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움과 깨끗함. 과연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깨끗한 것인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깨끗함을 위생과 연결시키고 이를 다시 종교적 정결예법으로 확대시킨다. 고대인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던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이유 있는 생각이다. 사실 이것만 가지고 무어라 탓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신다. 이미 위생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淨)과 부정(不淨)을 논하는 바리사이의 태도에서 그분은 일종의 폐단을 발견하셨다. 다시 말해, 종교적으로 고착되어 버린 정(淨)과 부정(不淨)의 문제는 이제 또 다른 사회적 계층을 만들고 분리시키는 기준으로 변질된 것이다. 더러움을 기피하는 현상은 물건에서 사람에게까지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 또는 죄인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불결한 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만 평가되어 버린 더러움. 또 다른 사회적 소외의 요인으로 변질된 더러움. 이렇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정(淨)과 부정(不淨)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누는 기준을 사람 안으로 끌고 들어오신다. 더러움은 더이상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러움은 인간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무엇이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들어올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키느냐’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생각해 보라! 그분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증오와 시기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으로 여과시키고 용서라는 꽃을 피우셨다.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분노를 용서로 바꾸셨다.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연금술인가! 사랑은 이렇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용해시키는 가장 강력한 변형의 힘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간을 더럽히지 못한다. 더럽힐 수 있다면 그것은 육체일 뿐이다. 온갖 죄의 더러움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