눈 앞에 둔 예수님은 이 일이 바로 당신의 장례를 앞당겨 치루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예수님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져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오늘 수난기의 두번째 장면은 유다의 배신입니다. 이미 율법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예수님 제자 가운데 한명인 유다가 그 음모에 가담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온갖 구실과 모략과 음모가 한곳에 모여듭니다. 하나의 이유, 하나의 원인이 아닙니다. 각자 나름의 이해관계, 갖가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죄악의 결과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됩니다. 숨겨져 있던 인간의 온갖 악과 미움과 교만이 폭로됩니다. 들킬세라 두려워 드러내지 못했던 온갖 미움과 증오와 폭력이 세상 밖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악이 이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로 모여듭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것, 바로 주님 죽음 직전 2-3일동안 있었던 일이 오늘 시작됩니다. 한편에는 주님께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의 행위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온갖 음모와 죄악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망도 반항도 변명도 없이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고,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주간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이 이번 주간 전례 안에서 재현됩니다. 이번 주간 주님의 십자가 길에 우리 모두 동반하기를 청합니다. 주님과 함께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삶과 죽음,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미움과 악한 마음과 온갖 음모에 대항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이번 주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다짐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십니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을 왔다갔다 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은 다른 때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어떤 시간은 우리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그런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신 분이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눈 앞에 도달했음을 직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될 이 때를 받아들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 당신이 영광스럽게 될 때를 받아들이시며, 우리에게 당신 죽음의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씨앗의 껍데기를 벗고 싹이 트고, 싹이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말씀으로 당신의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을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새롭게 살게 됩니다. 그 새로운 삶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뜻합니다.

더 나가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목숨과 생명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사람의 목숨이 여러 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말할 때, 새로운 차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숨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편으로는 흙의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생명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충만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고통이 있고 물질적으로 어려워도, 그것이 의미있는 것이면 인간은 그것을 견뎌냅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부하더라도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며 인생 자체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 때, 참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고,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숨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시고, 우리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음을,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으로 떠받쳐져 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에 감사드리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간혹 길을 가다 보면, 응급차에 새겨진 지팡이와 뱀의 상징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응급차뿐 아니라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보건과 의료 단체와 기구에는 어김없이 뱀이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상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의술의 신이라 불리는 아스클레피우스가 뱀이 물어다 준 약초로 사람을 치유했다는 신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뱀은 한편으로는 독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독제나 약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보다 더 오래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민수기(21,4-9)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하게 됩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광야에서 그들은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차라리 이집트 노예살이가 더 나았다하며 불평을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샘물도 찾게 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으면,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갈망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벌하십니다. 불뱀의 독 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다못한 모세는 하느님께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의 간청을 들어 하느님은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놓으면, 뱀에 물린 이들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것의 의미는, 마치도 모세가 들어올린 뱀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불뱀에게 물려 고통받는 이들이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보며 치유를 받았듯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바라보면 모두가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곧 하느님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짐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 그리고 하느님의 빛이 드러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조리와 모순의 사건이지만, 바로 그 부조리와 모순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납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으로써 인간은 죄와 죽음에서 치유를 받고 하느님의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빛 안으로 나가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쳐다보며 치유받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통과 슬픔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불합리하며 모순적인 일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려고 애쓰지만, 실상 그 고통 속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 속에 주님이 계시고, 그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 내는 우리의 노력 속에 주님의 부활이 숨어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십자가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과 빛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기를 청하며,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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