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사제·부제 서품 미사가 있었습니다. 강론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소명을 언급하시고, 당사자의 응답과 거기에 따르는 합당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먼저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사제·부제에게 하신 강론이지만, 이 강론은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자녀들에게 모두 해당할 것입니다. 평신도 또한 보편사제직을 수행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말할 줄 모르는 아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주저하였습니다.(예레 1,6 참조) 하지만 말할 줄 모른다는 단점이 도리어 자기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했습니다. 마침내 예레미야의 충실한 선포는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동족에게는 박해를 받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임금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위협도 받고, 체포되어 동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예언자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이를 말합니다. 성경이 대표적인 예언서이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전해져오는 성전(聖傳)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듣고 말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면 예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우리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는 내면에서부터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타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이끄심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힘들수록 그분의 이끄심은 우리 마음에서 더 선명하고 강렬해집니다. 코로나19, 이것은 포기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것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는 기회로 삼을 때 우리는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에 충실하면서 마지막에는 그분의 부르심이었음을 깨닫기에 애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