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 그리고 추억이라는 정감을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애틋함과 가슴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방문하셨지만 가슴 따뜻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십니다. 고향을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예수님의 모습에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고향 사람들은 제자들을 거느린 예수님의 모습,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향 사람들은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 예수님의 모습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혹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고향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마르 6,3ㄱ)
이 짧은 한 문장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가졌던 고향 사람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추억이 깃든 고향을 찾아온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반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목수의 아들’이라는 오래된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은 한 사람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전 지식과 정보만으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이 거짓으로 탈바꿈할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이제 하느님의 아들도, 다윗의 자손도, 메시아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무지랭이 목수의 아들이었고 나하고 다르지 않은 ‘너’, 아니 나보다 못한 ‘너’였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고향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제 상황을 종료시키고자 하십니다. 몇몇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고는 조용히 고향을 떠나가십니다.
우리도 때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판단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생각에 성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성 안에 갇혀 나만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의 그릇된 자화상으로 인해 소중한 만남이 어긋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