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줘서 고맙다아이가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 인문학당 달리 소장
whitenoise99@hanmail.net
라떼는 말이야, ‘각설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문 밖에 시끄러워 나가보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딱 그 모양새로 한 손에는 밥그릇, 다른 손에는 숟가락 하나 들고 종합예술 공연을 펼치던 사람들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린 나는 그런 각설이가 무섭고 싫었다. 다 해지고 더러운 옷에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과 그 웃음까지도 다 싫었다. 냄새는 또 어떻고. 우리 무서운 할배가 와서 딱 쫓아버렸으면 좋겠는데, 어찌 알고 할배가 없을 때만 골라서 찾아온다. 그런데 내 속도 모르는 할매는 이내 정지(‘부엌’의 방언)로 달려가서 보리밥 한 덩이를 들고나온다. 찌그러진 그릇에 보리밥 덩어리를 받아 든 각설이는 더 크게 노래를 부르면서 골목길 한가득 춤을 춘다. 한바탕 그러고 나서야 각설이는 연신 헤헤거리며 큰길로 사라진다. 그제야 조용하다.
“할매, 우리 묵을 것도 없는데 왜 맨날 각설이한테는 저 아까운 밥을 주능교?” “안 죽고 살아 왔다아이가. 고맙다아이가.” “안 죽고 살아온 게 우리캉 무슨 상관인교? 고맙기는 무슨 얼어 죽을...”
빈농의 여식으로 일자무식이었던 우리 할머니는 남편인 할아버지를 따라 스무 대여섯 살에 만주로 건너가셨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배고파 우는 어린 딸 하나 등에 업고 그 머나먼 길을 떠났던 할머니는 몇 년의 죽을 고생 후 아들 하나를 더 업고 여전히 고픈 배를 안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긴 여정과 이국만리 타향에서의 고생을 할머니는 길게 얘기한 적이 없다. 그저 ‘안 죽고 살아 왔다아이가’였다. 할머니는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다. 굴복하지 않고 살아냈다는 것의 숭고함을 알기에, 한 해 동안 전국을 떠돌며 겪었을 추위와 질병과 멸시와 냉대를 다 이겨내고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살아서 다시 돌아온 것을 환대한 것이다. 40년이 지나서야 할머니의 그 마음을 알겠다.
세상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풍족해지는 듯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각설이들이다. 그러니 포기하거나 추락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서로를 더욱 따뜻하게 ‘공감’하고 ‘환대’해야 하지 않을까. 특별히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나와 이웃들에게 ‘살아줘서 고맙다아이가’라고 다독이며 ‘함께’ 살아간다면, 하느님을 뵙는 그 날 하느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겠나. “잘 살다 와줘서 고맙데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