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베풀 줄 알아야 하는데, 어른이 된 아기 새는 받는 데만 익숙해졌지 사랑을 베풀 줄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누리려고만 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방법은 생각지 않고, 주어진 물고기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그분과의 대화라고 말하면서도 만남의 시간을 자주 갖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깁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돌보심을 외면하고 ‘나’ 중심의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하느님은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리셨던 것입니다.(민수 21,6~9) 대단한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말씀대로 고개를 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믿는 마음으로 순명한 결과는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어른이 된 아기 새’와 같은 우리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는 계속됩니다.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자’ 큰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기쁨을 갖되,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빛으로 나아가는 은총의 사순 시기가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