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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께 바치는 자비의 기도에 관하여

 

  •                                               
  • 찬미예수님!
    
    
    				

    오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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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1일 부활 제 2주간 화요일 강론

    방어진성당 주임 신부 김두유 세례자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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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 '태초의 창조주

    '태초의 창조주'는 그의 독특한 신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젊은 시절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은 그가 런던의 램버스(Lambeth)에 살 때

    계단 위에서 떠오른 환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여기서 창조주는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워 작업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구약성서의 잠언 8장에 나오는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만물을 창조하는

    야훼(여호와)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찬미 예수님!

    오늘도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두 번째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예로 들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제대로 보고, 하늘 일을 믿도록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여러분들은 바람을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바람은 분명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리를 들어서 알던가 아니면 뭔가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을 통하여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 자체로는 우리 눈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깃발의 방향을 보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 자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연 현상을 예를 들어서

    가시적인 것을 설명하는데도 니코네모는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이라고 하는 단어를

     ‘프네우마’라는 단어로 말씀하시고,

    뒤에 나오는 ‘영’이라는 단어도 ‘프네우마’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프네우마는 히브리어 루아흐(Ruah)를 번역한 말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주님께서 첫 사람을 만드실 때 숨을 이용하셨고,

     아담을 흙으로 만드신 뒤 숨(루아흐)을 불어넣자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루아흐는 주님의 숨과 호흡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죽는다는 표현을 ‘숨’이 끊어지다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숨과 호흡이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지 않아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첫 번째의 탄생이고,

    죄로 말미암은 거룩한 영이신 하느님과의 단절로 인한 죽음에서부터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두 번째의 탄생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사이인 니코데모는 분명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활동을

     잘 연구했으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니코네모의 말과 마치 루가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말이 거의 흡사합니다.
     

    다만 차이점은 니코데모는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써

    이해되지 않는 예수님의 말에 대한 의문이고,
     

    마리아는 조심스럽지만 이미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여 경청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으려 하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의문에 대한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말하는 천사의 인사말의 시작이

     ‘은총이 가득한 이여’로 출발합니다.
     

    니코데모는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지식에 의지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하고 뛰어난

    스승의 범주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핀잔을 주십니다.
     

     분명 니코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학자로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성경 속에 담겨 있는 위대한 진리를 놓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아는 것만큼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는 이 말은

     하느님을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고 증언하고 있는지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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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을 읽을 적이 있습니다.

작가가 말하기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또는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느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진리를 말씀을 해주셔도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비단 니코데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해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이해되지 않으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말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진리에로 이끄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셨듯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하느님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면서,

믿는 이들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구리 뱀이 구원의 표징이 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구원의 표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은 이제 죽음으로부터 일어났듯이,

우리도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우리 인간을 돌보시는가? 에 대한

 답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늘에서 내려오셔야 했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

다시금 아버지 곁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믿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지

체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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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17.10)


우리는 영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영에서 태어난 사람답게 드러나야 합니다.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갈라티아서 5장22-23에 나오는 9가지 열매가 그것입니다.

참된 열매를 맺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며, 현실의 열매가 후대에 영원한 열매가 되도록

 노력하며 사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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