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코로나19 상황도 여러 변곡점을 거치더니, 마침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었다. 덕분에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 기쁨이 생겼다. 그날 아침도 어느덧 청록으로 짙게 물이 오른 산책길을 걷다가 치자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꽃송이 하나하나마다 향기를 맡아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 맞은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양손에 하나씩 스틱을 잡고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분이 편히 지나가시도록 내가 한 켠으로 약간 비켜서려는데, 그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더니 말을 걸어오셨다. “치자꽃 향기가 참 좋지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이 한마디에서 그분의 품격이 느껴졌다. 흔히들 나이 사십을 넘으면 그간 자신이 살아온 모습이 얼굴에 새겨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분의 음성에서 그것을 느꼈다. 품새, 시선 등에서 예사롭지 않은 정갈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만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며, 그간 코로나19로 인하여 마스크를 하고 다니느라 이 좋은 꽃향도 제대로 못 맡았었다는 등 일상적 대화 두어 마디를 더 나누고서 서로 좋은 하루를 기원해 주며 각자 가던 방향대로 길을 이어 갔다.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기분 좋은 여운이 남는 사건이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나는 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할머니를 치자꽃 향기와 함께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책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덧 ‘향기’라는 단어가 화두처럼 나의 상념을 파고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꽃향기로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문득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성경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말은 한 사람의 내면이 바깥으로 표현되는 향기와도 같은 것 아닐까? 그날 아침에 마주친 그 할머니는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 오래 여운이 남는 고상한 품격의 향기를 나에게 남겼다. 나도 나의 말과 행동에서 굳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더라도 진실함과 겸허함으로 삶의 신비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가꾸어 나가고 싶다. 그리고 그 할머니처럼 하얀 백발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