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약함을 통해 그분이 드러나심을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얼마 전, 히로시마 교구의 원로 사제 한 분이 81세의 일기로 선종하셨다. 1931년 히로시마에서 출생한 신부님은 1945년 8월 6일 14살이 되던 해, 원폭에 의한 방사능 피해를 입으셨다. 그래서 해마다 열리는 평화의 날 기념행사 때, 곧잘 피폭 증언을 하시곤 했다.
당시 한여름이라 신부님은 폭심지역 인근 하천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B-29 폭격기의 굉음을 들었던 것도 한순간, 잠시 후,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고, 고열로 인해 온몸의 피부가 물엿처럼 흘러내렸다고 한다. 치료소에서 살기 위해 있는 힘껏 화상과 싸웠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30일 예수회 신부님으로부터 긴급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세례 후, 기적적인 치유가 신부님에게 일어났고, 생명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참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생사를 뛰어넘어 계시는구나’하며 처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부님은 “나는 핵무기에 의해 죽기보다는 핵무기를 반대하다가 죽는 쪽을 택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196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생활 47년간 과연 신부님은 서품 때의 결심 그대로 부임하시는 공동체마다 핵무기조차 파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고 가꾸는데 최선을 다하셨다. 그리고 그 평화를 심고 키우는 데 꼭 필요한 사랑, 그 사랑을 열매 맺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희생을 몸소 실천하셨다. 더불어, 당신을 자기희생으로 이끄는 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 지극히 거룩하신 그 이름’안에서 받으셨으리라 믿는다.
매달 교구 사제 회의를 갈 때면, 노령에도 불구하고 새파란 한국 신부에게 먼저 다가와서 살갑게 인사를 건네시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신부님이 내가 있는 본당의 전임 사제였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본당 교우들은 잘 지내는지, 일본 선교는 힘들지 않은지 일일이 물어봐 주신 모습은 잊지 못할 선물이었고, 큰 가르침이기도 했다.
지금 내 책상에는 장례미사 때 받은 신부님의 서품 성구가 붙어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 9) 이 말씀이 인간적으로도, 사제로서도 부족한 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평생, 피폭의 상처를 안고 살면서 오상의 예수님도 끌어안고 사신 신부님이 참 존경스럽고 너무도 그립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