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기위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 야 하는가?

다해 연중 32주일 강론

(2019.11.10,10:30, 남목성당)

찬미예수님!

 

연중시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전례주년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도 우리 삶의 마지막인 죽음과 죽음 이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독서와 복음은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삶이 아닌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말씀은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강요한 이교도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둘째아들이 죽으며 외친 사악한 인간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175여 년 전 이교도인 안티오쿠스 임금을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선조들부터 믿어온 종교를 버리고 이교도들처럼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살기위해 그 강요에 굴복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레위기 11,7-8절의 말씀처럼 모세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게 해 모세법을 어기고 종교를 버리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아들은 임금의 강요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독서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부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죽음의 삶을 살도록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가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두가이 사람은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면 로마의 통치도 상관치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 속했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현세만을 중요시 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 신앙과 영원한 삶은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구약의 신명기 내용을 이용하면서 부활은 비현실적인 엉터리 이야기이라며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신명기 255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이 내용을 근거로, 만일 일곱 형제가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후손 없이 죽고, 또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차례대로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은 일곱 형제는 같은 한 아내를 맞이한 셈인데, 그래서 그들이 부활한다면 그 여자는 일곱 형제들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부활 후의 삶은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 새로운 생명의 삶이다. 그 곳에는 이 세상처럼 장가가는 일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이신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 뒤의 삶은 죽은 삶이 연장되는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삶,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이후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는 오직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모습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의 모습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긴 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든지, 어떤 대목은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하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알아보게 되었든가 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본다는 것은 일종의 내면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지 직접 눈으로 알아보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문이 닫혔는데도 들어오시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 분의 육신은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벗어난 새로운 차원에 계시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그 분의 실존방식은 현재 우리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카7,11-17의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기적,마르코5,22-23.35-43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요한11,1-44의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의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이전의 생활로 복귀했지만, 때가 되어 결국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물학적 삶으로 되돌아와서 생물학적 법칙이 끝나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다시 살아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삶, 더 이상 죽음과 삶이라는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삶 안으로 들어간 새로운 차원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은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은 육신과 분리된 영혼만의 불사불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온전한 인간 존재 전체로서의 부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땅에 묻혀 썩어 없어졌거나 화장되어 재로 변해버린 옛 육체가 생물학적 상태로 회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새로운 차원에서(예수님의 부활처럼) 불사불멸성이 우리의 전인적 인격에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1코린토 14,43-44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은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부활은 온전한 십자가와 죽음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삶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십자가와 죽음의 삶을 살아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삶 속에서 매 순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하고,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두가이 사람들처럼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삶으로는 십자가의 삶도, 죽음의 삶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의 삶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해 못해서 살지 못합니까? 당연히 알고 이해하면서도 그냥 살지 못할 뿐이죠. 내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과 죽음의 삶도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이 오직 지금 여기 현실 삶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평신도 주일은 본당 교우대표가 신부님을 대신해서 강론을 합니다만, 오늘은 제가 방문한 탓에 교우의 강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교회는 60대 초에 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평신도의 신원을 분명하게 그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올해 평신도 주일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이 전해주는 메시지의 의미를 생각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이 영원한 삶, 부활의 삶보다는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현세만을 중시하는 사두가이 사람들처럼 살고 있지 않은지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십자가 없는 삶.죽음의 삶이 없는 삶이란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고, 팥 없는 찐빵과 같은 삶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의 삶이 아니라 그냥 죽은 삶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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