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계급의 등장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이들은 기존의 모든 사회관계를 해체하고 사람들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관계 내지는 ‘금전적 수수관계’ 만 남겨 놓았다. 종교의 따뜻함과 인간 삶의 고귀한 열망을 자기중심적인 차가운 이해타산으로 바꾸어 가며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왔다.
이런 상황에서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돈을 가진 부자들의 지배와 착취를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고 복종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계급이나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고,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그들의 성공신화에 매료된다. 부와 이익이라는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부자들은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기에 현 정권이 어떠한 만행을 구가해도 경제적, 성장적 가치를 앞세우면 말문을 닫는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권력자와 지배자들의 노련한 조작에 끊임없이 이용당해온 서민들의 서글픈 현실이다. 종교 권력자 또는 왕의 억압과 착취를 오히려 경외시한 과거 사회의 어두움이 오늘날 국가주의라든지 반공주의, 안보의식화로 연결되었다. 이는 또 다시 부자 의식화 작업으로 교육과정이나 매체를 통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돈이 곧 자유인 사회에서 우리의 의식은 돈으로 환원되었다. 돈 그리고 돈을 가진 자들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된 사회가 되었고 여전히 이 의식화는 대물림되고 있다. 그러므로 돈이 경전이고 곧 신앙인 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