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대뜸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와 상식을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좋은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 사랑에는 사람마다 기준이 있어서 한계 혹은 경계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기준은 하느님에게서부터 나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질투하시는 하느님도 보았고, 징벌의 하느님의 무서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 속의 하느님은 끝까지 사람과 세상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한 사람의 선함을 보시고, 당신이 하신 약속을 어기지 못하시고 끝까지 미련을 두시며 한 줄기 희망을 구원으로까지 끌고 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물러설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아시고 미리 그곳에 설 땅을 지워버리십니다. 원수가 그러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이 그러하며, 저주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그리고 이유없이 우리의 뺨을 때리는 이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지까지 세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잔인할 정도로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폭풍같이 몰아치는 주님의 말씀에 거절하고 숨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잘못하는 이와 우리에게 달라고만 하는 이들을 어떻게 거절 없이 다 맞아야 할지 방법도 없을뿐더러 우리 자신은 생각지도 않으시는 하느님께 섭섭하고 화가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를 화나게 하는 이들과 미운 이들, 그리고 심지어 원수까지 내가 사랑할 수만 있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받았고, 지금도 언제든 용서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손사래부터 치고 우리 기분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늘 상상과 현실 사이 어디쯤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상상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고 현실은 언제나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둘은 모두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현실 속의 우리는 그것을 2천년 전의 사건으로만 묶어 두는 것일까요? 왜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