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의 삶 속에서
강은희 헬레나
부산가톨릭신학원 교수
다시금 연중 시기가 시작되었다. 성탄 대축일과 연말연시 연휴의 들뜬 분위기들이 차분해지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와 다시 출근을 한다. 나는 나의 출근길을 하이브리드 출근길이라 부른다. 자동차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경로가 시골 풍경과 도시 풍경이 섞여있어서이다. 급할 때야 지름길로 잘 닦인 도로를 타기도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때면 샛길들을 조금 둘러가면서 철철이 변하는 진짜 자연을 느끼며, 그 자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한갓진 길을 따라가던 중, 저만치 떨어진 어떤 인가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노인이 대야를 들고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른 몸집에 오히려 대야가 무거워 보여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 노인이 수도꼭지 앞에서 쪼그리고 앉는 순간 나의 시선은 경탄과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 쪼그리고 앉는 것을 잘 못한다. 그런데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 노인은 아무 어려움 없이 수도가에 쪼그리고 앉아 대야에 물을 받고 있지 않는가! 그 자신에게는 매일매일의 하루를 시작하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 노인이 한없이 빛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노인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차 안에서 자기보다 훨씬 젊은 누군가가 부러움과 경탄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지나갔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자동차를 몰고 휘잉 지나가는 운전자를 보며 “좋은 시절이다.”하고 나를 부러워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삶의 신비 아닐까? 습관적 일상으로 의식조차 못한 채 흘려 보내는 우리 삶의 순간의 파편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우 특별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그러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는 그런 선물들을 군데군데 심어 놓으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하여, 내가 너무나 당연히 여겨왔던, 심지어는 있는 줄도 몰랐던 나의 그 무엇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이었음을 하나씩 둘씩 발견해 가면서 삶의 여정을 이어가도록 인도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우리 모든 삶의 순간들이 경이의 연속이기도 하다. 때로는 날숨과 들숨마저 그분의 허락 안에서 지속되어 온 것임을 문득 깨닫는 순간도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평범한데 비범하고, 일상적인데 거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