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21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럽연합 사무국이 종교 차별의 이유로 “크리스마스” 대신 “공휴일”(holiday)이라는 단어를 쓸 것을 권장한 데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강하게 질타하셨지요. 그 이후 이 권장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고, 며칠 만에 철회되는 소동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참 의미는 잊고 단순한 축제로만 여기는 듯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탄을 2천년 전 이스라엘 한 지방,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성탄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목자들 역시 성탄이 오면 강론 준비 등 여러 일에 마음을 쏟다 보니 성탄의 참다운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교우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라지만 예년 같은 설렘과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대림절 4주가 지나고 드디어 성탄 대축일을 맞았다. 조심스레 성탄 밤 미사엘 가고, 오늘 성탄 낮 미사에 참례했다.” 어느 교우가 쓴 글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인 듯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님의 성탄을 한평생 자신의 화두로 삼고 사셨던 분입니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강조하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내 안에 잉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자렛 마리아가 그리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항상 낮은 곳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본능과 이기적 삶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불우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 안에 예수님은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잡하고, 소음이 가득 차고, 온갖 세상의 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탄생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낮은 자리에서 기도해보십시오. 그분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 “성탄을 일흔 번도 넘어”를 일부 인용합니다.
성탄을 일흔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권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저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신
그 무한한 당신의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들처럼
순수한 환희로 조배할 줄 모르옵네.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어 가장 미천하게 오신 그 크신 사랑에 고개 숙여 경배드립시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도록 편안한 자리를 마련합시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