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예언자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과 답답한 현실 상황에서 장차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또한 요한 묵시록 21장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예언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새롭게 태어나는 지구촌이 되고, 기쁨과 즐거움의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독서에서 말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들어와서 오염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완전한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억압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물론 놀라운 일들을 우리들이 목격하여 참된 믿음에로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은 눈으로 보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자체로도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나중에 언급이 되겠지만,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들이 주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내용인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들의 이성과 고정관념, 가치관을 뛰어 넘지 못하는 고정 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세속적인 사고 방식에 편승하여 과학적이고, 검증되어야만 믿겠다는 모습이 다분히 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무딘 마음을 도려내고,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말씀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 한마디가 우리를 살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라시면서 동시에 친절하게 기적과 표징을 보여주심으로써 나약한 우리들을 믿음에로 이끄시는 모습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복음 곳곳에 나오지만, 우리들이 무언가 잘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도 잘 못 알아볼 때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들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친절을 베푸시는지요? 그것은 주님을 만난 사람은 확실하게 구원에로 이끄시기 위해서, 참된 생명을 얻고 얻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왕실 관리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은 질병의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온전한 치유로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처한 부자유로움을 그냥 놔두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마저 바쳐서 모든 죄악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우리를 믿음에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하루 동안에 부자유로움이 느껴지고, 죽을 것만 같은 어려움들이 따른다면, 주님께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하고 우리의 기도를 바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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