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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2호 2018.08.19
글쓴이 염철호 신부

여러 책에서 아마겟돈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진다고들 말하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아마겟돈은 히브리말로 ‘하르-마게돈(므기또)’, 곧 므기또의 언덕(산)이라는 뜻입니다. 므기또는 이스라엘의 곡창 지대인 이즈르엘 평야를 지키던 성읍으로 필리스티아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자주 벌어졌던 곳입니다. 또한,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던 요시야 임금이 파라오 임금 느코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전사했던 곳입니다.(2열왕 23,30) 이것이 묵시 16,12-16에서 사탄의 세력이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임금들을 불러 모은 곳을 하르마게돈이라고 부르는 배경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떤 이들은 아마겟돈에서 실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세계 대전이 벌어질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교리를 가진 교단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그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아마겟돈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겟돈은 미래의 실제 전쟁터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교단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의 장소도 아닙니다. 예언서나 묵시록에 담긴 전투 이야기들처럼 아마겟돈은 모두 매 시대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적대자들과 벌이는 영적 전투를 말합니다. 묵시록이 이를 다소 두려운 방식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매일같이 마주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느님 자녀로 올바르게 살아야함을 “강력하게” 권고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아마겟돈 최후의 전투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다시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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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1호 2018.08.12
글쓴이 권순호 신부

저는 항상 돈을 엄청 많이 벌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틀렸는가요? 돈이 많아야 남들에게 베풀 수도 있고 성당에 헌금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본당 사목을 했을 때 교무금과 헌금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 교무금을 많이 낼 줄 알았는데,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입이 많지만 자신의 수입에 비해 교무금을 적게 내는 교우들도 적지 않으며, 수입이 별로 없지만 교무금을 자신의 수입에 비해 많이 내는 교우도 있었습니다. 시골 가난한 본당이 도시 부유한 본당보다 1인당 헌금액이 더 높습니다. 이웃 본당에서 성전을 지으려고 다른 본당에서 모금을 가 보더라도 비슷한 현상이 나오기도 합니다. 부유한 본당이라고 모금액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본당에서 모금액이 더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진다고 저절로 남을 돕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머니가 두둑해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집니다. 돈이 있어야 베풀 수 있다면 예수님은 재벌 2세로 태어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유함에서 하느님의 참된 기적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경제 원리, 돈의 논리, 경영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공동체는 사랑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비록 돈이나 권력 등 가진 것은 없으나 사랑으로 마음이 부유하면 거기에 예수님은 기적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먼저 더 베풀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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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9호 2018.07.29
글쓴이 홍경완 신부

미사나 기도할 때 손을 꼭 모아야 하나요?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문화는 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땅을 딛어야 했던 앞발이 땅의 강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맞고 편리하게 바꾸어놓으면서 비로소 문화가 시작됩니다. 창작과 노동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손이 주연을 꿰찹니다.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인간 손이 지닌 특성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손을 기도할 때는 그냥 둡니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기도 하고 마주 잡고 있기도 합니다. 자세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손을 쓰지 않으려는 표현입니다. 과르디니(R. Guardini)라는 신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자는 두 손을 펴서 마주대어 합장한다. 수신(修身)과 숭배를 말하는 자세이다. 겸손하고 차분하게 말씀을 아뢰는 한편 귀담아 듣는 경청의 자세이다. 자기방위에 쓰이는 손을 고스란히 묶어서 하느님 손 안에 바치는 것은 항복과 봉헌의 표시이기도 하다.”
   손 모음의 자세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두 손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도로 맡겨 그분 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이 몸짓은 소리 기도, 마음 기도와 더불어, 몸으로 바치는 훌륭한 몸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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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8호 2018.07.22
글쓴이 장재봉 신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하느님이 바로잡아 주면, 죄를 짓지 않을 테고 죄로 인한 고통도 당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나요?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공감합니다. 만약 우리가 상대를 공격하려 할 때, 그 마음을 꽃잎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주거나 남을 비방하고 욕하려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면 세상의 다툼은 엄청 줄어들 테지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라며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나의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죄를 짓지는 않겠지만 전혀 기쁨도 행복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요. 때문에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유로 인해서 당신의 뜻이 아닌 죄로 쏠릴 위험소지가 많음에도 허락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자유를 선물하신 이유를 뚜렷이 밝히는데요.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행동”할 것을 권하고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1베드 2,15~16 참조) 때문에 주님의 멋진 선물인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그러기에 자유의지에 따른 고통을 배제하려는 마음이 자칫 옳은 삶을 배제시키는 행위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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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7호 2018.07.15
글쓴이 임성근 신부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삼가 아뢰오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미사 중에 다함께 “아멘”이라고 응답하고 나면, 영성체 예식을 시작하면서 사제는 이런 초대말로 주님의 기도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다”는 말의 어감이 사극같다 여길지 모릅니다.

   헌데 그 전에 “삼가 아뢰다”는 말의 깊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말 “파레시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40번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어 말하다’(1 코린 12, 3)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다’(에페 6, 19)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파레시아는 유대교 회당에서 성령에 힘입어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 그리스 문화에서 자유인이 법정이나 대중 앞에서 발언하는 모습, 순교자가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신앙을 떳떳이 밝히며 진리를 증언하는 모습, 영성가들이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도록 이끄시는 전능하신 성령의 힘을 동방과 서방의 전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아름답고 전형적인 표현으로써 담대함(파레시아), 단순 소박함, 자녀다운 신뢰, 기쁨에 찬 자신감, 겸손한 대담성,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등으로 표현하였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78항)

   이제 “삼가 아뢰오니”라는 주님의 기도 초대말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으신가요?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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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6호 2018.07.08
글쓴이 홍성민 신부

제가 ‘일 중독’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에 과도하게 애착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딱히 일 말고는 관심 있는 일이 없고, 일을 유능하게 해낼 때의 성취감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건강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에도 어려움이 많아 스트레스도 받습니다.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일 중독(workaholic)은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 중독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건강, 인간관계 등)를 겪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일에 빠지게 되는 원인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중독을 애착의 문제라고 설명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애착은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는 부모와 가족,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을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물질이나 행위, 관계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애착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이 중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래서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다면,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삶 속에서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일 자체를 줄이는 것 보다, 일하는 이유를 나의 유능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사랑하기 위한 마음으로 한다면 일의 의미와 일을 하는 이유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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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5호 2018.07.01
글쓴이 염철호 신부

창세 18,2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분의 천사가 하느님으로 밝혀지는데, 주님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성경에서 하느님은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각각 구분되는 모습으로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에 교회는 하느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창세기 1장에는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언급되고 있고, 요한복음 1장에는 아들이신 하느님 또한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느님 곁에 계셨다고 이야기하니, 삼위일체 하느님이 창세기 시작부터 이어지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 함께 등장하셨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무조건 삼위일체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창세 18,2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분의 손님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세 분 가운데 한 분만 주님으로 드러나고, 나머지 두 분은 천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19,1 참조) 이 이야기에서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에 관해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신 뒤 자리를 떠나시고,(창세 18,33) “그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를 파멸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소돔과 고모라로 갑니다.(창세 19,13 참조) 물론, 성경에서 주님과 주님의 천사를 구분한다는 건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천사를 주님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그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주님의 일꾼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종종 주님을 직접 만나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을 두고 “하느님의 벗”이라고 부릅니다.(야고 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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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4호 2018.06.24
글쓴이 권순호 신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ㅤ매일ㅤ십자가를ㅤ져야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ㅤ고통을ㅤ받아들이는 것은ㅤ무슨ㅤ의미인가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고통 자체를 즐기라는 것인가요?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고통은 모든 사람들이 다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오히려 즐기는 심리적인 병을 메조키스트라고 합니다. 메조키스트는 고통 그 자체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하신 십자가는 고통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위하여’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불의의 사고로 전신불수가 되어 10년간 침대에서 누워만 있는 30대 젊은이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하느님은 왜 고통을 자신에게 주셨는지를 물었습니다. 사고로 자신의 꿈도 청춘도 다 잃고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조그만 차창 밖의 작은 하늘 밖에 없는데, 이런 고통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고통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것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감내 해 보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말에 그 젊은이의 눈에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의미치료법으로 유명한 유대계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은 인간은 ‘위하여’의 존재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가치를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이더라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보다 높은 가치, 인류의 구원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음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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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3호 2018.06.17
글쓴이 홍경완 신부

아들과 관계가 점점 힘이 들더니 이젠 아예 틀어졌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그 녀석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한다는 사고작용이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해는 앞선 이해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이나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이해한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해지려면 그 사람과 사건을 내게 익숙한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이미 이해가 이루어진 앞뒤 맥락 속에 위치시켜 놓아야 합니다. 이해는 이렇듯 복잡한 사고과정을 수행하는 인간이성의 주된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해를 떠받치는 이 세계가 문제입니다. 내가 나만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사람과 사건을 해석하듯, 그 역시 그만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사람과 사건을 보면서 이해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가 내 자녀여도 매한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경험, 환경 속에서 내가 ‘이해와 오해’를 하는 것처럼, 아들 역시 그만의 고유한 생각과 경험, 환경 속에서 ‘이해와 오해’를 합니다. 이해의 배경이 이렇게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선 이 배경들의 공유가 많아져야 하는데, 생각, 경험, 환경을 함께 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 가족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으로 접근하는 대상입니다. 사랑 또한 이해가 아니라 인정과 같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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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2호 2018.06.10
글쓴이 장재봉 신부

어머니, 여동생과 갈등과 불화를 겪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저를 주님은 제 치부를 들추지 않고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는 너무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죄인이고 분노의 대상입니다.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글에 담긴 형제님의 아픔이 읽힙니다. 하지만 타인의 가정사에 왈가왈부하기보다 주님을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형제님의 마음가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은 형제님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내 사랑이 통하지 않고 거부당한다는 느낌에 갇혀서 홀로 어릴 적 상처를 다시 끌어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제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길은 선명하고 뚜렷합니다. 사랑하라… 또 사랑하라… 더욱 사랑하라… 그래요.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이고 고통이며 희생인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은 여러 모양입니다. 더러 속이 상했다는 것을 독설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어쩌면 어머니나 동생은 그렇게 거칠게 퍼붓고 나서 더 마음 아파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지닌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형제님의 마음과 처신이 중요합니다. 이제라도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저에게 글을 보냈듯, 주님께 더 구구절절 심정을 털어놓으세요. 답답한 상황을 당장에 변화시켜주지는 않을지라도 형제님이 가족을 대하는 마음을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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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1호 2018.06.03
글쓴이 임성근 신부

신부님 제의에 IHS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가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IHS는 예수님의 이름을 뜻하는 그리스 말 약자입니다. 크리스토그램이라고도 합니다. 보물찾기하듯이 성당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제병에, 제의에, 영대에, 제대보에, 병자영성체용 성합에, 고해소에, 성당종에, 성수대에. 그 밖의 많은 성물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잘 묵상해봐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예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아기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가 알려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30항 참조)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그 분의 이름YHWH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저 “그 이름”(하쉠) 혹은 “주님”(아도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약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제 죄인들도, 병자와 가난한 이들도, 심지어 이방인들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10, 47)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전례 가운데 IHS라는 이름을 보시거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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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0호 2018.05.27
글쓴이 홍성민 신부

아이에게 평소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일해야 할 때는 스마트폰을 주곤 하였는데 후회하고 있습니다. 점점 빠져드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스마트폰의 자극은‘즉각적’입니다. 원하는 것을 바로 찾고, 바로 보여주는 것이 스마트폰의 매력입니다. 여기에 적응된 사람은 참고, 기다리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결과를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쉽게 얻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의 기술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기술만이 아니라, 휴대전화기를 아이에게 내주었던 우리 어른들의 마음도, 원하는 결과를 좀 더 쉽게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이를 돌보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스마트폰을 내주었던 것이라면, 이러한 양육태도 역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아이의 짜증을 들어주고, 달래주고, 함께 놀아줘야 하는 어른(부모)의 역할은 손쉽게 건너뛰면서, 아이에게만 참고 견디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선한 포도밭 주인’ 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일할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그들에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우리 눈에는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한 처사 같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구원은 품삯으로 주어진 한 데나리온이 아니라,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하느님과 함께 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잘 교육한다는 것 역시 아이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결과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나눈 시간과 그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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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9호 2018.05.20
글쓴이 염철호 신부

창세기 1장 26절에 하느님께서 직접 주님 스스로를 칭하시며“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 구절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주님의 계시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곧 하나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성경도 한 편의 긴 드라마라고 한다면 당연히 첫 장면에서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하지는 않겠지요. 드라마의 앞부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암시해 줄 뿐인데, 성경의 경우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언자들의 예언들, 그리고 여러 사건들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앞서 암시된 요소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며 하나씩 그 의미를 드러낼 것인데, 창세 1,26의“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독자는 이 대목을 읽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영이“우리”에 해당하는 구성원임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창세 1,2 참조) 그리고 이 성령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성경 드라마 전체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시며, 예수님을 잉태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우리”에 예수님도 포함된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바 입니다. 신약성경은 육을 취하신 예수님이 바로 태초부터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곧 하느님이었음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요한 1,1∼18) 이렇게 보니, 신약성경까지 다 읽게 된 독자는“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암시한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신약의 빛으로 구약의 모든 구절을“다시 읽기”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며, 오직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믿고 고백하는 이들, 곧 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것을 믿는 이들만이“우리”라는 표현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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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8호 2018.05.13
글쓴이 권순호 신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작은 계명에 집착하는 것은 좀생이의 마음이 아닐까요?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보통 결혼이 파경에 이르고 이혼을 하는 부부는 이혼의 이유를 흔히‘성격 차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자매들도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부부는 다른 성격끼리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격에‘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혼 상담가들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성격차이’는 갈등의 주원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부는 보통 큰일이 아니라,  작은 일로 다툽니다. 그리고 작은 다툼의 골이 깊어지고 이혼을 하게 됩니다. 악마는 작은 곳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잉꼬부부는 싸움과 갈등이 없는 부부가 아닙니다. 그들은 작은 일로 생기는 갈등이나 싸움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작은 갈등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부부는 흔히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버리거나 속으로 곪아 들어가도록 방치합니다. 그래서 파경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른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작은 일에서부터 갈등과 분열과 미움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라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종합됩니다. 사랑의 파괴도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됩니다. 악마도 작은 갈등과 작은 미움 속에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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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7호 2018.05.06
글쓴이 홍경완 신부

불안한 미래 때문에 두렵습니다.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더 그렇습니다.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jubo@catb.kr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아직 다가오지 않음’이란 미래의 말뜻이 이미 그 속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고,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 당연합니다. 알면 조금 덜 불안합니다. 모르니까 더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불안은 무언가 준비되었다 해서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실상 준비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먼저 무엇이 미래를 위한 제대로 된 준비인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에만 매달리면 기복으로 쉽게 빠져들고 맙니다. 그와는 반대로 처한 현실은 외면한 채 내세만을 앞세우는 신앙 역시 위험합니다. 자칫 살아가면서 만나는 불안과 괴로움, 어려움에 눈감게 만드는 마취제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내 삶에 뿌리를 두고서 삶을 이끄는 방향타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하느님께‘불안하고 알 수 없는 내일을 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맡기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일과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미래를 주님께‘오롯이’의탁할 수 있는 참된 덕으로서의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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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6호 2018.04.29
글쓴이 장재봉 신부

레지오 회합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구원송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장재봉 신부 / 선교사목국장 gajbong@hanmail.net
 

  1917년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 이후에 널리 알려진‘구원송’은 1956년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구원송’이 포함되지 않은 묵주기도를 계속 해오고 있었지요. 1998년 한국 세나뚜스 협의회는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가 전 세계 레지오 마리애와 일치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설립 초기부터 바치던 묵주기도와 그 전 후에 바치는 시작기도, 까떼나, 마침기도 안에 구원송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포함된 사실에 의거하여 한국의 모든 레지오의 회합이나 행사에서 묵주기도 중‘구원송’을 바치지 않도록 결정했습니다. 사실 구원송에“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라는 부분은 마침기도의“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모든 이를 깨우치렵니다.”와“죄로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렵니다.”는 부분과 흡사합니다. 구원송의“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부분 또한“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마침기도와 뜻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부산 바다의 별 레지아 산하 레지오 마리애는“각 본당의 영적 지도자의 요청이 있을 시에 해당 평의회나 행사에서‘구원송’을 바칠 수도 있다.”라고 명시하여 필요에 따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물론 레지오 단원, 개인이 바치는 묵주기도에서도‘구원송’을 바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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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5호 2018.04.22
글쓴이 임성근 신부

제게 성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임성근 신부 / 우동성당 부주임 pantaleon@naver.com
 

  성소에 대한 질문의 출발점은‘‘내’가 무슨 선택을 하는가?’가 아니라‘‘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가?’입니다. 성소는 단 한 번의 결단이라기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식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성소를 식별할 때 세 가지를 꼽아봅시다. 우선 본인 자신의 결단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맞갖는 실력과 자질도 겸비해야 하는데 곧,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인성과 사회성, 학업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지성, 내적인 생활과 성덕을 닦을 수 있는 영성, 그리고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사목적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신앙 공동체입니다. 성소는 자기가 속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고 양육됩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소는 소속 본당이나 공동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소에 있어서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은 사제 서품식 경문에도 드러납니다.“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는 주교님께서 여기 있는 이 부제들을 사제로 서품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제가 하고 싶으니까 저를 서품해주세요’라고 하지 않고‘신앙 공동체가 원하니까 이 후보자를 서품해주세요’라고 표현합니다.
  셋째는 가정의 역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당신의 가정은 성소친화적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가정은‘최초의 신학교’가 되어 어린이들이“어려서부터 신앙과 기도가 무엇인지, 교회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현대의 사제양성 41항) 물론 이 말은 가정이 완벽해야 성소가 생긴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가정에서 겪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위기 모두가 사제 성소의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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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4호 2018.04.15
글쓴이 홍성민 신부

저는 알코올 중독자는 아닙니다만, 술을 좋아해서 가끔 건강이 염려됩니다. 배도 점점 나오고, 술 마신 다음 날은 많이 피곤합니다.‘술을 좀 줄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금단현상 같은 것은 없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질까 봐 그러지를 못합니다.
 

홍성민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parvus@hanmail.net
 

  제가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중독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입니다. 중독이 아니라면 안심이고, 만약 중독이라면 줄이든지 끊든지 하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독은‘진행성 질환’입니다. 꼭 중독이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건강과 일상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술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술은 내 삶을 조금 더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지, 술을 위해 내 건강과 일상을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 때 마지막 인사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미사의 목적은 성당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숨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는 힘이 참된 신앙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좋아 세상으로 가지 않고 그 안에만 머물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건강하지 못한 종교 중독입니다.
  술은 세상을 더 건강하고 잘 살게 하는 데까지만 필요한 것이지, 만약 술로 인해 삶의 어떤 부분이 희생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꼭 중독환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익숙한 것을 바꾸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술자리는, 사람을 사귀고 함께 하는데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술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움을 나누는 많은 방법도 분명 많이 있습니다. 본인이 가진 취미나 평소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보시고, 그것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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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3호 2018.04.08
글쓴이 염철호 신부

마지막 날 부활 때 헤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부모님께서 아프실 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다시 만나면 꼭 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이 땅 위에서 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워 하늘나라에서라도 갚아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하여 다시 만날 때 돌아가신 부모님은 더 이상 무엇을 갚아 드릴 필요가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니까요. 그때에는 더 이상 아파하는 이도, 병든 이도, 죽는 이도, 부족한 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 위에 매여 있던 모든 고리에서 풀려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마태 22,23∼33 참조)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고통받던 지상의 육신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육신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한 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막달레나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임을 알아보았고,(요한 20,11∼18)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식탁에서 함께 빵을 떼어 나눌 때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13∼35)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을 믿는 이는 누구나 라자로처럼 부활했다가 다시 죽게 될 그런 육신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육신으로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해드리지 못한 것을 갚을 수 있도록 기다리시라고 기도하기보다, 완전히 변화된 몸으로 다시 만나 영생을 함께 누리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부활 때 기쁘게 부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각자의 삶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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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2호 2018.04.01
글쓴이 권순호 신부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철부지 어린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그렇게 순수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분별력도 참을성도 없고 미성숙합니다. 그런 미성숙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느님 뜻을 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권순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albkw93@hotmail.com
 

  육체적인 나이로는 어른인데, 애처럼 행동하면 어른 아이라고도 합니다. 심리학 치료법 중에 내면의 아이를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어렸을 적에 상처받은 아이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도 주체하지 못하는 이상한 죄책감, 불안감, 열등감, 분노, 우울함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바로 내면의 어린이가 발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정신이나 인격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교육을 많이 받아서 자칭 똑똑한 사람이나 자격증이나 학위를 받아 박사나 의사, 전문인이 되었다고 내면의 아이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린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성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은 내면에 숨겨 놓은 어린이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든든한 손을 잡고 싶고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고 어리광도 부리고,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는 어린이의 마음은 항상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철부지 어린이가 되어도 됩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어른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필요한 철부지 어린이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내면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참된 성숙과 구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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