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장면을 아주 느린 영상으로 보면 빗줄기 사이에 많은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장면을 아주 느린 영상으로 봐도 꽃잎들 사이사이에 그렇게 많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가깝고도 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에 당신 사랑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면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사이사이에, 이 세상 모든 것 사이사이에 하느님은 생명으로 분명히 현존하십니다.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있는 이 신비를 삼위일체 대축일 성무일도 찬미가에서 이렇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성부는 모든 은총 원천이시고, 성자는 성부 영광 광채이시며, 성령은 무한하신 사랑이시니, 두 분이 발하시는 사랑이시네.” 어려운 내용이고 느린 영상으로도 볼 수 없는 영역이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인데, 인간이 이 신비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인간이 알 수 있는 내용도 아닌데,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성자 하느님을 통하여 세상에 성령 하느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 온갖 지혜와 총명 안에서 당신의 신비를 알게 해 주셨다.’(에페 1,8 참조)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고, 성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우리 신앙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깨어지고, 실수하고, 다시 하나 되는 시행착오를 거듭해 가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아주 조금씩 체험하고 혹은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한 삶의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리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위의 글은 ‘가시나무새’로 알려진 하덕규 씨의 작품인 ‘풍경’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제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처음 그대로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훗날 돌아갈 곳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성부 하느님을 제대로 보여주신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령의 도움으로 잘 알아듣고 몸으로 실천한 후 훗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