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대하여
이동화 타라쿠스 신부 / 노동사목 담당
노동사목을 전담하면서 시민사회와 노동계에서 일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다. 역시나 그들의 투신과 헌신의 바탕은 신앙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반대로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냉담자라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교회가 그들에게 더 큰 힘이 되어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분들 중의 한 분이 노동사목을 접하고서는, 지난 부활 전 한 본당의 합동판공성사에서 20년 만에 고해를 했다. 고해성사 후에 나에게 잔뜩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20년 만에 고해성사를 했는데, 고해를 듣는 사제는 너무나 무성의했단다. 벼르고 벼르던 고해였는데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변명했다.‘당신에겐 20년 만에 있는 일이겠지만, 사제에겐 일상이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곰곰이 다시 생각해본다. 사실 사제로서 신자들의 고해를 정성껏 듣고 공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사제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타인의 어둡고 아픈 얼굴을 마주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가장 약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아픈 마음을 듣고 연민을 느끼고 공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가장 약하고 어둡고 아픈 자리로 옮겨놓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양말에서 연민(com-passion)이나 공감(sym-pathy)은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는 마음을 뜻한다. 진짜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리고 진정으로 슬프고 아픈 마음에 연민을 가지고 공감한다는 것은 나 자신 역시 슬프고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나병을 가진 사람 등 아픈 사람을 만났을 때, 창녀와 세리와 같이 슬픈 사람을 만났을 때, 성경은 어김없이 예수님이 연민을 가지셨다고 전한다. 이렇게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외치게 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일어서게 만든다. 예수님은 연민과 공감 때문에 율법학자들과 권력자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을 알았지만 중단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가장 약하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연민과 공감으로 응답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자신을 가장 아픈 자리로 몰아넣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어쩌면 가장 슬프고 아픈 일이다. 우리 스승께서 그렇게 슬프고 아프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