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아침

가톨릭부산 2015.11.02 11:03 조회 수 : 33

호수 1981호 2009.02.22 
글쓴이 김양희 레지나 

수도원 안뜰은 조용하다. 하느님의 기운이 함께 하는 집, 목련의 우듬지에는 벌써 유두를 닮은 꽃망울이 수줍은 꽃술을 머금고 있다. 이렇듯 철따라 꽃을 피우는 자연의 질서 앞에서도 하느님이 계시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인가. 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 직접 속삭이는 하느님의 숨결이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음은 아닐 것이다. 마치 하느님께 자신을 드러내시라고 하는 것은 칼에게 칼 자체를 자르라고 하거나, 이빨더러 이빨 자체를 깨물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 아닐까.‘있음’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가끔씩 수도원을 찾는다. 고귀한 젊음들이 모여 일생동안 주님을 섬기며 사는 곳, 이 세상에 수도원이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지난 2월 2일은 봉헌의 날이었다. 이 땅에서 수도자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왜 이곳으로 오는가.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운명적으로 신을 만나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들. 이 엄청난 불신의 시대에 물질로는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것을 가지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한 사람들. 그들은 세상에서 이미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니 천국은 아마도 그들의 것이 아닐까. 

맨발의 가르멜회 로랑 수사는 평수사로 살면서 신발 수선과 요리사, 포도주 배달 등 허드렛일로 평생을 보내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냈다. 그의 삶과 영성을 담은 저서 '하느님의 현존 연습'은 후세 많은 이들에게 영적 금언이 되었다. 그는 죄인들 사이에서 상석을 차지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집에서 말석에 앉아 생을 마감하기를 택한 것이다. 오늘날 수도원이 정신 문화의 구심점이 되고 있음은 수많은 로랑 형제들의 드러나지 않는 헌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체등이 홀로 졸고 있는 감실 앞에 들어선다. 정갈한 사각 방석 위에 몸을 얹으면 속진으로 때 묻은 심상을 그분께서 어루만져주는 듯 표현할 수 없는 영적 기쁨과 고요가 찾아든다. 복도에 흐르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창문 너머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 피에타상을 감싸고 있는 저 나무는 수많은 시간을 수도자의 애환을 지켜보며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불교 '천수경'에도 청정한 도량에는 도량신(토지신)이 있어 그곳에 사는 수행자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살아 계신 내 주님께서는 분명 자비의 눈길로 당신 사랑하는 아들들을 감싸고 계실 것이다. 수도원의 뜰에 설 때마다 명징하게 밝아오는 것은 생명도 재물도, 내 것인 줄 알고 살아왔던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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