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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11호 2018.10.21
글쓴이 장재봉 신부

구약성경을 읽으면 하느님의 뜻이 너무 오락가락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변덕쟁이’ 같습니다.
 

장재봉 신부 / 월평성당 주임 gajbong@hanmail.net
 

  성경을 처음 접하면 충분히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읽고 또 읽고 새겨 읽다 보면 이 모두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에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훈계하신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세상의 어느 부모님이 자식이 잘못될 때 꾸중하지 않겠습니까?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더러 언성을 높여 야단도 치십니다. 모두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꾸짖고 벌을 줘서라도, 잘못된 길을 갈 때, 바로 잡아주는 게 부모의 도리며 의무이니까요. 하느님께서도 똑같으십니다.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혼내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시며 애간장을 태우시며 끝내 당신 사랑의 성심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 보이십니다.
   성경에서 느닷없이 여겨지는 위로와 희망과 사랑의 표현이야말로 하느님의 감출 수 없는 속마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매일을 말씀으로 살고 주님 사랑에 젖어 지내려는 다짐을 몹시 기뻐하십니다. 행복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아버지께 의탁하는 것만으로 갖은 축복을 주십니다. 복된 삶을 살도록 ‘시시콜콜’ 함께 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느님의 사랑은 감당키 힘들만큼 벅찬 것임을 믿고 거푸 성경을 읽으면 귀한 일깨움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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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10호 2018.10.14
글쓴이 임성근 신부

자녀에게 신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자녀의 신앙 교육을 막막해하시는 분을 종종 뵙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아웃소싱하는 데 길들여져있습니다. 영어는 영어학원에서 태권도는 태권도장에서 피아노는 피아노학원에서. 그런 풍토에서 신앙은 성당에서 맡아서 해야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 교육은 결코 아웃소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신앙은 자기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부모가 아닌 사람은 자녀에게 유전자를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해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초의 신앙선포자”(『가톨릭교회교리서』 2225항)입니다. 신앙 교육은 부모의 특권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자녀에게 선물해주는 것만큼 부모로서 큰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신앙 교육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가르칠 사명을 띠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26항)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우선 신앙을 신비 교육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교육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 방식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부모님은 종종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나요?’ 하십니다. 지식 전달의 교육에서는 잘 아는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 교육에서는 무지가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나도 잘 모르는 데 같이 찾아볼래?’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신앙 교육에서는 정답을 알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 교육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은총을 자녀와 함께 찾아보는 기쁨을 누려보시기를 기원합니다.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자녀의 신앙 교육을 막막해하시는 분을 종종 뵙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아웃소싱하는 데 길들여져있습니다. 영어는 영어학원에서 태권도는 태권도장에서 피아노는 피아노학원에서. 그런 풍토에서 신앙은 성당에서 맡아서 해야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 교육은 결코 아웃소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신앙은 자기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부모가 아닌 사람은 자녀에게 유전자를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해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초의 신앙선포자”(『가톨릭교회교리서』 2225항)입니다. 신앙 교육은 부모의 특권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자녀에게 선물해주는 것만큼 부모로서 큰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신앙 교육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가르칠 사명을 띠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26항)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우선 신앙을 신비 교육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교육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 방식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부모님은 종종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나요?’ 하십니다. 지식 전달의 교육에서는 잘 아는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 교육에서는 무지가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나도 잘 모르는 데 같이 찾아볼래?’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신앙 교육에서는 정답을 알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 교육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은총을 자녀와 함께 찾아보는 기쁨을 누려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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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8호 2018.09.30
글쓴이 염철호 신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사이에서 태어난 나필족(창세 6,4)이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이라는데, 정말인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욥기 1,6가 천사들을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필족이 천사들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타락 천사들이라 생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나필’이 히브리어로 “떨어진 자”를 의미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나필족이 천사들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존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창세 6,4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나필족이 있었는데”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나필족이 그때부터 있었다는 말이지,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란 말은 아닙니다. 사실, ‘나필족’은 민수 13,33에도 언급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정찰대를 파견하는데(민수 13,1), 사십 일 동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대가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아낙족이 그들의 후손들인데, 키가 커서 그들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반란을 일으키고 하느님께 충실하던 칼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벌을 받습니다. 창세 6,4는 그 나필족이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하는 대목으로, 여기서도 나필족이 언급되자마자, 인류 타락이 이야기되며, 하느님께 충실한 노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홍수라는 심판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보니 나필족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상징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천사와 사람 사이에 태어난 타락 천사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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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6호 2018.09.16
글쓴이 홍경완 신부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는 매일 합니다만, 실은 어떤 것이 내 뜻이고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교회는 인간을 피조물, ‘지음을 당한 사물’로 고백합니다. 그 반대말이 창조주, ‘지음을 시작한 주인’이지요. 엄밀히 보자면 지음을 당한 존재가 지은이의 뜻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책상이 목수의 뜻을, 작품이 작가의 뜻을 아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작가더러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만들었냐고 묻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알지 못하면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내 뜻보다 더 좋기 때문입니다. 모르지만, 지금도 모르고, 나중에도 모를 수 있고, 심지어는 하느님 품에 안기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게 될 일도 적잖겠지만, 아버지의 뜻은 분명 짧은 내 머리로, 좁은 내 시야로 생각한 내 뜻보다는 더 좋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이란 고백이 바로 이 확신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관련하여 성모님의 태도는 커다란 모범입니다. ‘주님의 뜻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곰곰이 간직하는 모습과, 어찌 되든 좋으신 아버지의 뜻이니 따르겠다는 신념, 그리고 나를 도구로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철저한 내맡김까지, 짧은 문장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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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5호 2018.09.09
글쓴이 장재봉 신부

악한 사람을 “동물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불만입니다. 제가 키우는 강아지는 너무나 착하고 예쁜데 어떻게 그런 표현을 사용할까요?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이런 표현이 꼭 동물은 악하다는 사실에 빗댄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동물에 불과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일지라도 육체적, 심리적 작용이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머문다면 동물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먹고 싶은 욕구, 자고 싶은 욕구,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욕구에 집착하여 본능에만 충실하다면 결코 인간다운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때문에 교회는 자기 위주의 이기적 욕구를 털어내지 못할 때 동물적 본능에 집착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치닫는 욕구를 정화시키려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늘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에 의탁하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모든 인간은 유혹이든 시험이든 자신의 전 존재를 흔들어 놓는 번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매 순간 선한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에만 완성되는 영적존재이기에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을 때, 유혹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주어진 본성을 통제하고 거스를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하고 의탁하는 믿음이야말로 ‘동물 같은’ 처지를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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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4호 2018.09.02
글쓴이 임성근 신부

어릴 적 성당을 잘 다니던 아들이 커서는 신을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당신을 흠숭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십니다. 믿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고 열매 맺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늘 더 큰 인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비유를 해봅시다. 사랑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십시오”라는 계명을 지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왜 사랑을 강요하느냐?”라고 되물을지 모릅니다. 헌데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하세요”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한 걸 왜 굳이 말로 하나요” 라고 되물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그와 비슷합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릴 적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딸과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그 사람과 사귀느냐는 별개의 문제지요.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대신해줄 수는 없는 거지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또래 집단의 영향으로 믿음의 씨앗이 심어진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는 있지만 사귀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을 갖기 위해서 목마름을 자주 청해야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더 자주 보고 싶고 더 그리워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기까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채워지지 않는 내적 공허함을 더 깊이 느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향해 가도록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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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3호 2018년 8월 26일
글쓴이 홍성민 신부

저는 지금 어떤 직업을 선택해서 앞으로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직업을 두고 고민하다 보면, 그 직업이 사회적으로 악용되는 부분이나, 비윤리적인 부분이 보여서 고민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직업을 선택하면서, 사회적인 성공이나 보수를 따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마음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지금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이 정답인 듯합니다. 어떤 직업이 더 윤리적인지, 또 반대로 비윤리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일도 그것을 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나쁜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특히 전문직이라고 일컬어지는 직업들에는 그 일을 수행하는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격이 있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자격에는 그에 따르는 특별한 권한이 주어지는데, 그 권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진 직업의 가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직일수록 그 직업인이 가져야 하는 ‘직업윤리’가 중요합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일에 임하고, 어떤 뜻으로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어떤 일을 하시든 그 일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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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2호 2018.08.19
글쓴이 염철호 신부

여러 책에서 아마겟돈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진다고들 말하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아마겟돈은 히브리말로 ‘하르-마게돈(므기또)’, 곧 므기또의 언덕(산)이라는 뜻입니다. 므기또는 이스라엘의 곡창 지대인 이즈르엘 평야를 지키던 성읍으로 필리스티아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자주 벌어졌던 곳입니다. 또한,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던 요시야 임금이 파라오 임금 느코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전사했던 곳입니다.(2열왕 23,30) 이것이 묵시 16,12-16에서 사탄의 세력이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임금들을 불러 모은 곳을 하르마게돈이라고 부르는 배경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떤 이들은 아마겟돈에서 실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세계 대전이 벌어질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교리를 가진 교단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그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아마겟돈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겟돈은 미래의 실제 전쟁터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교단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의 장소도 아닙니다. 예언서나 묵시록에 담긴 전투 이야기들처럼 아마겟돈은 모두 매 시대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적대자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를 말합니다. 묵시록이 이를 다소 두려운 방식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매일같이 마주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느님 자녀로 올바르게 살아야함을 “강력하게” 권고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아마겟돈 최후의 전투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다시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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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1호 2018.08.12
글쓴이 권순호 신부

저는 항상 돈을 엄청 많이 벌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틀렸는가요? 돈이 많아야 남들에게 베풀 수도 있고 성당에 헌금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본당 사목을 했을 때 교무금과 헌금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교무금을 많이 낼 줄 알았는데,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입이 많지만 자신의 수입에 비해 교무금을 적게 내는 교우들도 적지 않으며, 수입이 별로 없지만 교무금을 자신의 수입에 비해 많이 내는 교우도 있었습니다. 시골 가난한 본당이 도시 부유한 본당보다 1인당 헌금액이 더 높습니다. 이웃 본당에서 성전을 지으려고 다른 본당에서 모금을 가 보더라도 비슷한 현상이 나오기도 합니다. 부유한 본당이라고 모금액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본당에서 모금액이 더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진다고 저절로 남을 돕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머니가 두둑해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집니다. 돈이 있어야 베풀 수 있다면 예수님은 재벌 2세로 태어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유함에서 하느님의 참된 기적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경제 원리, 돈의 논리, 경영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공동체는 사랑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비록 돈이나 권력 등 가진 것은 없으나 사랑으로 마음이 부유하면 거기에 예수님은 기적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먼저 더 베풀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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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9호 2018.07.29
글쓴이 홍경완 신부

미사나 기도할 때 손을 꼭 모아야 하나요?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문화는 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땅을 딛어야 했던 앞발이 땅의 강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맞고 편리하게 바꾸어놓으면서 비로소 문화가 시작됩니다. 창작과 노동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손이 주연을 꿰찹니다.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인간 손이 지닌 특성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손을 기도할 때는 그냥 둡니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기도 하고 마주 잡고 있기도 합니다. 자세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손을 쓰지 않으려는 표현입니다. 과르디니(R. Guardini)라는 신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자는 두 손을 펴서 마주대어 합장한다. 수신(修身)과 숭배를 말하는 자세이다. 겸손하고 차분하게 말씀을 아뢰는 한편 귀담아 듣는 경청의 자세이다. 자기방위에 쓰이는 손을 고스란히 묶어서 하느님 손 안에 바치는 것은 항복과 봉헌의 표시이기도 하다.”
   손 모음의 자세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두 손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도로 맡겨 그분 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이 몸짓은 소리 기도, 마음 기도와 더불어, 몸으로 바치는 훌륭한 몸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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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8호 2018.07.22
글쓴이 장재봉 신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하느님이 바로잡아 주면, 죄를 짓지 않을 테고 죄로 인한 고통도 당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나요?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공감합니다. 만약 우리가 상대를 공격하려 할 때, 그 마음을 꽃잎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주거나 남을 비방하고 욕하려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면 세상의 다툼은 엄청 줄어들 테지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라며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나의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죄를 짓지는 않겠지만 전혀 기쁨도 행복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요. 때문에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유로 인해서 당신의 뜻이 아닌 죄로 쏠릴 위험소지가 많음에도 허락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자유를 선물하신 이유를 뚜렷이 밝히는데요.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행동”할 것을 권하고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1베드 2,15~16 참조) 때문에 주님의 멋진 선물인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그러기에 자유의지에 따른 고통을 배제하려는 마음이 자칫 옳은 삶을 배제시키는 행위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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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7호 2018.07.15
글쓴이 임성근 신부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삼가 아뢰오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미사 중에 다함께 “아멘”이라고 응답하고 나면, 영성체 예식을 시작하면서 사제는 이런 초대말로 주님의 기도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다”는 말의 어감이 사극같다 여길지 모릅니다.

   헌데 그 전에 “삼가 아뢰다”는 말의 깊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말 “파레시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40번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어 말하다’(1 코린 12, 3)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다’(에페 6, 19)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파레시아는 유대교 회당에서 성령에 힘입어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 그리스 문화에서 자유인이 법정이나 대중 앞에서 발언하는 모습, 순교자가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신앙을 떳떳이 밝히며 진리를 증언하는 모습, 영성가들이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도록 이끄시는 전능하신 성령의 힘을 동방과 서방의 전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현으로써 담대함(파레시아), 단순 소박함, 자녀다운 신뢰, 기쁨에 찬 자신감, 겸손한 대담성,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등으로 표현하였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78항)

   이제 “삼가 아뢰오니”라는 주님의 기도 초대말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으신가요?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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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6호 2018.07.08
글쓴이 홍성민 신부

제가 ‘일 중독’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에 과도하게 애착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딱히 일 말고는 관심 있는 일이 없고, 일을 유능하게 해낼 때의 성취감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건강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에도 어려움이 많아 스트레스도 받습니다.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일 중독(workaholic)은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 중독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건강, 인간관계 등)를 겪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일에 빠지게 되는 원인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중독을 애착의 문제라고 설명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애착은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는 부모와 가족,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을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물질이나 행위, 관계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애착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이 중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래서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다면,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삶 속에서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일 자체를 줄이는 것 보다, 일하는 이유를 나의 유능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사랑하기 위한 마음으로 한다면 일의 의미와 일을 하는 이유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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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5호 2018.07.01
글쓴이 염철호 신부

창세 18,2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분의 천사가 하느님으로 밝혀지는데, 주님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성경에서 하느님은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각각 구분되는 모습으로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에 교회는 하느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창세기 1장에는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언급되고 있고, 요한복음 1장에는 아들이신 하느님 또한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느님 곁에 계셨다고 이야기하니, 삼위일체 하느님이 창세기 시작부터 이어지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 함께 등장하셨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무조건 삼위일체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창세 18,2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분의 손님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세 분 가운데 한 분만 주님으로 드러나고, 나머지 두 분은 천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19,1 참조) 이 이야기에서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에 관해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신 뒤 자리를 떠나시고,(창세 18,33) “그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를 파멸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소돔과 고모라로 갑니다.(창세 19,13 참조) 물론, 성경에서 주님과 주님의 천사를 구분한다는 건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천사를 주님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그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주님의 일꾼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종종 주님을 직접 만나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을 두고 “하느님의 벗”이라고 부릅니다.(야고 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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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4호 2018.06.24
글쓴이 권순호 신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ㅤ매일ㅤ십자가를ㅤ져야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ㅤ고통을ㅤ받아들이는 것은ㅤ무슨ㅤ의미인가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고통 자체를 즐기라는 것인가요?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고통은 모든 사람들이 다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오히려 즐기는 심리적인 병을 메조키스트라고 합니다. 메조키스트는 고통 그 자체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하신 십자가는 고통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위하여’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불의의 사고로 전신불수가 되어 10년간 침대에서 누워만 있는 30대 젊은이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하느님은 왜 고통을 자신에게 주셨는지를 물었습니다. 사고로 자신의 꿈도 청춘도 다 잃고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조그만 차창 밖의 작은 하늘 밖에 없는데, 이런 고통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고통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것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감내 해 보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말에 그 젊은이의 눈에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의미치료법으로 유명한 유대계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은 인간은 ‘위하여’의 존재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가치를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이더라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보다 높은 가치, 인류의 구원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음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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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3호 2018.06.17
글쓴이 홍경완 신부

아들과 관계가 점점 힘이 들더니 이젠 아예 틀어졌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그 녀석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한다는 사고작용이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해는 앞선 이해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이나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이해한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해지려면 그 사람과 사건을 내게 익숙한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이미 이해가 이루어진 앞뒤 맥락 속에 위치시켜 놓아야 합니다. 이해는 이렇듯 복잡한 사고과정을 수행하는 인간이성의 주된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해를 떠받치는 이 세계가 문제입니다. 내가 나만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사람과 사건을 해석하듯, 그 역시 그만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사람과 사건을 보면서 이해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가 내 자녀여도 매한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경험, 환경 속에서 내가 ‘이해와 오해’를 하는 것처럼, 아들 역시 그만의 고유한 생각과 경험, 환경 속에서 ‘이해와 오해’를 합니다. 이해의 배경이 이렇게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선 이 배경들의 공유가 많아져야 하는데, 생각, 경험, 환경을 함께 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 가족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으로 접근하는 대상입니다. 사랑 또한 이해가 아니라 인정과 같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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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2호 2018.06.10
글쓴이 장재봉 신부

어머니, 여동생과 갈등과 불화를 겪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저를 주님은 제 치부를 들추지 않고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는 너무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죄인이고 분노의 대상입니다.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글에 담긴 형제님의 아픔이 읽힙니다. 하지만 타인의 가정사에 왈가왈부하기보다 주님을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형제님의 마음가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은 형제님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내 사랑이 통하지 않고 거부당한다는 느낌에 갇혀서 홀로 어릴 적 상처를 다시 끌어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제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길은 선명하고 뚜렷합니다. 사랑하라… 또 사랑하라… 더욱 사랑하라… 그래요.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이고 고통이며 희생인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은 여러 모양입니다. 더러 속이 상했다는 것을 독설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어쩌면 어머니나 동생은 그렇게 거칠게 퍼붓고 나서 더 마음 아파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지닌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형제님의 마음과 처신이 중요합니다. 이제라도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저에게 글을 보냈듯, 주님께 더 구구절절 심정을 털어놓으세요. 답답한 상황을 당장에 변화시켜주지는 않을지라도 형제님이 가족을 대하는 마음을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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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1호 2018.06.03
글쓴이 임성근 신부

신부님 제의에 IHS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가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IHS는 예수님의 이름을 뜻하는 그리스 말 약자입니다. 크리스토그램이라고도 합니다. 보물찾기하듯이 성당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제병에, 제의에, 영대에, 제대보에, 병자영성체용 성합에, 고해소에, 성당종에, 성수대에. 그 밖의 많은 성물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잘 묵상해봐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예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아기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가 알려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30항 참조)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그 분의 이름YHWH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저 “그 이름”(하쉠) 혹은 “주님”(아도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약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제 죄인들도, 병자와 가난한 이들도, 심지어 이방인들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10, 47)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전례 가운데 IHS라는 이름을 보시거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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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0호 2018.05.27
글쓴이 홍성민 신부

아이에게 평소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일해야 할 때는 스마트폰을 주곤 하였는데 후회하고 있습니다. 점점 빠져드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스마트폰의 자극은‘즉각적’입니다. 원하는 것을 바로 찾고, 바로 보여주는 것이 스마트폰의 매력입니다. 여기에 적응된 사람은 참고, 기다리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결과를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쉽게 얻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의 기술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기술만이 아니라, 휴대전화기를 아이에게 내주었던 우리 어른들의 마음도, 원하는 결과를 좀 더 쉽게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이를 돌보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스마트폰을 내주었던 것이라면, 이러한 양육태도 역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아이의 짜증을 들어주고, 달래주고, 함께 놀아줘야 하는 어른(부모)의 역할은 손쉽게 건너뛰면서, 아이에게만 참고 견디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선한 포도밭 주인’ 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일할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그들에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우리 눈에는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한 처사 같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구원은 품삯으로 주어진 한 데나리온이 아니라,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하느님과 함께 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잘 교육한다는 것 역시 아이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결과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나눈 시간과 그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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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9호 2018.05.20
글쓴이 염철호 신부

창세기 1장 26절에 하느님께서 직접 주님 스스로를 칭하시며“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 구절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주님의 계시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곧 하나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성경도 한 편의 긴 드라마라고 한다면 당연히 첫 장면에서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하지는 않겠지요. 드라마의 앞부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암시해 줄 뿐인데, 성경의 경우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언자들의 예언들, 그리고 여러 사건들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앞서 암시된 요소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며 하나씩 그 의미를 드러낼 것인데, 창세 1,26의“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독자는 이 대목을 읽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영이“우리”에 해당하는 구성원임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창세 1,2 참조) 그리고 이 성령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성경 드라마 전체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시며, 예수님을 잉태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우리”에 예수님도 포함된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바 입니다. 신약성경은 육을 취하신 예수님이 바로 태초부터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곧 하느님이었음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요한 1,1∼18) 이렇게 보니, 신약성경까지 다 읽게 된 독자는“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암시한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신약의 빛으로 구약의 모든 구절을“다시 읽기”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며, 오직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믿고 고백하는 이들, 곧 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것을 믿는 이들만이“우리”라는 표현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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