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착취 당했던 주일학교
김상진 요한 / 언론인 daedan57@hanmail.net
수십 명의 초등학생들이 숫돌이 달린 나무 막대기를 들고 인조석 바닥을 갈았다. 바닥은 인조석을 연마하면서 나온 돌가루가 섞인 시커먼 시멘트 물로 흥건했다. 바닥에 미끄러져 옷을 버린 아이도 있었다. 인조석 연마작업은 토요일마다 몇 달 동안 계속됐다.
1960년대 후반 현재의 동래성당을 지을 때 일이다. 초등학생으로 주일학교를 다녔던 나는 교리는 배우지 못하고 주말마다 성당 공사판에서 잡일을 했다. 그것도 수녀님의 공사 감독 아래서 진행됐다. 우리들은 콘크리트 양생을 위해 설치해 둔 거푸집 사이를 위험하게 오가며 일을 했다.
요즈음 이런 일이 있었다면‘성당에서 고사리 노동력 착취’라고 신문에 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가난했던 신자들의 사정으로 성전 건축은 어려웠다. 공사비가 모자라 공사중단이 여러 번 반복되는 바람에 거푸집이 쳐진 성당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미사를 봐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사리 노동력도 아쉬웠던 것이다. 어른 신자들도 공사장의 허드렛일을 거들었다.
동래성당 3대 주임 김준필(아우구스티노, 1988년 선종) 신부님은 성당 짓느라 큰 고생을 하셨다. 성당 신축을 마무리하느라 1961∼69년까지 8년 동안 사목을 하셨다.
부모님의 반응도 요즈음 신자들은 이해 못 할 것이다. 주일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성당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왔다고 하면 어머니의 얼굴엔 기쁜 표정이 흘렀다. 가난하다 보니 성전건립기금을 제대로 내지 못한 부모님은 아들의 노동력을 대신 바쳤다는데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주일학교 친구들 가운데 성직자, 수도자들이 나왔다. 지금도 그때 친구들을 만나고 있지만 사회에서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하면서 신앙 생활도 열심이다.
요즈음 간혹 동래성당에 미사보러 갈 때 마다 내가 인조석을 갈던 바닥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 시절 신자들은 물론이고 성당의 살림살이는 궁핍했지만 신자들의 신심은 지금보다 두터웠다. 본당 공동체가 겪는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똘똘 뭉쳤던 것이다.
요즈음 시설 좋은 성당에 다니는 우리들의 신심은 어떤가. 성당에서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고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불편과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작은 순교 정신’인데도 간과하는 일이 많았다. 멋진 성당을 드나들 때 마다 어릴 적 공사판 성당을 떠올리며 신심을 다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