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하상 바오로 성인 소개

 한국교회의 충실한 협조자 성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은 경기도 양주군  능래리 "마재"라는 마을에서 순교자인 정약종(아우구스띠노)와 유소사(세실리아)의 둘째 아들로 l795년 출생하였다.그는 어려서부터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유달리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l8O1년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정철상)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그때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경기도 양주군 마현촌 마재부락의 큰 댁으로 낙향하였다.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단신으로 상경하여 여교우 조증이의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익히기 위해 무산에  귀양중인 조동성(유스띠노)형제를 찾아가 수  년간 학덕을 연마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눈부신 활동을 펴게 된다.맨 처음으로 l80l년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신도들의 신앙생활를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 주교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l825년 정하상은 유진길(아우구스띠노)과 의논 후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인 대책을 청구하는 대교황 청원문을 올렸다. 이 청원문은 북경 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보내져 l9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어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브뤼기에르(Brugrere )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l93l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l6세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성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인 안목을 가졌던 사람으로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조선교구 설정 이후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을 쌓았다.
성직자 영입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l834년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l835년 모방 신부, l836년에 샤스탕 신부, 그리고 l837년에  조선교구 제 2 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비밀리에  영입하였다. 학식과 덕망이 있는 성 정하상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 교육을 받아 한국인 최초로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l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 정하상은 l839년 9 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엿는데 그는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였으며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유있게 나타내어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했었다.
성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로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저술하여 박해자에게 천주교의 입장을밝히고 체포된 후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 있게 주장하였다.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 는 불과 2,OO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있게 천주교의 도리를 펴고 박해가 그쳐야 할 것을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성 정하상은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 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으로서 그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삶이었다 하겠다.

성 정하상은 l925년 복자로  시복되었고 l984년 5 월 6 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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