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남긴 교훈

가톨릭부산 2015.11.04 07:45 조회 수 : 55

호수 2128호 2011.10.09 
글쓴이 김기영 신부 

선교사들이 남긴 교훈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작년 홋카이도 트라피스트 수도원 피정 이후, 두 번째 갖는 선교 사제들의 모임이었다. 공항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한 해가 다르게 옅어져가는 동료들의 머리숱은 그들이 각자의 선교지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장소는 나하(那覇)교구의 미션 비치였다.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창문에는 구멍이 숭숭, 빛바랜 벽칠하며 폐가처럼 보이는 이층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뭘 먹고 그리 커졌는지 모를 야생쥐와 도롱뇽, 바퀴벌레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체모를 퀘퀘한 냄새와 삐걱대며 푹푹 꺼지는 마루 바닥.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침실이 있다는 2층으로 올라가니 찜통같은 더위가 목을 조르고, 게다가 방안에는 찌그러진 야전 침대 하나 덜렁. 이윽고, 참았던 불만이 터져나왔다. ‘아, 이런데서 어떻게 1주일을 보내냐고!’
마중나온 교구청 직원의 이야기는 그랬다. 이 건물은 전쟁 후, 미국 선교사들이 군용 막사를 개조해서 쓰던 곳인데, 지금은 교구의 예산 부족으로 관리가 안 되어서 이 모양이란다. 그 와중에 내 마음을 울린 말마디가 있었다. “선교사? 선교사들이 지내던 곳이라고?”
정말 그랬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벽에 잔뜩 붙어있던 영문 글귀들이 왠지 신경에 거슬리기만 했는데, 마음의 눈을 뜨고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기도문이었고, 철통같이 닫힌 내 마음을 그분을 향해 열어주는 손잡이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 기도들은 전쟁 직후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상처투성이로 살아남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선교사들의 복잡한 심정을 지탱해 준 하느님의 돌보심 그 자체였다. 수 십년 전, 선배 선교사들은 이런 후배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주방 입구에 이런 말을 남겨 놓았다.

‘오, 주님! 당신의 뜻은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만약”, “그러나”라는 말없이 이루어지나이다. 혹, 주님의 섭리가 당신을 이곳으로 이끄시지 않았다면, “만약”, “그러나”라는 말없이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온 몸을 감쌌다. ‘과연 무엇을 바라고 여기 왔던가? 특급 호텔 같은 편안한 잠자리를 찾아서 왔던가? 혀를 살살 녹이는 산해진미를 바라고 왔던가?’ 비록 찌그러진 야전 침대 위에 침낭을 덮고 자든, 먹다 남은 재료로 찌개를 끓여 먹든 내가 머물러야 할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머무는 동안 선배 선교사들이 남겼던 교훈을 배우고,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오히려 기쁨이 샘솟았다. 그렇게 주님의 뜻이 머무시는 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배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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